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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07. 2022

그들은 어떻게 최고의 연구소가 되었나 (3)

미국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LBNL)

“과학자가 아무리 헌신적이더라도 물질적 도움 없이 홀로 중대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는 우리 과업에서 가장 자명한 사실이다.”

- 어니스트 로렌스(1901~1958)

     

현대과학의 패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다. 촘촘히 세분화된 과학의 각 분야들을 대표하는 석학들이 대부분 미국에 몰려 있다. 일례로 미국은 2020년까지 노벨과학상 수상자 290명을 배출한, 이 부문 넘사벽 세계 1위다. 2위 영국(95명), 3위 독일(88명), 4위 프랑스(39명), 5위 일본(25명)의 수상자를 합친 것보다도 많다.

    

특히 1960년대 미국은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한 위상을 가진 현대판 ‘제국’이었다. 세계 GDP의 40%를 점유한 경제력은 물론, 우주선에 사람을 태워 달에 보내는 기술력까지 갖췄다. 1960년대면 세계적으로 컬러 TV도 드물고 컴퓨터는 계산기의 의미에 가깝던 시대다. 2022년 세계 10위 경제대국인 우리나라는 유인 달 착륙은커녕, 지구 궤도를 벗어날 로켓기술도 없다. 이렇게 보면 천조국 미국의 과학기술이 도대체 얼마나 앞서 있는지 아득할 정도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과학기술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승리를 계기로 국가가 되었다. 인류 최대, 최악의 전쟁이 끝난 뒤에 새로운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러 국내외적 요소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성립을 뒷받침했지만, 그중 과학기술의 헤게모니를 빼놓을 수 없다. 하염없이 길어질 뻔했던 전쟁을 끝낸 것은 맨해튼 계획으로 대표되는 첨단 과학기술이었다. 당시 일본의 강경파들은 패배가 확정적인 상황에서도 본토에서의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림으로써 전쟁이 끝날 수 있었다. 아마 맨해튼 계획이 실패했다면, 역설적으로 총 사상자 수는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소개할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oratory, 이하 LBNL)도 팍스 아메리카나와 연관이 깊다. 미국 과학 발전의 여명기인 20세기 초 설립되어, 2차 세계대전 승리를 지원하며 세계 최정상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캘리포니아 시골 마을의 작은 연구소에 불과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우수한 연구자들을 모으고 사회의 요구에 대응한 결과, 1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수천 명의 과학자들이 실험하러 오는 대형 국가 연구소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는 세계 초강대국으로 도약한 미국 과학기술의 현대사가 투영되어 있다.



     

핵무기 실험시설에서 국가 에너지 활용시설로

    

LBNL은 미국 연방정부의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에 속해 있다. 에너지부는 이름 그대로 국가의 에너지 개발과 활용 업무를 총괄하는 곳이다. 그 산하에는 LBNL을 비롯한 17개의 국립연구소(National Laboratory)들이 존재한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17개 국립연구소의 리스트와 위치

후술하겠지만 이 국립연구소들의 기원은 맨해튼 계획에 있다. 즉 1940년대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 성능을 테스트하려고 만든 비밀 시설들이 국립연구소의 원형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현재 연구분야도 핵무기 개발에서 파생한 대형·실험 R&D가 주를 이룬다. 물론 핵무기도 여전히 만들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보다는 핵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에너지 활용 연구가 주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 스펙트럼은 기초과학에서 첨단 공학기술까지 망라한다.

17개 국립연구소별 주력 연구분야

다만 다종다양한 이 분야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있다. 대학이나 기업 등에서 갖추기 힘든 대형 실험시설을 기반으로 대규모 연구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 시설들을 전쟁 이후에는 과학 연구에 활용하고자 했고, 이것이 국립연구소를 만든 중요한 동기였다. 국립연구소의 시설들은 (연구제안서가 통과만 된다면) 전 세계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National User Facility’가 오늘날 국립연구소를 상징하는 정체성 중 하나다. LBNL만 해도 연구시설의 외부 이용자 수가 14,000명이 넘는다.

     

특히 현대과학의 핵심 인프라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입자가속기(particle accelerator)는 국립연구소를 대표하는 시설이다. 이걸로 물리학자들은 물질 세계의 근본을 이루는 원소를 찾고, 생명과학자들은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들여다보며, 화학자들은 찰나의 순간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관측해낸다. 의사들에게도 익숙한 장비이다. 입자가속기로 생성한 방사성 동위원소가 암세포를 괴하기 때문이다. 입자가속기의 실험 결과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바꿀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일례로 2013년 신의 입자라 불리던 힉스 입자를 발견한 것도 바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가속기였다. 국립연구소는 방사광가속기(버클리, 아르곤), 양성자가속기(로스앨러모스, 페르미, 오크리지), 중이온가속기(브룩헤이븐) 등 종류별로 세계 최고 스펙의 가속기 시설들을 운영 중이다.

