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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Dec 10. 2024

전쟁에 동원되는 과학

1915년 독일 카이저빌헬름협회

과학에도 돈이 필요하다. 물론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밝히려는 과학의 목표는 숭고하다. 그러나 그 또한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사에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꽤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은 재정 지원을 받고자 여러 노력을 해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대표적일 것이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의 별’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찬양하는 글을 지어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다. 덕분에 그는 메디치 가문에 들어가 좋은 조건에서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갈릴레이 정도 되는 과학자라서 얻을 수 있었던 혜택이다.

     

이런 재정적 부담이 근대 이후에는 한결 덜해졌다. 국가가 과학의 강력한 스폰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 국가가 과학에 투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과학이 부국강병과 국격 상승의 효과적 수단이라는 점을 깨달아서였다. 특히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누구보다 과학을 잘 써먹었던 군주다. 그의 시대에 과학, 국가, 산업은 긴밀히 연결되었고, 과학연구는 정치‧경제적 배경을 갖게 되었다. 일례로 1895년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자 빌헬름 2세가 직접 치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과학자가 아닌 황제도 X선이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고 산업에 도움이 될 발견임을 알아본 것이다. 1911년에는 국가 기초연구소인 카이저빌헬름협회도 만들었다. 황제의 이름을 내건 이 연구소는 매력적인 조건(강의 부담 면제, 풍부한 지원금)을 앞세워 뛰어난 과학자들을 끌어들였다. 제국주의 경쟁을 하려면 과학 역시 중요한 국가적 자원이라고 인식한 결과다.

     

다만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저빌헬름협회 설립에는 황제 못지않게 기업가들의 역할도 컸다. 그들에게도 이 연구소가 산업화의 난제를 해결해 주고, 국제무대에서 독일의 위상을 높이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탓이다. 그중 한 명이 유대인 출신 은행가 레오폴드 코펠이다. 코펠은 그와 같은 유대인 출신의 천재 두 명을 후원했다. 첫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다. 1913년 아인슈타인이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자, 코펠은 그가 자유롭게 연구하도록 급여를 지원했다. 코펠의 후원은 13년이나 계속되었고, 훗날 아인슈타인이 카이저빌헬름물리학연구소의 소장이 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둘째는 이제부터 살펴볼 프리츠 하버다. 카이저빌헬름협회 설립 직후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를 만들고자 했으나 예산이 부족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코펠이다. 코펠은 100만 마르크를 연구소 설립 자금으로 쾌척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소장으로 카를스루에공과대학 교수였던 프리츠 하버를 임명하라는 것.



     

식량 부족이라는 난제

     

코펠은 왜 그렇게 하버를 고집했을까? 그만큼 그의 업적이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버는 과학사의 GOAT를 다투는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인류에게 가져다준 실질적 이득으로 따지면 이들보다도 앞선다. 인공 질소비료의 대량생산법을 발견해 인류의 식량 걱정을 완전히 없애주었기 때문이다. 즉 하버는 오늘날 인류 문명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데 가장 공헌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들어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나 과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여전히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식량 부족이다. 20세기 초 영국 과학진흥협회장 윌리엄 크룩스는 과학자들 앞에서 중대한 강연을 한다. 바로 식량 증산의 과학적 해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에서조차 식량은 걱정거리였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경제학의 기원 중 하나인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된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맬서스가 보기에 이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법칙이었다. 그래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질병, 기근, 전쟁 등으로 인한 인구 조정이 필요하며, 특히 저소득층이 도태되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지금 보면 황당하지만, 19세기 영국 정부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빈민 지원을 대폭 축소하기도 했었다.

초창기 경제학의 기초 원리가 된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식량 공급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을 수 없어 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요약된다.

     

이렇게 식량 문제가 심각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질소에 있었다. 질소는 대기를 이루는 가장 흔한 성분(약 79%)이면서 식량을 구성하는 다섯 원소 중 하나이다. 그만큼 농작물의 생장에 질소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질소는 생태계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 즉 공기 중에서 식물과 동물로 흡수되었다가, 다시 음식물 섭취의 형태로 인간의 일부가 된다. 인체로 흡수된 질소는 단백질을 만들거나 배설물로 배출된다. 이런 배설물이 식물의 질소자원으로 활용되거나 특정 생물체에 의해 다시 질소 가스로 바뀌며 공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

     

문제는 공기 중의 질소가 단단히 묶여 있다는 점이다. 즉 질소의 분자 구조는 두 개의 원자가 삼중결합에 갇힌 형태를 보인다. 이 때문에 작물들도 질소 원자를 직접 흡수할 수 없다. 화학적 변환을 거친 질소 화합물(암모니아, 질산염, 이산화질소 등) 형태로만 흡수가 가능하다. 이러한 화학적 변환 과정을 질소 고정이라 한다. 자연에서 질소 고정은 번개가 치거나 뿌리혹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물론 이런 미미한 작용만으로 작물에 충분히 질소 공급이 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인류는 동물의 배설물을 비료로 만들어 토양에 공급하거나, 휴경으로 지력을 회복하는 방법 등을 써왔다. 하지만 어떤 시도도 인류가 배불리 먹을 만큼의 작물을 거두게 하지는 못했다. 일부 국가들은 칠레의 특산품인 초석(질산나트륨)을 수입했으나, 그 역시 매장량에 한계가 있었다. 공기 중의 질소를 떼어내고자 충격을 가하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했고, 당시에는 이걸 구현할 방법이 없었다. 크룩스의 강연은 바로 이를 지적한 것이었다.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질소 순환의 과정


