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토론이 며칠째 계속되었다. 참석자들의 의견 차이는 컸고, 쉽게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보통 토론이 격해지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학문적 자존심, 또는 물질적 이해관계. 둘 중 하나라도 결부되면 결론을 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토론의 경우 둘 다 해당했다. 전기시스템의 국제 표준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전기표준회의의 핵심 주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19세기 물리학의 성과로 전자기학이 완성되면서, 전기기술이 세계적 첨단 산업으로 대두하던 무렵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28개국 대표들은 기술 표준을 선점해서 이 신흥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가장 목소리가 컸던 두 나라는 영국과 미국이었다. 전자기학의 대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바로 영국 출신이었다. 맥스웰의 후배들은 저항치의 단위를 ‘옴(Ω)’으로 정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는 전기왕 토머스 에디슨이 있었다. 에디슨의 조명시스템은 3년 전 열린 엑스포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여세를 몰아 1880년에는 백열전구의 특허까지 냈다. 이렇듯 두 나라의 강력한 기술 패권을 비집고 들어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가가 지원하는 연구
베르너 폰 지멘스도 독일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지멘스는 물리학자면서 발명가였고, 또한 사업가였다.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사이에 독일 최초의 전선을 설치한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1847년 창업한 지멘스는 요즘도 잘 나가는 글로벌 기업이다. 아마 물리학에 관심 없어도 축구를 좋아하면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지멘스는 전성기 레알 마드리드 CF의 스폰서였고, 그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은 많은 축구팬의 기억에 강렬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국자였던 지멘스는 독일이 미국, 영국 등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독일은 1871년에야 통일을 이루어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었고, 그만큼 자본주의 산업화가 늦었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선진국과의 차이를 좁히고자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전기산업도 그중 하나다. 다만 그러자면 정밀한 측정기술이 우선 필요했다. 전기를 산업화하려면, 여러 물질의 전기적 속성에 대한 측정값이 충분히 축적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윤 창출이 목적인 기업들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과학연구의 중장기 역량, 즉 고도의 전문지식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래서 파리에서 돌아온 지멘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전기산업을 지원하고 그 기술적 문제를 해결할 국가 연구소를 만듭시다!”
1881년 파리 국제전기박람회 중에 열린 국제전기표준회의에서는 기술 표준을 선점하려는 국가들의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것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낯선 이야기였다. 그때만 해도 과학은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라는 인식이 강해서였다. 실제로 대부분 과학자는 아마추어였고, 연구에 필요한 비용도 개인이 부담했다. 설령 기업에 도움이 될 연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연구 결과로 이득을 볼 기업이 당연히 비용을 대야 했다. 1830년대 영국의 지질조사국 설립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지질조사국을 만들면 광업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이 나오자, 영국 정부는 광산회사들이 그 비용을 내라고 했다. 물론 광산회사들은 지질조사국이 생긴다고 당장 이득이 되지 않는다며 이런 주장을 무시했다. 결국 정부의 한시적 지원으로 지질조사국이 만들어졌지만, 정식으로 상설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요컨대 세금으로 과학을 지원한다는 발상은 처음부터 보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의 지원이 연구의 자율성과 객관성을 해칠 것이라고 우려한 과학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은 달랐다. 독일 정부는 과학에 대한 지원이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제 막 제국의 성립을 선포한 만큼, 학문과 지식에서 위엄을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이는 독일 특유의 이상주의적 학문관과도 공명하는 것이었다. 과학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려 한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진리 탐구라는 본연의 가치에 치중하는 전통이 강했다. 이에 따라 19세기말 독일에서는 교육과 연구에 대한 지원이 크게 늘었다. 특히 이 무렵 독일 대학에서 발달한 교수 중심의 실험실 체제는 그 중요한 결과다. 즉 교수의 지도로 대학원생들이 연구와 실험을 하고, 세미나 개최와 논문 집필도 일상화된 실험실이 대학의 핵심 제도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이 교육기관을 넘어 연구기관으로도 기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최초의 국가 연구소
따라서 지멘스의 연구소 설립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지멘스는 전기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으나 속 좁은 졸부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사업 기반인 전기기술 못지않게 순수 물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근본적인 지식을 발견하는 물리학 연구가 활발해야 국가도 발전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는 또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아니어서 거액의 연구소 설립 자금도 내놓았다. 19세기 독일에는 과학을 이렇게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이 많았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헤르만 폰 헬름홀츠도 지멘스를 지원했다. 그 역시 파리 국제전기표준회의에 참석했고, 독일의 전기산업 발전에 대한 지멘스의 비전에 공감했다. 학계와 산업계를 대표하는 두 거물이 의기투합하자 결국 정부도 나섰다. 연구소 설립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베르너 폰 지멘스(왼쪽)와 헤르만 폰 헬름홀츠(오른쪽)는 독일 전기산업을 지원하고자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국가 연구소의 설립을 주장했다.
