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과 함께 작업한 공동작품이며, '요술램프'의 후속작 제3편,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본편 스토리는 모르셔도 되지만 가능한 외전 1편부터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외전 1편
https://brunch.co.kr/@mkchoi2021/196
https://brunch.co.kr/@mkchoi2021/197
외전 2편
https://brunch.co.kr/@mkchoi2021/208
외전 3-1편
https://brunch.co.kr/@mkchoi2021/209
이 시리즈에 실린 모든 이미지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께서 직접 AI를 사용하여 만드신 작품입니다. 진짜 예술이니까 꼭 보고 가세요!
릿트의 상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져만 갔다.
나와 이프리트가 자라 청년이 되었을 즈음엔 그의 화염은 본래의 빛을 잃고 많이 탁해져 있었다. 이프리트는 릿트가 그렇게 된 것이 불멸인 우리가 필멸의 세상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 여겼고, 아예 죽음이 없도록 세상을 재창조하려 했다. 이는 창조주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반역행위였다.
“형, 그건 반란이야!”
“동생아, 이건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야.”
이프리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설득도 하고 빌어도 보았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젊은 진들을 끌어모았고, 머지않아 충분한 병력이 모였다.
드디어 결전을 하루 앞둔 날, 그가 나를 찾아왔다.
“너도 우리와 함께 싸우자.”
“난 싫어. 형도 그만둬.”
“넌 릿트를 저대로 둘 셈이야? 그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잊었어?”
“나도 가슴이 아파. 나도 해결책을 찾고 싶다고. 하지만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니야. 릿트도 이런 건 원하지 않아. 알잖아?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이, 다른 누구도 아닌 릿트의 이름으로 이런 짓을 벌이면 안 된다는 걸!”
“... 넌 아직도 모르는구나. 이건 릿트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야. 우리 모두를 위한 싸움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잔, 너는... 릿트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제야 알았다. 이프리트도 알고 있었다는 걸.
- 보고 말았구나, 잔.
그날 본 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사랑이라는 이름의 저주. 릿트는 그 저주에 걸려 미쳐가고 있었다. 열매즙처럼 새빨간 피를 입술에 묻히고서, 릿트는 조용히 웃으며 내게 속삭였었다.
- 이건 꿈이야. 너는 악몽을 꾼 거야.
그 거짓말을 믿고 싶었는데.
- 가엾은 것.. 너는 절대로, 날 닮아서는 안된다.
다음 날 나는 ‘혁명’에 동참했다.
치기 어린 궐기는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고, 우리는 처형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 릿트가 나타나 대신 책임을 지고 소멸되었다. 릿트의 몸은 수십억 개의 불꽃으로 쪼개져 온 사방에 흩어졌다.
그를 잃고 세상은 큰 슬픔에 잠겼다. 땅의 축이 기울었고, 해는 얼굴을 가렸으며, 별들은 눈물처럼 쏟아졌다. 죽은 릿트를 삼킨 스스로가 역겨워 대지는 마구 용암을 토해냈고, 파도는 갈 곳을 잃은 분노와 같이 닥치는 대로 삼켜댔으며, 휘몰아치는 바람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찢어버릴 기세였다. 이러한 대재앙 속에서 대부분의 생명은 사그라들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것들도 절망에 빠져 시름했다.
이를 보다 못한 신은 릿트의 조각이 깃든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최초의 인간, 새 주인을 맞이한 지구는 다시금 희망을 품고 활기를 되찾았다.
진의 목요일이 저물고, 인간의 금요일이 도래한 것이었다.
<인간의 금요일, 4월>
경주를 대표하는 명소라더니, 평일임에도 불국사는 소풍 온 학생들과 데이트하는 연인들,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이국적인 얼굴들도 꽤 많이 보였다. 여기선 나도 저들과 섞여 편히 다닐 수 있겠구나 하고 안도한 그 순간,
“어머 저 사람 좀 봐. 유명한 모델 아니야?”
“특이한 걸 들고 다니네. 혹시 ‘돌체 앤 가바나’ 신상백인가?”
무수한 인간들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가 비밀스럽게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놈의 미모, 참으로 곤란하군. 휘 그 자식이 사고 치지 말랬는데... 할 수 없네.’
나는 저들의 생각대로 모델처럼 보이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너무 의도한 티가 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인생샷이 나오도록. 찰칵. 찰칵. 몰래 사진을 찍는 여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창 포즈에만 집중하면서 걷고 있는데, 눈앞에 떡하니 커다란 절이 나타났다.
‘여기 절이랬지? 설마 이게 끝이야?’
