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과 함께 작업한 공동작품이며, '요술램프'의 후속작 제3편,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본편 스토리는 모르셔도 되지만 가능한 외전 1편부터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외전 1편
https://brunch.co.kr/@mkchoi2021/196
https://brunch.co.kr/@mkchoi2021/197
외전 2편
https://brunch.co.kr/@mkchoi2021/208
이 시리즈에 실린 모든 이미지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께서 직접 AI를 사용하여 만드신 작품입니다. 과장 1도 안 섞고 진짜 예술입니다.
그럼 즐겁게 감상하세요~
시간은 무자비하다.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강의 뱃사공은 아무리 애원해도 뱃머리를 돌리지 않는다.
허나 그보다 더 가혹한 게 뭔지, 그대는 아는가?
죽음? 아니.
망각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살아내야 하는 불멸의 삶.
그 안에서 미치지 않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이프리트, 잔. 나의 아이들아. 이리 오렴.”
신이 직접 불로 빚은 최초의 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 우리는 그를 ‘릿트’라고 불렀다.
그의 갈색 피부는 무엇이든 품어주는 부드러운 토양 같았고, 눈동자는 태양도 부끄러워 구름 뒤에 숨을 만큼 고귀한 황금빛이었다. 길고 하얀 머리칼은 낮에는 햇빛을 받아 오색 찬란하게 빛났으며, 밤에는 달빛을 머금어 신비로운 은색으로 변했다. 그 당시 늑대들은 달이 아닌 릿트에게 매료되어 그의 주변을 맴돌았는데, 이것이 훗날 그가 ‘하얀 늑대’라는 이명으로 인간들의 전설 속에 남게 된 연유였다.
릿트를 연모한 것은 늑대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날아가던 새들은 날갯짓을 멈추고 내려앉아 그에게 가장 고운 깃털을 바쳤고, 들짐승들은 그를 위해 늦가을에 난 윤기 나는 털과 새로이 올라온 비늘을 준비했으며, 물에 사는 동물들은 오묘한 빛깔의 돌과 진주, 조개껍데기를 주워 강기슭과 해변에 쌓아두었다. 그들의 마음을 어여삐 여긴 릿트는 선물 받은 것으로 정성스레 옷과 장신구를 만들어 몸에 걸쳤다. 그러나 제아무리 화려하고 예쁜 것도 그의 앞에서는 전부 무색해지고 말았다.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잘은 몰라도, 그는 모든 진들의 조상이었다. 많은 후손 중에서 릿트는 나와 나의 형 이프리트를 유난히 예뻐했다. 우리가 아직 어릴 적 그는 땅 위의 태양을 소망하여 얻은 것이 이프리트이고, 어둠 속 길을 밝히는 별로 얻은 것이 나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곤 했다.
자연을 사랑한 그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였다. 릿트의 정원은 향기로운 꽃과 나무, 갖가지 신기한 풀로 가득했다. 제 집처럼 곧잘 그곳을 들락거리던 나와 이프리트에게 릿트는 제일 아끼는 꽃이나 열매를 선물로 주었다.
어느 날 그는 잎사귀 하나 없이 꽃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나무에서 한참을 고르고 골라 꽃 두 송이를 땄다. 그리고 한 송이씩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자, 받거라. 어떠니? 정말 아름답지?”
그를 맹목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프리트는 꽃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서 단언했다.
“이런 꽃 따위 당신에게 비할 바가 못됩니다.”
“후훗, 그것 참 고맙구나. 하지만 그럼 내가 꽃에게 미안하지 않니. 기껏 나무에 달린 것을 따서 네게 주었는데, 네가 잘 봐주지도 않으니 말이다.”
머쓱해하는 이프리트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릿트가 날 돌아보았다.
“잔, 네가 보기엔 어떠냐?”
나는 묵묵히 꽃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아름답다 생각했었다. 꽃과 나무, 날아다니는 것과 걸어 다니는 것, 기어 다니는 것, 헤엄치는 것, 떠다니는 것. 살아있는 것 전부가 경이로워 보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점차 쇠하고 사라지는 걸 몇 번 보고 나서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 모르겠습니다. 아니, 무의미합니다.”
“무의미?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겠니?”
“이것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잠시 눈을 돌렸다가 다시 찾으면 그새 없어요. 그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죠? 돌아오는 건 언제나 아쉬움뿐인걸요.”
릿트가 가만히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놀란 이프리트가 꽃을 떨어뜨렸고, 나는 꽃을 더 꽉 쥐었다.
“잔, 넌 정말 상냥한 아이로구나. 그러다 네 마음이 다칠까 걱정이다.”
그는 우리 둘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바람이 더 따뜻해지고, 마지막으로 태어난 새끼 여우가 어미젖을 찾지 않을 때쯤 둘이 또 여길 찾아오려무나.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단다.”
릿트의 지시대로 우리는 그의 정원을 다시 찾았다. 그가 꽃을 따주었던 나무에는 이제 꽃은 없고, 대신 작고 붉은 열매가 달려 있었다. 열매는 시큼하면서 단맛이 났다. 릿트가 열매 속 씨앗을 보여주며 말했다.
“비록 꽃은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갔지만, 보렴. 이렇게 씨앗을 남겼지? 씨앗은 땅속에 들어가 싹을 틔우고, 장차 한 그루의 나무가 될 거야. 그럼 거기에서 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거다. 꽃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목숨을 내어준 것이란다. ‘희망’이란 것에게.”
릿트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땅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반복되는 끝과 시작. 생명의 순환. 이어지는 희망의 고리... 어쩌면 필멸의 존재들이 영원을 사는 우리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난 가끔 생각한단다.”