마침내 1887년 제국물리기술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연구소도 마찬가지다. 한 국가의 역량을 투입하는 거대한 이 조직이 아무 이유 없이 만들어질 리 없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는 19세기말 독일 제국, 즉 통일 직후의 사회 상황이 투영되어 있다. 제국의 영광을 이루려는 정치적 필요, 첨단기술을 선점하려는 산업적 요구, 학문과 연구를 중시하는 사회 풍토가 합쳐진 결과였다. 초대 소장은 헬름홀츠가 맡았다. 수도 베를린에 자리 잡은 입지도 좋았다. 주위에 이공계 명문대학인 샤를로텐부르크공과대학과 베를린대학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지성이 모인 이 ‘인재의 삼각지대’는 향후 베를린을 세계 물리학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기반이 된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는 제1부 과학부와 제2부 기술부로 구성되었다. 그중 기술부의 임무는 재료, 공구, 측정장치의 성능 검사였다. 이것은 당시의 과제였던 전기산업 발전과 직접적 관련이 있었다. 특히 공구의 표준화와 온도, 빛, 전기 등에 대한 정확한 계측은 독일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꼭 필요했다. 반면 과학부는 물리학 연구에 집중했다. 그것은 훗날 새로운 산업을 개척하기 위한 이론적 진지로 여겨졌다. 지멘스는 과학부의 역할을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국가의 위신을 높이고 민족 간의 경제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 국가의 미래를 이끌 두뇌집단으로서 과학부에 갖는 지멘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과학부 건물이 지멘스가 소유한 베를린의 금싸라기 땅에 지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는 최초의 근대적 국가 연구소였다. 그때만 해도 대학교수를 제외하면 직업으로서의 과학자는 드물었다. 과학자는 생업이 따로 있었고, 연구는 퇴근 후 집에 갖춰놓은 실험실에서 했다. 예컨대 존 돌턴은 교사였고,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목사였으며, 제임스 프레스콧 줄은 양조업자였고, 찰스 다윈은 백수였다. 이들은 여러 동기에서 과학을 연구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개인적 호기심 - “그냥 궁금해서” - 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제국물리기술연구소와 같은 국가 연구소가 등장하면서 과학자들에게도 소속과 임무가 생겼다. 즉 국가가 과학자들을 고용해 프로젝트를 주고, 그 대가로 급여와 연구비를 지급하는 연구방식이 제도화되었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가 선보인 이 체제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외국에서도 수입해갔다. 1900년 영국 국립물리학연구소, 1901년 미국 국립표준국의 설립이 대표적 예다. 20세기 들어 이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다양한 형태의 연구소들이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는 20세기 ‘연구소의 시대’를 미리 보여준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베를린에 있는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옛 건물(위쪽). 지금은 연방물리기술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건물도 브라운슈바이크로 이전했다(아래쪽).
