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정석원, 유재학
2014년 말 방영된 <무한도전>의 토토가 특집은 전국에 집단 타임슬립을 가져왔다. 1990년대를 수놓았던 힙합 패션과 댄스 비트들이 황금 시간대에 부활하자, 그 시절을 통과해 온 아재들은 그야말로 열광했다. 최고 시청률 35%를 찍으며 SNS에는 “내 청춘 돌려내”라는 감성평이 도배됐다. 이건 예능 프로그램의 흔한 추억팔이가 아니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아이돌 음악에 절어있던 대중에게, “우리에게 원래 이런 풍요로운 음악적 유산이 있었어"라는 통찰을 일깨우는 사회 현상에 가까웠다.
다만 이 재평가 열풍에는 묘한 사각지대도 있었다. 토토가의 조명이 아이돌과 댄스 음악이라는 특정 주파수에만 꽂혀 있었던 거다. 물론 그들이 화려한 퍼포먼스로 골문을 흔든, 1990년대 음악의 최전방 공격수였던 것은 맞다. 그러나 공격수 몇 명이 골을 넣었다고 경기에서 이기는 건 아니다. 최전방의 화력 뒤에는 게임의 흐름을 조율하는 미드필더와 팀의 밸런스를 지탱하는 수비수들도 필요하다. 댄스 비트가 가요계를 평정하던 시절, 방송국 카메라가 아닌 녹음실 믹스 콘솔과 물아일체가 되며 장인정신을 불태운 아티스트들이 그 장본인이었다.
그 중심에 대영AV라는 독특한 레이블이 있었다. 그곳은 아이돌과 댄스로 점철된 주류 음악에 반기를 들면서,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아티스트들의 성소와도 같았다. 그 대표적인 면면은 이렇다. 신해철과 넥스트(N.EX.T), 정석원과 015B, 그리고 윤종신과 김동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 라인업은 1990년대 가요가 유행가를 넘어 ‘웰메이드 팝’으로 나아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했다.
당시 가요계는 지금처럼 ‘K팝’이라는 이름으로 퉁치기에는 내부 간극이 컸다. TV에서 춤추는 오버그라운드의 아이돌이 있었다면, 동아기획과 신촌뮤직으로 대표되는 언더그라운드의 자존심들도 있었다. 이 두 세계는 비즈니스 모델은 물론 조직의 생리 자체가 달라,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들었다.
대영AV는 바로 그 중간의 제3지대에 깃발을 꽂았다. 언더의 음악적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오버의 대중적 파괴력을 동시에 갖춘 양가적 포지셔닝이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노래하는 가창자가 아니라, 사운드 메이킹의 전 과정을 통솔하는 ‘프로듀서형 뮤지션’들이 주축을 이뤘다. 1980년대 가요는 팝을 동경하면서도 기술적 한계로 인해 가요스러운 소리(a.k.a. 뽕끼)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반면 대영AV의 프로듀서들은 “우리도 빌보드급 세련된 사운드를 뽑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자, 앨범 한 장에 영혼과 자본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대영AV 서사의 문을 여는 주인공은 단연 신해철이다. 1988년 대학가요제, 참가번호 16번 무한궤도가 <그대에게>의 웅장한 신시사이저 인트로를 터뜨리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사실 이건 신해철의 치밀한 ‘현생 탈출 로드맵’이었다. 대학생이었던 그는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배고픈 현실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일단 메이저 대상부터 따고 오버로 나가자”라는 전략으로 대학가요제에 맞춤형 곡을 던진 거다. 여기까지는 신해철의 설계가 맞아 들어갔으나, 정작 대상 이후의 길은 험난했다. 밴드를 하려는 신해철에게 제작자들이 이렇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밴드는 돈이 안 돼. 그래도 넌 잘생기고 음악도 괜찮게 하니까, 솔로로 하면 대박 날 거야”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대영AV의 유재학 사장이다. 가왕 조용필의 매니저 출신인 그는 신해철의 포텐셜을 알아보고 기막힌 노예 계약을 제안했다. “밴드 앨범 내줄게. 대신 밴드가 깨지면, 남은 계약 기간은 니가 솔로로 메꿔야 된다?” 무한궤도 멤버들이 재벌 2세, 예비 치과의사 등 금수저들이라 금방 음악 때려치울 걸 간파한 신의 한 수였다. 유재학의 예상대로 무한궤도는 1집 발표 후 공중분해됐다. 그리고 신해철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이돌이 되어 CF를 찍으며, 대영AV의 캐시카우가 되었다.
