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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12. 2021

현실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E. E. 샤츠슈나이더(2008), 「절반의 인민주권」

고전의 가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에 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읽어도 현재적 함의를 얻을 수 있다. 이 힘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데서 나온다. 예컨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칼 마르크스의 「자본」을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입해서 읽을 수 있는 것도 고전이 가진 통찰력 덕분이다.


E. E.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원제 : The Semisovereign People: A Realist's View of Democracy in America)」도 정치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이념이 아닌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다룬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전문성과 대표성에 기초한 정당의 역할이다. 좀 더 학술적으로 표현하자면, 민주주의를 ‘국가(정부 등 국가기구) - 정치사회(정당 등 대의정치체계) - 시민사회(시민 개인들의 자율적 생활세계)’로 체계화하고, 이중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정당에 핵심적 가치를 두는 것이다.


이는 저자 특유의 ‘정당 중심 민주주의’ 이론과 관련이 깊다. 샤츠슈나이더는 1942년 초기작 「정당정부(원제 : Party Government)」의 첫 페이지에서 “민주주의를 만든 것은 정당이며,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단언했다. 「절반의 인민주권」은 바로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1960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논점들을 담고 있다.


이익집단 정치의 대안은 정당 정치이다. 정당정부야말로 민주주의의 훌륭한 원리이다. 왜냐하면 정당은 다수의 동원에 적합한 특수한 형태의 정치조직이기 때문이다. 정당은 정책 강령을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시민에게 제시해야 하며, 선거를 통해 위임받으면 이를 실행해야 한다. 대규모 국민국가에서 실현되는 현대의 대중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예’ 혹은 ‘아니오’라는 두 단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주권자이다. 게다가 이 주권자는 누군가 말을 걸 때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유권자가 찬성하거나 반대한다고 답할 수 있는 안건을 제시하는 것은 정당의 몫이다.

- 데이비드 아더매니의 1975년판 서문
E. E. 샤츠슈나이더는 「절반의 인민주권」과 「정당정부」두 권의 저서만으로 대가의 반열에 들만한 석학이다.




다원주의 비판, 정당에 대한 강조


샤츠슈나이더의 이론사적 맥락을 파악하려면 우선 그의 다원주의(Pluralism) 비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샤츠슈나이더는 20세기 중반 미국 정치학을 풍미하던 다원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독자적인 이론체계를 구축했다. 다원주의의 요체는 정치의 주요 행위자를 이익집단으로 본다는 데 있다. 즉 각계의 이익집단들이 형성하는 사회적 힘이 정책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하여 민주주의가 운영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압력의 정치’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대표하는 학자가 미국 정치학의 거성 로버트 달이다(다만 달은 이후 자신의 초기 다원주의 이론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


그러나 샤츠슈나이더는 다원주의 모델이 반민주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익집단 중심의 의사결정은 사회 상층의 권력집단들에 유리할 수밖에 없고, 그 방식 또한 공공적 형태가 아닌 사적 영역으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다원주의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권력관계를 고착화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익집단 이론의 심각한 문제점은 그것이 이익집단 체제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을 숨긴다는 데 있다. 다원주의가 지향하는 천국의 문제는 천상의 합창에서 상층계급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린다는 것이다. 대략 인민의 90% 정도는 이익집단 체제에 들어갈 수 없다.

- 2장 이익집단 체제의 범위와 편향성


대신 샤츠슈나이더가 제시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는 갈등과 정당이다. 이 키워드들과 민주주의의 연관성이 생소해 보일 수도 있다. 일단 ‘갈등’이라고 하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비정상적이며 극복되어야 할 병폐로 인식된다. 세대 갈등, 남녀 갈등, 지역 갈등 등의 용례에서 그 부정적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정당’ 역시 대중에게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국책기관들이 발표하는 국민 신뢰도 조사에서 정당은 불신 비율이 훨씬 높게 나타나는 집단 중 하나다. 그래서 정당득표율에 비례해서 국회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나, 지방선거에서의 정당공천제에 대해 반대하는 주장들도 제기된다.