나는 저번에 릿트가 준, 이제는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을 품에서 꺼냈다. 정말로, 정녕 이것이 우리보다 아름답단 말인가.
열매의 즙으로 붉게 물든 릿트의 입술이 살짝살짝 떨어지며 말을 흘렸다.
“때가 되면, 나도...”
사라락. 바람이 불어 그의 말끝을 쓸고 갔다. 머리 위에서 짙은 초록색 잎사귀가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이프리트가 울부짖으며 달려가 릿트에게 와락 안겼다.
“그럴 리 없어! 절대 안 돼요!”
“미안, 이프리트. 내가 너희 앞에서 그만 실언을 했구나.”
울음을 터뜨리는 이프리트와 그를 달래는 릿트. 둘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순간 두려워진 나는 옆에 있는 나무 기둥에 손을 갖다 대었다. 단단하고 거친 나무껍질과 함께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것이 만져졌다. 덩굴이었다. 나무 기둥을 타고 뻗은 덩굴을 눈으로 좇다 보니 붉은 열매들이 보였다.
씨앗을 있게 한 나무. 나무를 있게 한 씨앗. 그 씨앗이 있기 전, 또 다른 나무와 씨앗. 릿트가 들려준 이야기를 매개로 눈앞의 현재가 이젠 스러지고 없는 과거와 이어졌다.
먼 과거가 현재를 보지 못했듯이, 현재도 미래를 보지 못하리라. 알지도 못하는 미래를 향한 희망이라니, 이 얼마나 무모한가.
그럼에도 생명은 죽는다. 내일을 믿고서.
아직도 이날의 기억이 가끔 떠오르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릿트의 믿음은 과연 옳았을까, 하고.
<인간의 금요일, 화창한 4월의 어느 날>
“그래서... 벚꽃 구경을 하러 여기 경주까지 오셨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휘의 목소리는 기가 차서 죽겠다는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어때서? 너도 워크숍인가 뭔가 하러 어제부터 내려와 있었잖아.”
“내가 뭐 놀러 온 줄 알아? 워크숍도 엄연한 업무의 연장이야.”
“그럼 너넨 이 좋은 곳까지 와서 답답한 호텔에만 있는 거냐? 바보 아냐?”
“그러니까, 놀러 온 게 아니라고.”
가엾은 월급쟁이 같으니. 그 월급쟁이가 벌어온 돈으로 산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나는 벤치에 앉아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감상했다.
벚꽃이 흰구름처럼 파란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경주 보문단지’. 보문단지 전체가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지만, 특히 저 앞에 보이는 ‘보문정’은 전 세계를 돌아다닌 내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이 좋은 걸 나 혼자 즐기고 가도 별 상관은 없다만, 그러면 좀 미안하니까.
“그 워크숍인가 뭔가 1박 2일이라며. 몇 시에 끝나?”
“이따가 점심 먹고, 한 오후 2시 반쯤?”
“점심, 먹고?”
“왜?... 너 또 쓸데없이 뭐 가져온 건 아니겠지?”
나는 내 옆에 놓인, 세련된 보자기로 정갈하게 싸서 들고 온 3단 찬합 도시락을 힐끔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외식을 하자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내 피 같은 돈을 빨아먹겠다는 거냐?”따위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또한 내 현란한 요리 솜씨로 저놈 기를 팍 죽여놓기 위해서 꼭두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쌌거늘.
수고한 게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그냥 물러설 수는 없지.
“도시락 싸왔으니까 조금만 먹어.”
“뭔 도시락... 아무튼, 나 끝나고 뒤풀이 갈 수도 있어. 기왕 왔으니까 넌 조금만 놀다 가. 사고 치지 말고. 알았지?”
“뭐? 야, 이 매정한 놈아! 경주는 처음인 외국 정령을 이렇게 방치하기 있냐?”
“아. 나 이제 진짜 가야 돼.”
“야, 야!”
뚝.
꽉. 전화기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냐, 그래... 혼자 엄청 재밌게 놀아서 네가 부러워 죽도록 만들어 주마!”
나는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펼쳤다. 수첩에는 오늘 들를 장소의 이름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리스트를 쭉 훑어 내려가던 손가락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불국사! 경주에 왔으면 당연히 가줘야지.”
경주는 처음이지만, 난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은 정령이니깐.
'릿트'라는 이름은 알라가 불에서 창조한 최초의 진이라 알려진 '카릿트(남성. 사자를 닮은 모습이라 한다)'와 '마릿트(여성. 늑대와 닮은 외견을 가졌다 한다)'에서 따왔습니다. 둘이 왜 하나로 합쳐졌냐 하면, 둘이나 만들기 귀찮(...)아서요.
'잔'은 사막에 사는 선한 진으로, 인간이 제일 처음으로 만난 진이라 하네요. 오아시스를 만들거나 감출 수 있고, 회오리바람이나 흰 낙타 등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으며,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나 상인들을 보호했다 합니다. 전쟁이 나면 자신이 보기에 의로운 쪽을 도와주고 악한 편은 방해했다 해요. 요술램프 시리즈의 정령 잔씨는 여기서 모티브를 따 만들어졌습니다. (참 빨리도 밝힌다.)
'이프리트'는 현대 서브 컬쳐에서도 유명한, 불의 정령 또는 악마로 자주 등장하는 강하고 위험한 진입니다.
이 모든 정보의 출처는 나무위키임을 알려드립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중동 신화나 전설을 알겠으며 관련 문헌을 찾겠어요. =_=
그럼 여러분, 2편에서 다시 뵐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