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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Oct 20. 2021

안개로 자욱한 허무와 상실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2017), 「노르웨이의 숲」

평소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다. 감수성과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비유·은유·상징 등 소설의 주요 기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독서 중에 온갖 메타포로 수놓은 현란한 문장을 만나면 짜증부터 난다. 게다가 많은 소설에서 쓰이는 ‘이후의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에...’는 식의 열린 결말에도 거부감이 있다. 나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선명한 메시지로 전달하는 책이 좋다. 그러다 보니 이제껏 읽은 소설이 얼마 되지 않는다. 대학 때 읽었던 조정래와 황석영의 역사소설이나, 취미 삼아 읽는 일본 추리소설을 빼면 거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그런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소설 중 하나다. 사실 이 소설도 나의 독서 성향과는 잘 안 맞는다. 나는 독서에서 저자가 전하려는 주제의식의 파악을 가장 중시한다. 그리고 저자가 동원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주제의식과 타당한 관계를 맺는지 살핀다. 아무리 주제의식이 참신하고 뛰어나도, 그것을 떠받치는 서사적 구조가 치밀하지 못하면 주제도 힘을 못 받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잘 이루어져 전체적인 주제의식에 공감하며 책을 덮으면, ‘좋은 독서였다’며 흐뭇해한다. 한 마디로 메시지 중심의 독서라고 할 수 있다.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 중심의 독서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은 그런 주제의식이 선명하지 않다. 또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형성하는 관계도 불확실해서 서로 아귀가 잘 안 맞는다. 그 결과 메시지는 조직되지 않고, 흩어져 둥둥 떠다닌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며 읽다가 덮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 깊게 투영된 허무와 냉소의 정서가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 독특한 정서를 드러내는 세련된 문체 시선 각인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말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 몸속에서 느꼈다. 문진 안에도, 당구대 위에 놓인 빨갛고 하얀 공 네 개 안에도 죽음은 존재했다. 우리는 그것을 마치 아주 작은 먼지 입자처럼 폐 속으로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편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 있는 게 아니다. - 55쪽

    

다 읽고 난 후에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궁금해졌다. 그의 작품과 사상 역정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고, 몇 권의 책을 더 찾아 읽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허세의 아이콘(책 안 읽는 애들이 SNS 인증용으로나 소비하는)인 줄 알았던 이 작가의 지향이 나의 사고방식과도 꽤 비슷하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내 서가의 일부를 차지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작들. 「노르웨이의 숲」에서 시작해 벌써 이만큼 모았다.


이 책은 메시지보다는 이미지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읽다 보면 자욱한 안갯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무엇 하나 뚜렷한 것이 없고, 눈앞의 저 풍경이 정확히 어떤 모양새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펼쳐진다. 일례로 등장인물들의 관계부터 그렇다. 주인공 와타나베와 연관된 세 명의 여성 –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 들이 등장하지만, 그녀들과 와타나베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와타나베와 이 여성들 사이에는 연애감정이 흐르기도 하고, 실제로 섹스도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연인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핵심 서사를 이끌어가는 와타나베의 생각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자살한 친구의 여자친구였던 나오코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가사와라는 부잣집 날라리 선배와 함께 원나잇을 즐기며, 후배 미도리와 데이트를 하기도 한다. 아는 게 많아서 당시 대학을 주도한 운동권들의 주장도 제대로 이해하나, 그것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책, 음악, 술,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은 명확하다. 다만 총체적 삶에 대한 지향은 불분명하다.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부유하며 살아간다.

     



1960년대 일본, 고도성장과 반체제 운동     


이러한 불분명함은 당시의 사회상과 공명하며 허무와 상실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 말의 일본은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혼돈이 교차하던 시기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농업국가로 전락할 운명이었으나, 한국전쟁과 냉전을 계기로 고도의 기술산업국가로 탈바꿈한다. 덕분에 1950~60년대 내내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고,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 이렇듯 미국과 반공 안보전선을 구축하여 고도성장을 이끈 주역이 지금도 일본정치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보수 자민당 정권이다.