갈등과 정당,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동력


그러나 샤츠슈나이더의 입론에서 갈등과 정당이 갖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우선 그가 보기에 갈등은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현대사회에서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에 역동성을 불어넣는다. 시민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갈등의 구조를 인식하고, 그것이 공동체에 더 중요하다는 문제제기를 통해 유리한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만약 이렇게 갈등의 경쟁이 전국 단위로 제도화되면, 누구나 자신의 갈등을 정책과 제도로 만들어내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샤츠슈나이더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목적은 갈등을 줄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갈등을 공론화하는 토대에서 더 나은 의사결정이 가능하며, 약자들도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갈등은 부정적으로 인식되나, 민주주의 정치의 역동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갈등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활성화하지는 않는다. 갈등이 개인들에게만 머물러 정치적 의사결정의 장으로 표출되지 못하면, 이는 사회에 대한 불만만 키우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별의 갈등들이 사회적으로 동원되어 정치의 중심 의제로 부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샤츠슈나이더는 이를 ‘갈등의 사회화’라고 개념화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사회화에 가장 적합한 주체가 정당이다. 정당(Party)은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 사회 부문별 이슈들(예시 : 자본, 노동, 성, 환경, 종교 등)을 대변한다. 즉 정당은 각 부문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을 조직화‧사회화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지를 모아 기존 갈등을 대체하여 정치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현대사회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한 모든 논의는 본질적으로 갈등의 규모를 다루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사회에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구성된 정부는 갈등을 사회화하는 하나의 가장 거대한 도구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민주주의에 관한 논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정부는 갈등의 규모를 확대하는 거대한 엔진이다.

- 1장 갈등의 전염성


샤츠슈나이더가 ‘1932년 혁명’으로 부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연합이 대표적 예다. 이전까지 미국은 남부 지주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과 북부 산업자본가를 대변하는 공화당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2년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이러한 지역 갈등이 계급 갈등으로 재편됐다. 즉 노동자·소수민족·지식인 등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과 대기업·보수층 등을 대변하는 공화당으로 양상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치환은 이후 30여 년 간 민주당 집권을 뒷받침함으로써 정치지형을 재편했다는 것이 샤츠슈나이더의 설명이다.

민주당(당나귀)과 공화당(코끼리)은 미국 정당정치를 양분하는 주체들이다. 다만 이들이 지금의 이념지형을 형성한 것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뉴딜 연합의 등장 이후부터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정당을 선택하는 인민의 주권


샤츠슈나이더가 갈등과 정당을 강조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환경으로서의 근대국민국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주주의는 어원인 그리스어 ‘인민의 지배(demokratia)’에서 보듯 고대 아테네에 그 원형이 있다. 소규모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모든 주권자들이 직접 의사결정을 하는 민주주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와 국토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복잡한 자본주의 경제를 운영하는 근대국민국가에서 아테네식 직접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현대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민은 스스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를 대변할 정당을 선택함으로써 지배한다.


책 제목인 ‘절반의 인민주권’은 바로 이 맥락에서 명확히 이해된다. 민주주의의 오랜 이상은 인민의 자기 지배에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근대국민국가라는 현실적 조건에서 인민주권의 구현은 100% 이상적이기 어렵다. 현대민주주의에서 인민주권의 최대치는 자신들의 갈등을 대변해줄 정당을 선택하여, 대의적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절반의(자신의 주권을 대신해서 행사할 정당을 선택하는)’ 인민주권이다. 나머지 절반의 주권은 인민의 지지에 기초해 국가를 운영하는 정당에 귀속된다.