‘대웅전’이라 적힌 현판을 멀뚱멀뚱 올려다보고 있는 내 뒤로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Hi. Do you need any help?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돌아보니 웬 착하게 생긴 젊은 처자가 웃고 있었다. 아마 날 한국어를 할 줄 몰라서 곤란해하는 외국인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내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걸 보니 성격도 순진할 거 같은데, 오호라. 이 여자를 옆에 데리고 다니면 다른 인간들의 관심을 좀 덜 받지 않을까?
“네. 그래주시겠어요? 처음이라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어, 어머! 죄송해요. 전 또 한국말 못 하시는 줄 알고...”
“하하, 아녜요. 말만 좀 할 줄 알지 다른 건 서툴어요. 한국에서 산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여자가 뺨을 붉히며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이 뭐고, 대학은 어디를 다니고 있고, 오늘은 무슨 일로 불국사에 왔고 등등. 나는 웃으면서 대충 흘려들었다. 관심 있게 들은 부분은 그녀가 과제 때문에 불국사에 여러 번 왔었다는 것뿐이었다.
“잘됐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 좀 안내해 주시겠어요?”
“네! 물론이죠.”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불국사 곳곳을 구경했다.
듣자 하니 불국사는 인간의 시간으로 약 1,500년 전쯤 처음 지어져,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뒤 지금의 규모로 중창되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만행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이후 왕실과 지방 양반들이 복구하려 노력하였으나, 조선 말기에 와서는 거의 폐허로 남아버렸다고.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불국사를 태워 없앤 장본인인 일본이 일제강점기 때 그걸 다시 임시 복원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1970년대에 시행된 대규모 복원사업을 통해 불국사는 현재 모습으로 되살아났어요. 복원 과정에서 후대의 양식이 섞여 들어가는 등, 통일신라시대 때 처음 지어진 불국사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이 땅 위에 부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꿈과 기개를 현대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교로서는 전혀 손색이 없죠.”
“그렇네요. 정말 웅장하고 멋져요.”
우린 다시 대웅전 앞으로 돌아왔다. 거기 있는 두 탑에 대해 그녀가 설명했다.
“대웅전을 마주 보고 서서 봤을 때 왼쪽에 있는 것이 석가탑, 오른쪽에 있는 것이 다보탑이에요.”
“둘이 되게 다르게 생겼네요?”
“그렇죠? 석가탑의 석가는 현생의 부처님인 석가여래를, 다보탑의 다보는 전생의 부처님인 다보여래를 뜻해요. 다보탑이 화려하고 세련되었다면, 석가탑은 소박하고 단정한 멋이 있죠. 석가탑은 ‘무영탑’이라고도 불리거든요? 거기에는 전설이 있어요.”
전설은 이러했다. 당대 최고의 석공인 백제의 아사달은 탑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신라로 떠났다. 그의 아내 아사녀는 남편이 하루빨리 귀환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아사달은 돌아오기는커녕 소식도 한번 없었다. 헤어진 지 3년이 넘어가자 참다못한 아사녀는 남편이 있는 신라의 불국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 여자는 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금기가 있는 바람에, 그녀는 거기까지 가서도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먼발치에서나마 아사달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아사녀는 매일 이른 아침부터 절 앞을 서성였다. 이를 딱히 여긴 한 스님이 그녀에게 “탑이 완성되면 근처 연못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니, 거기서 지성을 드리며 기다리십시오”라고 조언해 주었다. 스님이 알려준 연못가에 가서 하루도 빠짐없이 지성을 드리던 아사녀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낙심하여 연못에 몸을 던졌다.
“한편, 밤낮없이 열심히 일한 아사달은 드디어 석가탑을 완성했어요. 아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스님의 말을 듣고 그는 너무 기뻐 단숨에 달려갔죠. 그러나 이미 연못에 빠져 죽은 아내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아사달은 깊은 슬픔에 잠겼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앞산 바윗돌이 마치 아사녀의 웃는 얼굴처럼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그걸 본 아사달은 그 바윗돌에 아사녀를 새겼고, 그 모습이 점점 부처님을 닮아갔답니다. 불상을 완성한 이후 아사달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아내를 따라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말도 있고, 고향인 백제로 돌아갔다는 말도 있거든요. 사람들은 아사녀의 전설이 깃든 연못을 ‘영지(影池)’라고 불렀고, 그림자가 없는 탑이란 뜻으로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해요.”
“그저 지어낸 이야기였으면 좋겠군요. 남편이 죽은 것도 아니고, 고작 3년 좀 넘게 못 본 걸 가지고 죽었다면 너무 어이가 없잖아요?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될 것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상관없겠지. 이제 여기서 볼일은 다 봤으니까.
