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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Nov 17. 2024

기초연구의 독립선언

1911년 독일 카이저빌헬름협회

황제의 콧수염은 유난히 위엄이 있었다. 양 끝을 길게 꼬아서 말아 올린 모양이 제국의 권위를 드러내는 듯했다. 그것은 수염 주인의 실제 성격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바로 1888년 독일 제국의 3대 황제로 즉위한 빌헬름 2세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독일”이라는 통치 철학에 따라 식민지 개척과 세계 패권을 꿈꿨다. 그래서 매사에 제국의 군주로서 근엄함을 앞세웠고, 수염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훗날 이 독특한 수염 모양은 ‘카이저수염’이라 불린다. 카이저는 독일어로 황제인데, 여기서는 빌헬름 2세를 뜻한다. 이 수염이 어찌나 유명했는지, 1980년대 선풍적 인기를 끈 게임 캐릭터도 따라 했다. 그 캐릭터의 이름은 슈퍼마리오다.

     

베를린대학 교수이자 왕립도서관장이었던 아돌프 폰 하르낙도 황제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1909년 그는 황제를 알현하여 간단하면서도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기초연구에 특화된 국가 연구소를 만듭시다” 연구소라면 20여 년 전에 만든 제국물리기술연구소가 이미 있는데? 하지만 하르낙의 구상은 더욱 원대했다. 독일이 강대국이 되려면 과학이 기업들을 지원하는 수준으로는 부족했다. 그보다는 물리학과 화학 등의 지식을 앞장서 발견하여 사회의 기반을 든든히 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따라서 대학이나 기업에서 분리되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자율적 대형 연구소가 필요하다. 때마침 빌헬름 2세는 부국강병으로 제국의 영광을 이루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르낙은 이렇게 부추겼다. “지금 독일에 필요한 산업화의 문제들도 물리학과 화학의 더 많은 원리를 발견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

     

하르낙의 구상은 급성장하는 과학을 뒷받침할 제도와도 직결되었다. 당시 독일 과학연구의 중심은 대학이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는 독일 사회에 충격과 함께 변화를 가져왔다. 강한 국가를 만들자는 민족의식이 높아졌고, 누구보다도 지식인들이 앞장섰다. 특히 역점을 둔 것은 대학의 개혁이었다. 그것은 전문지식을 갖춘 유능한 국가의 인재들을 길러낸다는 목표로 집약되었다. 빌헬름 폰 훔볼트를 위시한 교육운동가들은 자유로운 연구와 진리의 탐구라는 이상주의적 철학을 내세웠다. 훔볼트의 주장이다. “대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과학과 학문을 궁극적인 무한한 과업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수와 학생들이 끝없는 탐구의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인문주의라 불린 이러한 개혁의 영향으로 대학의 학술 연구 기능도 중요해졌다. 즉 교수는 교육자이면서 연구자이고, 대학원생들의 연구를 지도하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독립적 연구능력을 인정받은 대학원생에게 수여하는 박사학위 제도도 이러한 인식의 산물이었다. 이로써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결합을 통해 지식과 연구자를 생산하는 공간으로 진화했다. 이것은 현대 연구중심대학의 기원이기도 하다.

1810년 개교한 베를린대학(첫 번째). 현재 베를린훔볼트대학(두 번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층과 2층 계단 사이에 졸업생 카를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구(세 번째)가 적혀있다.


대학의 산하 기구들도 연구에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되었다. 이로써 나타난 중대한 변화는 대학 내부에도 연구소 조직이 보편화했다는 점이다. 본래 교수들은 개인 비용을 써서 사적으로 실험실을 운영했다. 당연히 연구의 규모나 수준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국가의 재정이 투입되면서 실험실은 첨단 장비와 넓은 공간을 갖춘 연구소로 확대되었다. 그곳에서 강의는 물론 연구와 실습이 일상화되었고, 세미나와 콜로키움도 주기적으로 열렸다. 대학 연구소는 개인 실험실과 달리 집단연구 체제로 운영되었다. 즉 정교수를 중심으로, 한두 명의 부교수, 사강사, 조교, 대학원생 등이 함께 연구를 수행했다. 이것은 교사와 학생이 공동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독일 특유의 ‘제미나르’ 제도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교수를 정점으로 촘촘히 계층화된 도제식 교육과 연구를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될 수 있었다.