     

그런데 1960년대 각 대학을 중심으로 이러한 주류 질서를 전복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것이 대학생들의 공동투쟁단체였던 전학공투회의(전공투)였다. 전공투는 미국과의 안보 카르텔에 종속된 자민당 정부를 비판하고, 주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기계적 인재들의 양성소로 전락한 대학의 해체를 주장했다. 이념의 급진성에서 전공투는 일본 현대사에서 전무후무한 단체였다. 그들의 투쟁은 광장에 모여 몇 시간 집회를 하고 마는 정도가 아니었다. 한번 동을 뜨면 시가전에다 대학 캠퍼스 점거는 아무렇지 않게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묘사되듯 투쟁이 소멸하자 누구보다 빠르게 제도권으로 편입해 들어가기도 했다.

     

동맹 휴교가 해제되고 기동대가 점령한 가운데 강의가 시작되자 맨 먼저 출석한 인간들도 동맹 휴교를 주도한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교실에 나와 필기를 하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했다.
…(중략)… 나는 녀석들에게 다가가서 왜 동맹 휴교를 계속하지 않고 강의를 듣느냐고 물어보았다. 다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답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출석 일수 부족으로 학점을 못 따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그런 작자들이 대학 해체를 부르짖었다고 생각하니 진짜 어이가 없었다. - 102~103쪽


1969년 전공투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지금의 일본을 보면 잘 상상이 안 되지만, 그들에게도 과격한 반체제 혁명운동이 존재했었다.





좌우 거대담론을 냉소하는 개인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두 가지 흐름과 모두 거리를 둔다. 대학생으로서 자본주의 고도성장의 혜택을 누리지만, 출세를 향한 야심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반체제 학생운동을 목도하나, 혁명 이념에 경도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좌든 우든 개인을 짓누르는 거대담론 자체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그 시대의 화두에서 벗어나 골몰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들이다. 즉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아픔을 겪으며 번민한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 13쪽

     

이렇게 철저히 개인화된 고독과 상실의 정서가,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었던 일본 사회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1960년대든 1990년대든 2010년대든 사회가 나아가야 할 목표, 시대정신은 늘 존재해왔다. 그리고 소위 사회지도층은 개인들이 시대정신 실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여기에는 좌우 구분도 없다. 일본이나 우리나라처럼 집단주의가 강한 나라에서는 더 그렇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보다는 개인이 자기 세계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즉 산업화나 민주화의 과제보다, 내 삶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더 절박한 문제가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시대의 이름으로 강요된 억압을 걷어내고, 그 안에서 사랑하고 상처 받는 개인들의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이 소설은 호불호가 갈린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고독과 상실의 정서만 해도 그렇다. “아니 사람이 다 고독하고 외롭지, 그 당연한 걸 표현했다고 대단한 소설이야?”라고 반문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예전에 박찬욱 감독이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과대평가된 영화 10선으로 꼽으며 비슷한 코멘트를 한 적이 있다. “고독한 게 뭐 자랑인가? 고독하다고 막 우기고 알아달라고 떼쓰는 태도가 거북하다.” 이 소설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와 왕가위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자주 묶이는 관계다. 젊은이들의 민감한 감성을 저격하는 스타일리스트, 또는 뭔가 있어 보이지만 딱 그뿐인 허세의 아이콘으로 말이다.


문학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면, 영화에는 왕가위가 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은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있어 보이려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루키 월드에서 「노르웨이의 숲」의 예외성    


하루키 작품 세계에서 이 소설은 여러모로 예외적이다. 가장 최근 번역본을 낸 민음사는 이 책을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고 광고한다. 나름 맞는 이야기다. 이 책은 하루키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렸으며, 그를 유명 작가로 띄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으로 ‘하루키 월드’에 입문한다. 그런데 대중적으로는 하루키의 대표작인 이 책이, 작법이나 스타일 측면에서는 오히려 비주류에 해당한다.