슬슬 인사하고 헤어지려 했는데,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지도요. 하지만 아사녀에게 그 3년은 너무나 길었을 거예요. 연인을 그리는 1분 1초는 영원과도 같은 법이니까요.”
영원. 영원이라. 경험해보지도 않은 주제에 참 쉽게도 말하는군.
그래도...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씁쓸히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네?”
“아사달이요. 아내를 따라서 죽었을까요, 아님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글쎄요... 어느 쪽이든 둘이 나중에 환생해서 다시 부부로 만났으면, 그 생에서는 헤어지는 일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두 손을 모으더니 석가탑을 향해 합장을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환생? 하여간 인간들이란. 뭘 그렇게 더 살고 싶어서 안달들인지.
인간의 사후 따위 모르고 내 알바도 아니지만, 그들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간을 빚은 흙 속에는 릿트의 불꽃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인간들이 싫었나 보다. 릿트의 생명을 이어받아 놓고 고작 그런 존재나 되었다는 게, 너무 실망스럽고 화가 나서.
“... 보아하니 당신은 환생을 믿는 거 같은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네.”
“만약 애인이 전생에 원수였다면 어쩔 건가요? 이전 생에서 그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당신이 그를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알게 되면요.”
“예..? 그게...”
“오늘 고마웠어요.”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딱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반대로 물어봤네. 전생에 원수가 아니라... 어?’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뭐야,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휘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야! 너 내가 사고 치지 말랬지! 지금 어딨어!”
“... 귀청 떨어지겠다. 여기, 옆에 계단.”
“뭐?”
그제야 날 발견한 휘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나한테 빨리 내려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나는 느릿느릿 그에게 걸어가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그래?”
그는 대답 대신 자기 전화기를 내 얼굴에 들이댔다. 웬 찌라시 언론의 낚시 기사가 하나 열려 있었다.
[불국사에 데이비드 간디 출현? 한국 전통문화를 살린 신상백 선보여]
“푸흡!”
“이 사진 뭐야? 포즈 봐라. 아주 작정하고 찍혔는데?”
“설마 너, 이거 보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뒤풀이는 어쩌고?”
“너 때문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팔고 나왔다.”
“아.. 미안. 근데 진짜, 풉, 기사까지 뜰 줄은 몰랐다. 하하.”
“이 자식이... 이게 웃을 일이야?”
“너도 지금 피식거리고 있잖아.”
우리는 결국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배가 아플 때까지 웃고, 눈물을 찔끔거리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내 인심 썼다. 그 기사 프린트해서 가보로 보관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제 그만 가자.”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싫어. 나 아직 갈데 많이 남았거든?”
휘는 내 수첩에 적힌 리스트를 보고 기겁을 했다.
“이걸 어떻게 하루 만에 다 봐. 안돼.”
“왜? 적어도 둘이나 셋 정도는 더 볼 수 있을 거 같구만.”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내 말에 동의하듯이 벚나무 가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꽃잎이, 찰나의 아름다움이 흩날렸다.
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그럼 두 개만. 불국사랑 보문단지는 갔고, 또 어디 갈래?”
“... 보문단지로 다시 가자.”
“왜?”
“기껏 싸 온 도시락 아직 열어보지도 못했어. 나무 아래에 자리 깔고, 벚꽃 올려다보면서 먹고 싶어.”
오늘은 벚꽃을 보러 온 거니까.
“도시락은 뭐 싸왔는데?”
“왜 물어봐? 넌 점심 먹었잖아.”
“그게... 실은 입에 안 맞아서 별로 못 먹었어.”
“... 김밥이랑 유부초밥, 토끼 모양 크로켓,”
“소시지는?”
“쯧쯧, 하여튼 초딩 입맛. 비엔나소시지 문어 모양으로 만들어 왔고,”
“오케이. 그럼 됐어.”
“그거 말고도 내가, 응? 팔라펠이랑 케밥, 샐러드, 그리고 대망의 수메르식 잡채까지 해왔단 말이지. 그거 플러스 디저트로...”
Yas - Empty Crown
https://www.youtube.com/watch?v=t-BbfCBTV2A&list=RDt-BbfCBTV2A&start_radio=1
뭔가 배경음악으로 어울릴 만한 거 없나 하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찾은 곡입니다.
아티스트가 이란 사람이고 페르시안 랩의 창시자(개척자?)라는 것 말고는 잘 모르지만, 노래 가사와 분위기가 릿트의 이야기와 딱 맞는 거 같아요.
이럴 때마다 운명이란 걸 체감한답니다.
당신이 이 글과 마주친 것 또한 아마도 운명.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