보통 사람들이 운영하는 민주주의


나머지 절반의 주권을 책임지는 정당이 있어서 민주주의는 보통 사람들에 의한 정치체제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인민들은 대부분 자기 생업을 가진, 평범한 생활인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정치 의제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그것을 정책과 제도로 설계할 지식과 경험도 갖고 있지 못하다. 게다가 한 국가를 구성하는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한 명의 통치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서 출발한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없다는 극히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일어나야 할 일들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과, 놀라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현재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무지한 것 같다는 사실을 양립시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8장 절반의 인민주권


이 책이 강조하는 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 권력의 한계를 감안하면서도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정치체제를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중 권력의 중요한 한계는 수천만 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다 똑같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국가는 그보다 훨씬 제한된 시간 내에 적은 수의 의사결정을 통해서도 운영될 수 있다. 인민의 권력은 결정의 횟수가 아니라 결정의 중요성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회에 산재한 갈등을 조직화하고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는 정당이 필수적이다. 달리 말하면, 유능하고 뛰어난 정당이 있어야 좋은 민주주의도 가능한 것이다.


샤츠슈나이더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사람들과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협력의 한 형식이다.” 즉 평범한 인민들과 전문가인 정당이 협력하여 절반씩 주권을 행사함으로써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인민은 선거를 통해 정당에 대표성을 부여하고, 정당은 그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말이다.

독일 정치에는 다양한 이념을 반영하는 정당들이 골고루 존재한다. 보수주의, 사회민주주의, 국수주의, 사회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신좌파 등 거의 현대 사상의 백화점 수준이다.




한국 민주주의에 주는 의미


이 책은 고전으로서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에 주는 의미도 크다. 오랜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은 유독 민주주의를 이상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독재에 맞섰던 지식인과 정치가들도 민주주의를 저항과 이상의 언어로 주조해왔다. 이는 초기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에서부터, 1980년대의 광주항쟁과 6월항쟁, 그리고 최근의 촛불혁명에 대한 범국민적 서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하여 민중 권력을 쟁취하거나 정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민주주의는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이뤄야 할 역사의 최종 목표’로서 다분히 이념적인 상징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듯 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체제다. 즉 이상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를 논할 때 그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가를 설명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보다는 현실의 조건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잘 돌아가도록 제도와 환경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서는 이에 대한 철학과 지식을 갖춘 지도자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즉 ‘민주화 투사’는 많았지만 ‘민주주의 제도의 설계자’는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상향이 아니라 현실의 체제이다. 대규모 운동은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현실의 제도로서는 지속되기 어렵다.


특히 샤츠슈나이더가 강조하는 갈등과 정당에 있어서 한국 민주주의는 선진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의 주요 갈등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최근 그것이 ‘세대’로 대체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대자본주의에서 가장 많은 인민들이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자본과 노동 관계는 핵심적인 갈등으로서 여전히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정당정치의 토대 역시 매우 빈약하다. 일례로 한국에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처럼 수십 년에서 백 년을 넘어서는 당명을 가진 정당이 없다. 뭔가 위기가 있을 때마다 당의 이름부터 바꾸는 반정당정치적인 문화 뿌리가 깊은 탓이다. 덕분에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이후 같은 당명으로 대통령을 연속 배출한 정당이 하나도 없게 됐다(내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 처음으로 기록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국회의원 7선까지 한 거물 정치인 이해찬이 당선될 때마다 당명이 달라져서 그 이름 순서를 자기도 기억 못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1960년 미국에서 출판된 이 책을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있다. 이 책이 거듭 강조하는 갈등과 정당이 민주주의에서 가지는 의의는 예나 지금이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주주의를 이상적으로만 받아들여 왔을 뿐, 갈등의 사회화가 일어날 수 있는 정당정치의 현실적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한국정치에 이 책이 주는 의미는 크다.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때 인민들의 권력은 커질 수 있다. 고전으로서 이 책의 의의는, 그렇게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를 제시했다는 데 있다.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학자연하는 이들이 인민의 자격을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안된 정치체제이다

- 8장 절반의 인민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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