하버는 이 질소 고정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그 해법은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게 말로는 쉬워 보인다. 질소는 대기 중에 널렸고, 수소 기체도 만들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실험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질소의 원자 간 결합을 깨뜨리려면 고온을 가해야 하는데, 그 상태에서 화학평형 조건을 맞추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암모니아를 얻어낼 수는 있었으나 대량으로 생산하기에는 경제성이 떨어졌다. 하버 역시 몇 년 동안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고압과 촉매의 중요성에 새롭게 주목함으로써 돌파구가 열렸다. 하버는 고압에서도 견딜 수 있는 기구를 제작하는 한편, 낮은 온도에서도 반응을 활성화할 수 있는 촉매를 찾고자 했다. 그 결과 오스뮴이 적합하다는 사실발견했다.

      

고압과 촉매라는 두 조건이 갖춰지자 비로소 암모니아의 생산성이 높아졌다. 하버는 이를 본격적으로 상업화하기 위해 대형 화학 기업인 바스프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이때 하버의 파트너가 된 이가 카를 보슈다. 보슈는 하버보다 먼저 질소 고정 연구를 시작했으나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촉매로 연구의 돌파구를 연 하버를 만난 것이다. 다만 보슈는 하버가 촉매로 사용한 오스뮴은 구하기가 어려워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무려 2만 번의 실험 끝에 산화알루미늄이 일부 함유된 산화철을 새로운 촉매로 찾아냈다. 이로써 암모니아 합성의 경제성은 크게 올라가게 되었다.

     

1913년 마침내 하루 20톤이 넘는 암모니아가 생산될 수 있었다. 인류사에서 처음 인공 질소비료가 대량으로 공급되는 순간이었다. 이 새로운 공정에는 하버-보슈법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인류 문명의 일대 도약을 상징하는 장면이 되었다. 인공 질소비료는 즉각적이며 광범위한 효과를 냈다. 미국의 옥수수 생산량은 즉시 6배가 늘었다. 그리고 단 3년 만에 식량 생산량은 인구 증가량의 2배를 기록했다. 1900년대 16억 명이던 세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2000년대에는 80억 명을 돌파했다. 인류를 괴롭혀온 맬서스의 법칙은 그렇게 과학의 힘으로 허물어졌다. 하버는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하버-보슈법(위쪽)으로 프리츠 하버(아래 오른쪽)와 카를 보슈(아래 왼쪽)는 1918년과 1931년에 각각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독가스의 아버지

     

하버는 이러한 영광을 배경으로 카이저빌헬름협회의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장에 임명되었다. 그 무렵 독일 대학에서 뛰어난 과학자를 교수로 초빙하려는 스카우트 경쟁은 일반적이었다. 카이저빌헬름협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명색이 황제가 만든 국가 연구소이니 최고의 과학자를 데려와야 했다. 코펠이 하버의 영입을 기부 조건으로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하버는 질소 고정법이라는 업적만으로 역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인류사에 영원히 기억될 그의 과학적 재능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새 국면이 펼쳐지면서 그것은 독가스라는 전혀 다른 형태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것은 제국주의 급행열차에 올라탄 유럽의 필연적 종착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군비경쟁과 식민지 쟁탈전으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빌헬름 2세의 독일 우선주의 세계정책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귀결되었다. 이미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 프랑스 등 전통의 열강이 그 상대가 되었다. 애국주의에 불타는 수많은 독일 국민이 이 전쟁에 지지를 보냈다.

      

카이저빌헬름협회의 과학자들도 애국주의 열풍에 동참했다. 애초에 이 연구소가 부국강병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개전 두 달 만에 독일군이 중립국 벨기에를 점령하자 독일은 큰 비난을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점령 과정에서 예술작품을 파괴하고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독일 지식인들은 의혹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른바 ‘지식인 93인 성명’이다. 여기에는 첫 번째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빌헬름 뢴트겐을 필두로, 아돌프 하르낙, 프리츠 하버, 리하르트 빌슈테터, 막스 플랑크 등 카이저빌헬름협회의 석학들도 이름을 올렸다. 두 번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였던 네덜란드의 헨드릭 로런츠는 독일 과학자들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를 비판했다. 그는 동료인 플랑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일갈했다. “부끄러운 줄 알라. 교수들이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앞장서다니!”