흑체복사라는 난제
1900년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서 과학사를 뒤흔들 지식이 발견되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하지 못했던, 흑체복사에 대한 이론적 설명에 성공한 것이다. 주인공은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였다. 그는 흔히 말하는 천재형 과학자는 아니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음대와 물리학과 사이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했었다. 이때 고민하는 플랑크에게 뮌헨대학 교수 필립 폰 욜리가 “물리학은 충분히 발전해서 이제 더 발견할 것이 없다. 기껏해야 구멍 몇 개를 메우는 게 전부일 것”이라며 만류한 일화는 유명하다. 플랑크는 그래도 음대보다는 나을 것 같다며 물리학과에 진학했는데, 이 선택이 욜리의 확신을 처참히 무너뜨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흑체복사는 19세기 독일의 산업적 요구에 따른 과학의 문제였다. 이런 것이다. 물체에 열을 가하면 빛이 뿜어져 나오는데, 온도에 따라 색깔이 점점 바뀌면서 이글거린다. 쇳덩어리를 떠올려 보면 된다. 처음에는 짙은 붉은색을 띠다가, 온도가 높아지면 주홍색처럼 밝아진다. 거기서 더 가열하면? 그럼 노란색처럼 보였다가, 마지막에는 푸르스름한 색이 감돌게 된다. 당시 과학자들의 관심은 이러한 온도와 빛의 색상 스펙트럼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쇠를 다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으로 알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이것은 전기제품의 품질 향상에 필요한 지식이었기에 매우 중요했다. 온도와 색상 스펙트럼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공식을 만들 수 있다면, 필라멘트에 열을 가해 빛을 내는 백열전구의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그래서 독일 가스수도전문가협회를 비롯한 많은 기술자가 갓 출범한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빛을 측정하는 더 나은 장치와 광도의 단위를 개발해주시오”
이미 1860년대부터 많은 물리학자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흑체’라는 이름은 베를린대학 교수였던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붙인 것이다. 그는 모든 전자기파를 100% 흡수하는 이상적 물체를 흑체라고 가정하고, 흑체가 전자기파를 방출할 때는 그 세기가 온도에 의해서만 결정됨을 밝혔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근거로 주어진 온도에서 모든 빛의 파장 범위에 해당하는 흑체복사 스펙트럼 분포를 알아내야 했다. 그러나 키르히호프를 비롯한 대부분 학자의 시도가 실패했다. 사실 완전히 실패만 한 것은 아니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면밀한 측정 실험을 거듭한 끝에 부분적인 해법들은 찾아냈다. 1896년 빌헬름 빈이 발표한 빈 변위 법칙은 짧은 파장대의 실험 결과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뒤이어 1900년에는 제임스 진스가 레일리-진스 복사법칙을 발견해서 긴 파장대의 실험 결과를 설명해냈다.
문제는 두 공식 모두 짧은 파장에서 긴 파장에 이르는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진스의 공식대로라면 짧은 파장대에서 에너지가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황당한 결과가 나왔다. 과학자들은 이를 자외선 파국이라 불렀다. 자외선은 가시광선의 보라색 바깥에 해당하는 전자기파로서 파장이 짧다. 그러니까 진스의 공식이 짧은 파장대에서는 폭망했다는 뜻이다.
20세기 과학의 시작
마침내 막스 플랑크가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을 괴롭혀온 난제를 해결했다.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베를린대학 교수로 임용된 플랑크는 1894년부터 흑체복사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동료들과 함께 측정치를 수년간 분석한 끝에 독창적인 공식을 개발할 수 있었다. 20세기가 목전에 다가온 1900년 12월의 일이었다. 새로운 공식의 핵심은 바로 플랑크상수라는 특정한 상수에 있었다. 플랑크는 이제껏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흑체복사의 에너지는 플랑크상수의 정수배가 되어야 한다”라는 과감한 가설을 도입해서 논리를 전개했다. 그러자 흑체복사의 스펙트럼 분포가 비로소 모든 파장대에서 완벽히 설명될 수 있었다. 발상의 전환이 새로운 돌파구를 만든 셈이다.
막스 플랑크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학자였다. 그러나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이론을 창안하면서 20세기 양자역학 혁명에 중대한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그런데 발상의 전환은 흑체복사를 아득히 넘어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당시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던 고전물리학(뉴턴역학과 전자기학)의 핵심 전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플랑크의 가설은 에너지가 일정한 단위의 덩어리(플랑크상수의 정수배)로 이루어짐을, 즉 양자화되어 불연속적으로 존재함을 함의했다. 반면 고전물리학에서 에너지 개념은 경계가 없는 연속적인 것으로 정의된다. 천동설과 지동설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이론적 차이다.
이것은 플랑크도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급진적 혁명가보다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에 가까웠고, 고전물리학의 체계를 무너뜨릴 의도도 없었다. 그래서 엄청난 발견을 해놓고도 당황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플랑크는 학계에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도 한 가지 전제를 달았다.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라 흑체복사를 설명하기 위한 수학적 미봉책일 뿐이라고. 제자인 막스 보른은 이러한 플랑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전혀 혁명적이지 않았고 철저히 회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논리적 추론의 힘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강해서, 물리학을 뒤흔든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흑체복사를 설명한 플랑크의 이론은 오늘날 양자가설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역사는 20세기를 뒤흔든 양자혁명의 시작점을 - 플랑크는 원하지 않았겠지만 - 이때로 기록한다. 과학에서 20세기는 뉴턴과 맥스웰이 확립한 고전물리학의 권위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대체하는 시대다. 그 기원은 독일 전기산업, 흑체복사, 막스 플랑크, 양자가설로 이어지는 격변의 중심이었던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라는 최초의 국가 연구소는 20세기를 이해하는 단초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