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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r 22. 2022

과학과 정치

이 글은 2022년 3월 23일 자 대전일보 과학이야기 칼럼에 기고한 것이다. 올해 상반기 세 편의 칼럼을 쓰기로 했는데, 두 번째 글은 시의성에 맞는 주제로 골라서 써봤다.


과학과 정치는 개념적으로 서로 관련이 적어 보인다. 과학은 가치중립적, 비정치적 학문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는 현상 인식을 넘어 당위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과학 연구는 정치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성을 가져야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잘못된 이론으로 소련의 농업을 망친 과학자 트로핌 리센코. 정치이념이 과학에 끼친 해악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물론 과학의 정치적 독립은 중요하나, 어떤 면에서는 본질에서 벗어난 주장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과학은 정치와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근대과학의 출발점인 16~17세기 과학혁명부터가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시민계급은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의 성과들을 수용하여 혁명의 이론적 무기로 삼았다. 일례로 뉴턴 역학을 집대성한 「프린키피아」를 유럽 대륙에 소개한 이가 바로 계몽주의의 기수 볼테르였다. 과학주의로 무장한 시민계급은 신 중심의 중세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근대 자본주의국가를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본업이 따로 있는 아마추어들인 경우가 많았다. 근대적 원자론의 창안자 존 돌턴(교사), 전자기학의 아버지 마이클 패러데이(제본공), 에너지 보존 법칙의 발견자 제임스 줄(양조업자)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자본주의국가는 전문 과학자 집단을 키우고 지원하며 과학을 제도화했다. 이로써 과학은 개인의 실험실을 벗어나 국책 연구소로 대형화되었다. 국가의 재정 지원을 기반으로 과학도 크게 진보할 수 있었다. 1960년대의 아폴로 계획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계획은 소련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미국의 정치적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인간의 달 착륙이라는 인류 과학의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미국 아폴로 계획의 시발점이 된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We choose to go to the Moon' 연설.

따라서 과학과 정치를 무조건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보다는 양자가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관계 맺음의 형태를 고안해야 한다. 1911년 독일의 카이저빌헬름연구회 설립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연구회는 기획 단계부터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황제 빌헬름 2세의 부국강병 정책과 안정적으로 연구비를 지원받고 싶었던 과학자들의 속셈이 만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지원에만 힘썼을 뿐, 운영의 전권은 총재인 아돌프 하르낙에게 위임했다. 하르낙은 황제를 설득해 연구회를 설립하고 재정적 지원을 받아낸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막상 운영 과정에서는 황제를 배제하는 이중적 논리를 취했다. 과학 연구의 핵심은 자율성이라는 지론 때문이었다. 황제가 통치하는 시대에 이러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획기적인 운영 모델이었다. 덕분에 연구회는 아무런 부담 없이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이후 막스플랑크연구회로 개칭, 노벨상 수상자만 30명을 배출하며 현재까지 세계적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막스플랑크연구회의 하르낙 원칙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운영원리로 기능하고 있다.

이 사례는 과학과 정치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전형을 보여준다. 오늘날 고도화된 과학은 대규모 자원, 장기 계획, 체계적 지원책을 필요로 한다. 정치는 국민적 합의에 따라 국가 자원의 배분 방식을 결정하고, 정책체계를 통해 이를 집행한다. 따라서 정치는 과학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될 수 있다. 다만 후원자의 역할은 말 그대로 뒤에서 돕는 것이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 간 협업의 출발점은 각자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과학과 정치도 서로 잘하는 것을 존중하는 틀 안에서 시너지를 모색해야 한다. 마침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기획하는 정치의 계절이 왔다. 과학에 대해서도 보다 진전된 관계 설정에 따라 상승적 결합을 이루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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