     

대학의 개혁은 독일 연구경쟁력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지방분권의 전통이 강한 독일의 대학은 지역 간 라이벌 의식도 뚜렷했다. 그래서 유능한 교수를 두고 스카우트 경쟁을 벌였고, 교수들은 마치 프로야구 FA처럼 좋은 조건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인재의 이동으로 교수 개인은 물론, 각 대학의 역량도 강해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대학의 비정규 인력이었던 사강사도 교수급에 못지않았다. 19세기말 독일은 산업화와 함께 인구가 급증했고, 대학도 그와 함께 늘어났다. 다만 교수직은 그렇지 못해서, 대학은 임시직인 사강사를 확대해서 날로 늘어가는 강의 수요를 충당했다. 사강사들은 부족한 교수직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성과가 교수들을 뛰어넘기도 했다. 예컨대 막스 폰 라우에는 뮌헨대학 사강사 시절에 결정격자 내에서 X선 회절현상을 발견해 191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지도교수였던 막스 플랑크보다도 4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전문 연구소의 필요성

     

그런데 대학에서 과학연구의 활성화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교수들을 중심으로 “연구할 시간이 부족하다”라는 불만이 제기된 것이다. 이는 교육과 연구라는 두 업무를 절충하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과학의 발달과 전문화가 강의 후 남는 시간에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음이 더욱 근본적이었다. 교육과 연구의 종합이라는 신인문주의적 대학 개혁이 오히려 과학연구에 방해가 되는 역설이 벌어진 셈이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하는 중이었다. X선, 방사능, 전자 등의 잇따른 발견에 물리학자들은 당황했고, 이 현상들을 설명할 이론체계가 필요해졌다. 그것은 대학에 소속된 연구소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 난점을 꿰뚫어 본 인물이 빌헬름 정부의 교육 관료였던 프리드리히 알트호프다. 그는 평생 고등교육정책을 담당하며 대학 개혁을 주도했는데, 만년에는 물리학과 화학의 연구소 설립에 관심을 두었다. 대학에 임용된 유능한 과학자들이 교육업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현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에 알트호프는 과학자들이 강의에서 해방되어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대학 밖에 전문 연구소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19세기 독일 대학 연구소의 실험 모습

     

알트호프의 사후에는 하르낙이 계획을 이어받았다. 보수적인 신학자였던 그는 연구소가 필요한 이유로 독일이 제국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점도 꼽았다. 그 무렵 미국에서도 대형 연구소 설립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01년 록펠러 의학연구소, 1902년 카네기 연구소가 출범했다. 카네기 연구소에 들어간 돈만 당시 기준 1,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하르낙은 과학에서 별 볼 일 없던 미국이 이런 과감한 투자를 통해 독일을 제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황제를 설득하는 데도 국가적 위기의식 - 이러다 독일은 미국에도 뒤처지고 말 겁니다! - 을 앞세웠다. 빌헬름 2세의 관심은 온통 독일을 위대한 제국으로 만드는 데 쏠려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의 사례는 하르낙의 오해에 가까웠다. 미국의 연구소 설립은 (이름에서 보듯) 국가가 아니라 민간 자본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방임주의 영국의 후예답게,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과학연구를 세금이 아니라 자선사업으로 하는 것으로 여겼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가 연구소 설립에 거액을 기부한 이유도 미국의 과학이 좀처럼 발전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미국의 과학이 세계를 주도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국가의 과학 투자는 그보다 늦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나 본격화했다.



    

공학과의 구분 짓기

     

그렇다면 왜 하필 ‘물리학’과 ‘화학’에 특화된 연구소였을까? 물론 물리학과 화학이 과학의 기초이자 근본이라는 학문적 당위성이 있었다. 다만 당시의 연구소 설립을 둘러싼 사정은 이보다 복잡했고, 당위보다는 현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19세기말 독일이 이룬 산업화에는 과학 이상으로 공학의 기여가 컸다. 이것은 국가가 일찍부터 기술자학교를 세워서 직인, 기사, 관료 등을 양성한 효과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1765년 세워진 프라이베르크 광산학교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광업 교육기관이다. 중세의 길드에 가까웠던 이 학교들은 19세기 들어서 단순한 기술 전승을 넘어서는 형태로 전문화했다. 1825년 설립된 카를스루에 공업기술학교가 이를 선도했는데, 이곳은 1865년 독일 최초의 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고등공업학교는 수학과 과학의 기초지식을 산업현장에 적용한다는 실용적 목표를 지향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진전으로 학교의 규모가 커지고 수업의 질도 높아지자, 학문 연구의 성격도 강해졌다. 1899년에는 마침내 박사학위를 수여할 권리마저 얻었다.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은 현재 독일 모든 공과대학의 기원이기도 하다.