 

가장 최근에 나온 국내 번역본인 민음사 판 「노르웨이의 숲」. 감각적인 디자인과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는 광고 카피가 눈에 띈다.


본래 하루키는 (인터뷰에서도 여러 번 밝혔듯) 초현실주의나 오컬트에 기초한 스토리텔링을 선호한다. 이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일관되게 드러난다. 초기작들은 물론, 최근작인 「1Q84」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초현실주의적 작법은 전체 서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소설들에서는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컨대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뜨고, 초자연적 존재가 끝판왕으로 등장하며, 주인공들이 갑자기 패러렐 월드로 이동하는 식이다. 이는 그의 작품을 난해하게 느끼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개인적으로도 별로라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인간과 세상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내려면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판타지 요소가 전혀 없는, 100% 리얼리즘 소설이다. 이는 집필 당시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등단한 이후 꽤 인기를 얻었지만, 「노르웨이의 숲」 이전까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였다. 이는 그의 초창기 전위적인 작품 스타일과 연관이 깊다. 세 번째 장편인 「양을 쫓는 모험」부터 이전까지 경영하던 재즈바를 정리한 하루키는 전업 작가로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즉 시장성에 한계가 있는 컬트 작가에서 탈피하여, 문단의 주류로 진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정하고 쓴 작품이 「노르웨이의 숲」이다. 베스트셀러를 내야만 본인이 원하는 작품 활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비유컨대 신해철이 대학가요제를 겨냥해 ‘그대에게’를 만들고, 성공 후에 본인 음악의 본류인 헤비메탈로 돌아간 것과 비슷하다(그리고 많은 헤비메탈 명곡에도 불구하고, '그대에게'가 여전히 대표곡이라는 점도 하루키와 비슷하다).


하루키의 1986~1989년 유럽 체류 여행기인 「먼 북소리」에 이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숲」은 그가 일본을 떠나 그리스, 로마 등을 여행하며 쓴 소설이다. 「먼 북소리」에 따르면 「노르웨이의 숲」은 (위의 이유로) 써야만 했던 소설이었다. 하루키는 일본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함으로써 집필에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이 소설은 작가 본인이 살아온 시공간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것임을 예견했던 모양이다.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 직원에게 넘기며,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대작가는 대중에게 먹힐 베스트셀러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실제로 그렇게 써낼 수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계산대로 「노르웨이의 숲」이 대히트한 이후 본래의 작품 기조로 돌아갔고, 14권에 이르는 그의 장편소설 중에 이와 같은 리얼리즘 노선에 있는 작품은 드물다. 1992년작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과 2013년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만이 이에 해당한다. 그의 리얼리즘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독자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즈의 곡 'Norwegian Wood'에서 차용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단어의 불분명한 의미가 마음에 들어 책 제목으로 원용했다고 한다.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관조하는 수단으로서의 독서  

   

이 소설은 원래 호기심 반 유명세 반으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은 소설이 되었다.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 중심의 독서는 발상의 전환과 같았고, 리듬을 타면서 이어지는 쿨한 문장은 글쓰기의 새로운 모델로 삼고 싶어졌다. 또한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 개인주의는, 소설이든 사회과학 서적이든 거대담론을 다루는 책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 452쪽

    

하지만 이 소설 특유의 허무함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게 허무함은 인생을 지배하는 감정 중 하나다. 이 감정은 예상치 못한 인생의 순간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주관적 의지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이기도 하다. 물론 나는 소설 속 와타나베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직접 겪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무엇인가에 몰입했다가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경험을 한 적은 있다. 그때 찾아오는 허무함의 감정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 어쩌면 이는 인생에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영원불멸의 숙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소설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529~530쪽

     

책이 꼭 거창한 삶의 교훈을 줘야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한 감정들을 새롭게 꺼내고 정돈해, 다른 관점에서 관조하게 하는 것도 충분한 독서의 이유가 된다. 「노르웨이의 숲」은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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