그러나 본질까지 아이돌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음악적 주도권만큼은 끝까지 본인이 쥐고 놓지 않았다. 실제로 신해철 1집의 경우, 타이틀곡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는 대중성을 고려해 외부 작곡가에게 받았지만, 나머지 곡들은 신해철이 작‧편곡을 도맡았다. 연주에서도 기타와 신시사이저를 직접 쳤고, 당시 생소했던 미디(MIDI) 프로그래밍까지 도입했다. 가령 <안녕>, <연극 속에서> 같은 실험적인 트랙들은, 이후 그가 선보일 미디 신스 팝 스타일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이렇게 신해철이 솔로로 대박을 터뜨렸으니, 제작자 입장에서는 계속 굴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유재학의 진가가 드러난다.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신해철이 “다시 밴드를 하겠다”라고 했을 때, 유재학은 겉으로는 반대하면서도 끝내 판을 깔아줬다. 이건 당시로서는 미친 결정이었다. 밴드는 인원도 많고 돈도 많이 드는 비효율적인 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재학은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아티스트는 자유방임해 줘야 진짜 명반을 낸다” 그렇게 탄생한 괴물이 바로 넥스트다.
유재학은 넥스트에게 그야말로 ‘영혼의 풀 베팅’을 했다. 고가의 악기 세팅은 기본이고, 당시 한국에선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최첨단 녹음 시설을 신해철 앞에 통째로 대령했다. 이런 자본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해철의 작가주의가 만나면서 한국 가요계의 기술적 임계점은 작살나기 시작한다.
그 서막이 2집 <The Being>이다. 여기서 넥스트는 단순한 밴드를 넘어 철학적인 메시지를 설파하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화신이 된다.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 같은 대곡에 그 정체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당시 가요 문법으로는 상상도 못 할 웅장한 사운드 레이어와 실존주의적 가사가 휘몰아친다. 이건 유재학이 녹음실을 장기간 점유하게 해주지 않았다면 절대 나올 수 없었던 퀄리티다.
이어지는 3집 <The World>에선 글로벌 스탠더드로 판을 키운다. 여기서 유재학의 플렉스가 극에 달하는데, 영국 BBC의 엔지니어 믹 글로솝을 초빙해 온 거다. 메인 트랙인 <World We Made>를 들어보면 이전까지의 한국 록과는 사운드의 질감 자체가 다르다. 당시 녹음 기술로는 넥스트처럼 복잡하고 방대한 트랙의 악기 소리들이 뭉개지지 않고 다 들리게 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리를 쌓을수록 저역대는 벙벙해지고 고역대는 깎여나가는, 이른바 멍청한 사운드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믹 글로솝은 이 수많은 소스들을 정교한 위상 정리와 믹싱 기술로 엮어내며, 각각의 악기가 제 위치에서 칼날처럼 살아 움직이는 사운드를 구현해냈다. 악기 하나하나의 정위감과 공간감이 그야말로 ‘영미권 팝’의 수준으로 격상된 것이다. 요컨대 “우리도 팝처럼 세련된 소리를 낼 수 있다”라는 신해철의 로망을 유재학이 외화 낭비로 실현해 준 셈이다.
이러한 자본과 작가주의의 결합은 4집 <Lazenca: A Space Rock Opera>가 결정판이었다. 신해철은 아예 영국으로 날아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때려버린다. 이에 질세라 유재학은 록밴드 앨범 한 장에 당시 돈 3억 원을 태우는 미친 짓을 감행한다. 결국 <해에게서 소년에게>나 <Lazenca, Save Us> 같은 대곡들은 신해철의 역량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라며 돈을 꽂아준 유재학의 낭만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렇듯 넥스트의 신화는 신해철이라는 천재와 유재학이라는 물주가 만나, 가요의 체급을 세계 수준으로 펌핑시킨 도박이었다. 다른 회사였다면 “너 미쳤냐?” 소리를 들었을 예산과 시간을 퍼붓는 모험을 한 덕에, 넥스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레전드가 되었다. 신해철 역시 이 판 위에서 맘껏 포효하며 비로소 ‘마왕’에 걸맞은 카리스마를 장착하게 된다.