     

공학이 이렇게 급성장하자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현실적 위협을 느꼈다. 공학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 즉각적인 유용성에 있다. 즉 실용 학문인 공학의 기술은 제품의 생산, 기계의 개량, 자원 개발 등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다. 반면 순수 학문인 과학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물리학과 화학의 지식에는 인류의 삶을 바꿀 혁신적 잠재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르며 이런저런 응용이 더해질 때 그러할 뿐, 그 자체로 현실적 쓸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당장 어디에 쓸 데가 있겠는가. 이것은 국가의 한정된 지원을 두고 공학자들과 경쟁하는 과학자들로서는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베를린 공과대학 총장 알로이스 라이들러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는 양방향적”이라고 주장했는데, 과학의 위상을 넘볼 만큼 성장한 공학의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결국 하르낙을 위시한 과학자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산업화의 문제들도 물리학과 화학이 발전해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논리로 유용성 논란을 우회하려 했다. 기초연구가 당장은 불확실성이 높지만, 꾸준히 지원을 받아야만 공학이든 산업이든 그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논리가 현실로 구체화한 것이 물리학과 화학에 특화된 국가 연구소 설립 계획이었다. 요컨대 1887년의 제국물리기술연구소가 그러했듯, 이 또한 당시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과학의 요구가 상호작용한 결과였다.



     

지원은 Yes, 간섭은 No

     

1910년 빌헬름 2세는 베를린대학 설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의외의 선언을 했다. “학생을 가르칠 의무가 없는 기초과학 연구소가 필요하다.” 이는 1년 전 하르낙이 제출한 연구소 설립 제안서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한 마디로 교육과 연구를 분리하겠다는 취지다. 19세기 신인문주의의 산물인 베를린대학의 창학 정신과는 정반대의 연설이었다.

     

황제의 연설 직후 연구소 설립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부의 출연금 이외에도 많은 기부금이 위원회에 모였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 설립에 앞장섰던 베르너 폰 지멘스가 다시 한번 거액을 내놓았다. 철강업의 대부 프리드리히 크루프도 마찬가지였다. 이외에도 화학산업, 은행업 등에서도 기부금이 쇄도했다. 독일 산업계의 유명인사치고 돈을 안 내놓은 사람이 드물었다. 연구소 설립의 전면에 황제가 나선 효과라고 할 만했다.

카이저빌헬름협회의 설립 총회(위쪽)와 개회식에 방문한 빌헬름 2세(아래쪽)

     

1911년 마침내 카이저빌헬름협회가 출범했다.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설립을 주도한 황제 빌헬름 2세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연구소 명칭에 그대로 붙였다. 연구소 부지는 베를린 외곽인 달렘의 국유지로 정해졌다. 이에 화학연구소(1911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1912년), 생물학연구소(1913년), 석탄연구소(1914년), 뇌연구소(1915년), 물리학연구소(1917년) 등이 들어섰다. 협회 본부가 이 연구소들을 산하에 두고 사업과 정책을 총괄하는 구조로 운영되었다.

     

초대 회장은 하르낙이 맡았다. 그의 본업은 신학자였으나 과학행정가로서 수완도 뛰어났다. 그래서 협회를 설계하며 독일 사회를 뜨겁게 달군 지적 흐름 – 신인문주의 이념, 산업화의 기술 수요, 독일 제국의 부국강병 요구 등 - 을 적절히 결합했다. 그리고 연구자금 조달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하르낙의 통찰이 가장 빛난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지만, 운영에는 간섭받지 않는다”라는 원칙이었다. 즉 협회의 운영만큼은 우수한 과학자를 뽑아서 전권을 맡기겠다는 것이 하르낙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우수성과 자율성의 철학은 막스플랑크협회로 바뀐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유명한 ‘하르낙 원칙’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20세기 초반에는 파격적이기까지 한 시도였다. 국가가 만든 조직이라면 당연히 국가의 뜻에 따라 운영되어야 했다. 그러나 하르낙은 과학이 발전하려면 지원과 운영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빌헬름 2세를 위시한 정부 인사들도 이러한 방침을 받아들였다. 신인문주의의 영향으로 자유로운 연구에 대한 이상주의적 학풍이 강한 독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17년 물리학연구소장으로 추천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대표적 예다. 당시 독일 재무장관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연구가 산업과 국방의 측면에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르낙 원칙에 따라 정부는 아인슈타인의 소장 임명을 그대로 승인했다. 이로써 카이저빌헬름협회는 재정적 안정성과 학문적 자율성이라는, 연구소 운영의 강력한 두 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카이저빌헬름협회 설립 당시의 모습(위쪽)과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연구소 건물들(아래쪽)


카이저빌헬름협회의 독특한 운영은 짧은 시간에 성과를 냈다. 국가의 전폭적 지원과 학문의 자율성을 앞세워 독일 전역에서 인재를 끌어모았다. 특히 대학에서 하기 어려웠던, 방사화학 같은 거대과학 연구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실제로 카이저빌헬름화학연구소는 방사화학 실험을 통해 후일 원자력의 기초가 되는 핵분열 현상을 발견한다. 1915년에는 리하르트 빌슈테터가 식물의 엽록소와 안토시아니딘에 대한 연구로 최초의 노벨상(화학상)을 받았다. 협회 설립 후 불과 4년 만의 쾌거였다. 다만 이는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향후 112년간 이 협회에서만 30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더 나올 것을, 그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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