『최소한의 과학 공부』 감사의 말에 딸을 언급했었다. “딸이 읽을 책이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엄밀하게 쓸 수 있었다”라고 말이다. 많은 분이 이 부분이 감동적이었다고 해주셨다. 원고를 가장 처음 읽은 출판사 편집자분부터, 최근 책을 기증한 딸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까지. 실제로 딸은 책을 써낼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이 된다. 음식 광고에 “내 자식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듭니다”라는 카피를 종종 본다. 그건 작가로서 나의 신조이기도 하다. 언젠가 딸이 읽을 책이기에, 개념 하나 허투루 쓸 수 없고 사소한 어법도 틀리면 안 된다.
그런데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딸이 읽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이 책을 쓸 때 상정한 타깃 독자층은 문과 전공 학부생이었다. 그건 오판이었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며칠 전 브런치에도 썼지만, 『최소한의 과학 공부』가 기획보다 어렵게 나왔다는 반성 때문이다. 도서관 대출 통계를 봐도 40~50대 독자 비율이 가장 높다. 10~20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ㅜㅜ). 인터넷에 올라오는 책 리뷰도 연배가 좀 되는 분들이 쓴 티가 난다. 나는 딸이 15년 뒤쯤에는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읽으리라 예상했는데, 아무래도 한참 더 미뤄질 것 같다.
그러던 중에 뜻밖의 제안이 왔다. <풀빛>이라는 출판사에서 청소년 과학 교양서 출간을 의뢰한 것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놀랐다. <풀빛>이라길래, 대학 때 자주 읽었던 사회과학 도서 출판사로 알았기 때문이다. 설마 나한테 좌파 사회과학 책을 쓰라는 건가? 나 데모질 접은 지 한참 됐는데? 실제로 내가 알던 <풀빛>은 주로 이런 책들을 냈었다.
나는 <풀빛>이 이 출판사인 줄로 알았지ㄷㄷㄷ
다행히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다. <풀빛>은 청소년 교양서 전문 출판사였다. 사실이번에 처음 들어봤다(하긴 첫 제안을 한 <웨일북>도 당시에는 몰랐다). 그런데 대표작이라는 『~ 쫌 아는 10대』 시리즈의 판매지수를 보니, 단박에 감이 왔다. 꽤 탄탄한 곳이라는. 출간을 제의한 편집자분이 “청소년 교양서는 베스트셀러가 되긴 힘들지만, 오래 꾸준히 팔린다.”라고 강조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다만 고민이 되었다. 지금 쓰고 있는 『(가제) 연구소의 탄생』이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고, 내년에 한 권 더 내기로 계약까지 한 마당에, 또 일을 벌여도 될까 싶어서다. 만약 한다면 병행 작업이 되어야 했다. 이 고민을 출판사에 이야기했더니, 흔쾌히 내 작업 일정에 맞춰주기로 했다. 청소년 교양서는 분량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부담 갖지 말라며.
고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청소년 교양서를 써본 적도 없고, 쓸 생각도 안 해봤다. 청소년을 상대해본 경험이라고 해봐야, 약 20년 전 고3 논술을 가르쳐 본 게 전부다. 그런데 내가 일했던 강남의 그 학원은 수업 강도가 꽤 셌던 곳이다. 고3 논술이래도 (거짓말 좀 보태서) 웬만한 대학원 세미나 수준은 되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뭘 써본 경험이 내게는 없다. 더구나 요즘 아이들은 문해력도 약하고 긴 글을 못 읽는다고 하지 않나. 출판사에서 레퍼런스로 보내준 책들을 보니 걱정이 더욱 되었다. 과연 내가 이런 걸 쓸 수 있을까.
아이들 대상으로 쉽게 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닐 것 같다;;
하지만 결국 하기로 했다. 서두에도 언급한 것처럼, 딸을 위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결정적이었다. 딸이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읽기 전에 예습처럼 볼만한 책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얼마 전 <딸의 배신>이라는 글에서도 썼지만, 『최소한의 과학 공부』는 『포켓몬 한글공부』와의 매치업에서 철저히 패배하기도 했었고. 아빠 책을 딸이 의무가 아니라 순수하게 재미로 고를 수 있으면 좋겠다. 청소년 교양서라면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집 서점 체험에서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제끼고 산 『포켓몬 한글 공부』를 열심히 읽는 딸… 아빠가 그거보다 유잼인 책을 쓸께.
또 때마침 『최소한의 과학 공부』의 쉬운 버전을 한번 써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던 중이기도 했다. 물론 그 버전을 청소년 대상으로까지 확 낮추는 가정은 안 해봤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왕 작가를 업으로 택한 거, 최대한 다양한 책을 써보는 일도 필요할 것 같다. 그래야 내가 진짜 잘 쓸 수 있는 분야가 뭔지를 알게 될테니.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은 내게도 좋은 도전이 될 것이다.
이번 계약을 논의하며 확실히 느꼈다. 출판업계에서 인문 교양 분야는 작가 풀이 넓지 않음을 말이다. 이건 대부분의 출판사 편집자분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니 출간이 목표인 브런치 작가가 있다면, 인문 교양 분야를 노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에세이보다는 난도가 있기는 하다. 레퍼런스를 찾아서 정리하는 기초 작업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어려우면 남도 어려운 법이다. 그만큼 출간 기회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더 많은 브런치 작가님들이 인문 교양 분야로 진출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