물론 이 찬란한 영광의 이면에는 그늘도 있었다. 유재학은 음악적 투자와 지원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진보적인 ‘개혁가’였지만, 돈 계산만큼은 쌍팔년도 관행을 답습한 전근대적 ‘보스’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앨범 만들 때는 돈을 물 쓰듯 썼는데, 나눠줄 때는 인색했다.
1990년대 가요계는 지금처럼 0.1% 단위로 쪼개는 정교한 로열티 시스템 따위는 없던 시절이다. 음반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해도 제작자가 기분 좋으면 크게 쏴주고, 아니면 “이번에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남는 게 없다”라고 퉁치면 끝이었다. 유재학 역시 이 불투명한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사운드는 최첨단 런던 스타일을 지향했는데, 매니지먼트는 종로 바닥의 주먹구구식 의리 경영에 머물렀던 셈이다.
참 아이러니한 양면성이다. 한쪽에서는 “빌보드 씹어먹을 음악 만들자”라며 아티스트에게 무한 자유와 자본을 몰아줬는데, 뒷단에서는 정산 문제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바로 1990년대 음악 산업의 민낯이기도 했다. 신해철, 015B, 윤종신, 김동률 같은 엘리트 뮤지션들을 줄줄이 낚아채서 판을 깔아준 ‘안목의 화신’이었지만, 정작 그 천재들에게 “사장님 나빠요”라는 원성을 샀던 인물.
결국 유재학은 가요의 황금기를 설계한 제작자이자, 기존 관성에 갇힌 구식 매니저라는 두 얼굴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낭만과 자본이 뒤섞여 음악성의 꽃을 피웠던 그 시절, 유재학이라는 보스는 대영AV의 영광이면서 몰락의 복선이기도 했다.
신해철이 대영AV라는 깃발을 들고 영토를 확장한 선봉장이었다면, 정석원은 그 위에 가장 견고하고 세련된 성을 쌓아 올린 설계자였다. 무한궤도 해체 후 정석원은 남은 멤버들인 조형곤, 장호일과 함께 015B라는 팀을 꾸렸다. 그러면서 객원가수라는 파격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보컬의 역량에 팀의 운명을 맡기는 게 아니라, 프로듀서가 설계한 사운드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 부품’을 탑재하는 방식이었다.
유재학 사장은 정석원의 이 공학적 감수성에도 전폭적인 현질을 감행했다. 덕분에 015B는 매 앨범마다 가요의 한계를 시험하는 사운드 실험실이 될 수 있었다. 1집의 발라드 <텅 빈 거리에서>를 시작으로, 2집과 3집에서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같은 메가 히트곡들이 쏟아졌다. 특히 3집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가요계의 관성들을 정면으로 거부한 시도였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정통 하우스 비트를 깐 것도 모자라, 노래 시작 전까지 1분에 가까운 시간을 연주로만 채우는 도박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샘플링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현란한 춤이 없어도 클럽의 댄스플로어를 장악할 수 있는 흥겨운 그루브를 창조해냈다. 멜로디에만 집착하던 한국식 팝을 리듬과 소리의 결이 살아 있는 ‘진짜 팝 사운드’로 격상시킨 셈이다.
정석원은 이렇듯 하우스, 신스팝, 재즈를 가요의 정서와 조합하는 압도적 세련미를 선보였다. 거기에 ‘서울대생 밴드’라는 지적인 이미지에 걸맞게, 가사에서도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드러내거나 현대인의 건조한 심리를 묘사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낸 4집과 5집은 ‘장르의 용광로’였다. 뉴잭스윙부터 하드록까지, 어쿠스틱부터 전자음악까지 사운드의 질감을 극한으로 연마했다. 이렇듯 정석원은 유재학의 지원 아래 당대 최고의 세션맨들을 물 쓰듯 기용하며 1990년대 웰메이드 팝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 설계자도 유재학의 종로식 의리 경영 앞에서는 답이 없었다. 밀리언셀러를 밥 먹듯 찍어도 아티스트의 몫은 제작자의 ‘기분’에 좌우됐으니까. 결국 015B는 5집을 끝으로 대기업 자본인 LG미디어로 탈출한다.