     

1915년 들어 전쟁은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참호전 양상을 보이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 <1917>에서 당시의 참호전이 생생히 묘사된다. 참호는 허리 높이 정도만 파도 충분한 엄폐가 가능하며, 적군의 기동에는 큰 방해물이 된다. 별다른 건설 자재도 필요 없다. 철조망과 기관총만 갖추면 적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다. 이렇게 참전국들이 죄다 참호를 판 결과,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참호선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화 <1917>에 묘사된 참호전 모습(왼쪽)과 당시의 참호선을 촬영한 항공 사진(오른쪽).

     

하버는 독가스를 써야 교착 상태를 풀고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넘치는 애국심을 앞세워 군부를 설득했다. 순수한 전략의 관점에서 하버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고, 결국 독일군 사령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버는 독가스의 주재료로 염소를 제안했다. 염소는 공기보다 무거워서 참호 안으로 쉽게 스며들었고, 무기를 부식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하버의 원래 계획은 염소가스를 포탄 형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군부가 탄약을 아껴야 한다며 반대했고, 하버는 수많은 실린더에서 구름 형태로 가스를 방출하는 방식으로 폭탄을 제작했다.

     

개전 후 하버의 카이저빌헬름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는 이미 육군의 하부 조직으로 전환되어 있었다. 그리고 1,500여 명의 연구소 인력이 밤낮으로 독가스와 방독면을 만들어냈다. 방독면에 들어갈 필터의 제작은 또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인 리하르트 빌슈테터가 맡았다. 이렇게 노벨상급 천재들을 갈아 넣은 덕분에 1916년 1월 독일군에 완벽한 성능의 방독면과 필터가 보급될 수 있었다. 육군의 기술 자문이었던 하버는 화학전 부대의 참모로 임명되었다. 하사관에서 시작해 몇 년 만에 대위로 진급한 결과다. 그만큼 하버는 조국의 영광을 위한 이 전쟁에 진심이었다.

     

독일군은 1915년 벨기에의 이프르 전투에서 최초의 염소가스 공격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독일군은 넓은 영토와 함께 대포 60문을 탈취했다. 연합군은 약 6,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심리적 공포로 인해 크게 사기가 저하되었다. 빌헬름 2세는 이 전과에 기뻐하며 하버를 치하했다. 당시 대량살상무기 개념이 일반적이지는 않았으나, 제한 규정은 분명히 있었다. 1899년과 1907년의 헤이그 회담은 모든 종류의 화학‧생물학 무기 사용을 금지했다. 따라서 독일군의 가스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하버는 “화학무기야말로 전쟁을 단축하고 대포와 기관총으로 수백만 명이 학살되는 것을 막으므로, 오히려 인도주의적”이라는 논리를 폈다. 결국 독일군에게 ‘선빵’을 얻어맞은 연합군도 독가스를 개발했다. 이렇게 되자 독가스는 어느 쪽에게도 이점을 주지 못했다. 양쪽의 희생자는 크게 늘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화학무기로 사망한 군인은 약 9만 명이며, 부상자는 130만 명이 넘는다.



     

패전의 혹독한 대가

     

1918년, 하버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애국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전쟁에 패배했다. 패전은 독일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빌헬름 2세가 퇴위했고, 독일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헌법을 채택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자 카이저빌헬름협회의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제 독일에는 더 이상 ‘카이저 빌헬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을 주도한 좌파들이 명칭 변경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하르낙과 플랑크 등 협회의 원로들은 끝까지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화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군주제와 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그해에는 하버가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맬서스 법칙을 깨고 인류를 기아에서 구해낸 그의 공로는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가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인 동시에, “독가스의 아버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합국은 하버를 국제법을 위반한 전범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노벨화학상 수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하버-보슈법은 인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성과였고, 하버만 전범으로 매도하기에는 연합국도 독가스를 쓴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918년은 하버에게 조국의 패배와 자신의 영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만든, 복잡한 심경의 한해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은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연합국이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렸고, 주요 생산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어 산업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금 하버의 애국심이 발동한다. 그는 카이저빌헬름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를 재정비해서 바닷물에 용해된 금을 전기화학적으로 추출하는 연구를 계획했다. 그렇게 얻은 금 자원으로 전쟁 배상금을 갚겠다는 것이다. 맬서스 법칙을 과학으로 극복한 하버다운 발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IMF 구제금융 시절 우리나라의 ‘금 모으기 운동’도 연상케 한다.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하버의 금 모으기 프로젝트는 이론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투입한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금의 양이 너무 적어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의 진정한 시작은 1914년”이라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만큼 20세기의 시대적 특징 -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쟁 - 을 규정하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다. 이는 과학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이용되는 시발점이 된다.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국가가 과학을 체제로 흡수한 필연적 결과였다. 이러한 국가에 의한 과학의 제도화는 수십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욱 큰 규모로 재현된다. 그 결과는 독가스보다도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원자폭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가스전은 과학이 전쟁에 이용되는 시발점과도 같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 큰 규모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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