이때 나온 6집 <The Sixth Sense>는 대단히 흥미롭다. 유행 따위 개나 줘버린, 전위적인 사운드 실험으로 떡칠한 이 앨범은 30만 장이라는 폭망에 가까운 성적을 냈다. 그런데 반전이 터진다. 대기업의 투명한 인세 시스템 덕분에, 100만 장 팔던 대영AV 시절보다 30만 장 판 LG 시절에 정석원이 번 돈이 훨씬 많았던 거다. 이는 유재학의 대영AV가 가졌던 태생적 한계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였다(물론 이후 정석원도 군입대를 빤스런하면서 쉴드 불가한 흑역사를 남겼지만).
정석원이 사운드의 설계도를 그리는 동안, 그 곁에서는 한국 발라드의 지형도를 바꿀 두 새싹이 자라고 있었다.
먼저 윤종신. 그는 015B 1집의 <텅 빈 거리에서>를 부르며 혜성처럼 등장한 보컬이었다. 이별 후의 찌질한 감성을 세련된 편곡에 태우는 데 유독 탁월했다. 정석원의 차가운 공학적 설계에 윤종신의 뜨거운 감수성이 더해지며 1990년대 발라드의 한 축이 완성됐다. 객원가수로 출발했던 그는 박정현, 성시경 등에게 곡을 주는 히트 메이커로 거듭나며, 대영AV 라인의 음악적 외연을 넓혔다.
여기에 김동률(전람회)의 등장은 대영AV 작가주의의 화룡점정이었다. 1993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먹고 합류한 그는 선배들과는 또 다른 ‘클래식한 품격’을 들고 나왔다. 특히 전람회 2집의 <이방인>은 김동률의 작가주의가 제대로 폭주한 곡이다. 당시 가요계에서 낯설던, 난해한 화성과 웅장하고 서늘한 오케스트라 편곡을 밀어붙였다. 이건 제작자인 유재학이 "엉뚱한 짓 하지 말고 대중적으로 좀 써봐라"라고 태클 거는 순간 엎어질 시도였다. 하지만 유재학은 김동률의 고집을 믿어줬고, 덕분에 가요와 클래식의 벽을 허무는 독특한 명곡들이 탄생했다. 오늘날까지도 견고한 김동률의 팬덤은, 이때부터 형성된 음악적 고집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윤종신이 발라드의 서사를 넓혔다면, 김동률은 발라드의 격조를 높였다. 신해철과 정석원이 닦아놓은 고품격 사운드의 토대 위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작가주의를 꽃피웠던 셈이다.
대영AV의 역사는 유재학의 낭만주의가 대기업의 시스템에 바통을 넘겨준, 음악 산업의 과도기적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아티스트의 고집에 판돈을 몰아주던 한 시대의 도박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무모한 베팅이 남긴 음악적 성취는 K팝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지금 세계의 주목을 받는 K팝의 영광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수만의 SM은 아이돌이라는 강력한 하드웨어를 구축했다. 대영AV와 그 소속 뮤지션들은 그 기계적 완벽함 속에 음악적 자존심과 작가주의적 영혼이라는 소프트웨어를 탑재했다.
신해철의 광기 어린 실험, 정석원의 정교한 프로듀싱, 김동률의 클래식한 격조는 오늘날 K팝의 시스템을 떠받치는 ‘사운드의 퀄리티’ 그 자체다. 토토가가 비춘 화려한 댄스 비트 이면에는, 사운드의 완성도를 위해 영혼을 팔았던 이들의 지독한 집착이 서려 있다. 그리고 이 집착이야말로 오늘날 ‘웰메이드 K팝’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된 실질적 원형이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대영AV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작가주의 DNA는 오늘날 가장 트렌디한 K팝 프로듀서들의 작업 방식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시절 유재학이 퍼부은 자본과 신해철, 정석원, 김동률이 밀어붙인 고집이 없었다면, 지금의 K팝은 훨씬 더 싱겁고 얄팍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