LBNL의 방사광가속기 Advanced Light Source.  입자물리학이나 화학반응 같은 기초연구는 물론, 펩시콜라의 신제품 개발에도 쓰일 정도로 활용도가 높다.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국립연구소

     

LBNL은 에너지부의 17개 국립연구소 중에서도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1931년 UC 버클리에 설립된 방사선연구소(Radiation Laboratory)가 그 전신이다. 전쟁 이후에는 로스앨러모스, 오크리지, 아르곤의 실험시설과 함께 최초의 국립연구소로 지정되었다. 긴 역사만큼이나 연구역량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연구역량을 객관화해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다음의 두 가지 지표를 통해 LBNL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다.

      

우선 Nature Index다. 이 지표는 세계 최고의 학술지 중 하나인 Nature를 발간하는 Springer Nature가 발표한다. 엄선된 82개의 과학 저널에 발표된 논문들의 저자와 소속별 비중을 산정하여 순위를 매긴다. 한 마디로 ‘저명 저널에 논문을 많이 내는 세계 연구기관(대학, 정부 연구소, 기업 등) 순위’라고 할 수 있다. LBNL은 2021년 12월 기준 전체 72위, 정부 연구소 중에서는 5위에 올라 있다. 17개 국립연구소를 통틀어 가장 높은 순위다.

    

다음으로 Highly Cited Papers(피인용 세계 상위 1% 논문, HCP)다. 현대과학에서 논문의 인용 빈도는 연구 우수성의 평가 척도로 중요하게 인정받는다. 인용이 많이 된다는 것은 관련 연구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학문적 기준을 세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세계적 학술정보 DB인 Web of Science는 이러한 피인용 횟수를 산출하여 세계 상위 1% 논문들을 HCP로 분류한다. 그리고 LBNL은 이 HCP의 생산 능력에 있어서 독보적 강자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나온 2만 7천여 편의 논문 중에서 HCP가 4.58%를 차지한다. 이는 세계 정부 연구소 중 단연 1위이다. 그만큼 LBNL이 세계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LBNL은 생명과학, 컴퓨터과학, 지구·환경과학, 에너지과학, 에너지기술, 물리학 등의 분야를 연구한다. 초창기에는 물리학, 그중에서도 자연에 존재하는 기본입자의 성질과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고에너지 물리학이 대표 분야였다. 초대 소장인 어니스트 로렌스는 고에너지 물리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해 193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맨해튼 계획에도 사용된 사이클로트론은 현대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덕분에 그 최신 기술을 보유한 LBNL도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곳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고에너지 물리학 관련 연구자들이 많다. 로렌스를 필두로, 최초의 인공원소(냅투, 플루토늄)발견한 글렌 시보그·에드윈 맥밀런(1951년 노벨화학상), 반양성자를 발견한 오언 체임벌린·에밀리오 시그레(1959년 노벨물리학상), 입자 운동을 탐지하는 거품상자를 만든 도널드 글레이저(1960년 노벨물리학상), 글레이저의 거품상자를 발전시킨 루이스 알바레즈(1968년 노벨물리학상) 등이 그 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생명과학에서도 압도적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 20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제니퍼 다우드나가 그 선두주자다. 구조생물학자인 다우드나는 현대생명과학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유전자가위 분야를 개척해왔다. 유전자가위는 살아있는 세포 내의 DNA를 잘라 염기서열을 교정함으로써 난치병 치료와 동식물 개량에 혁명적 가능성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다우드나는 세균에서 유래한 유전자가위인 CRISPR-Cas9의 작동 원리를 최초로 규명해, 막스플랑크 연구협회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와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유전자가위는 이제 본격적인 활용과 파급효과가 기대되는 만큼, LBNL의 신흥 분야로서 앞으로 더욱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제니퍼 다우드나는 최근의 LBNL을 대표하는 과학자다.




국가 소유, 민간 운영의 거버넌스

     

미국의 과학기술 행정체제는 우리나라와 여러모로 다르다. 가장 단적인 예로, 정부에 과학기술 주무 부처가 없다. 대신 R&D 생태계에 분포하는 수많은 명문대학, 글로벌 기업, 민간 연구소 등이 이니셔티브를 발휘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라는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에게 많은 권한과 자원이 집중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연구비 지원, 정책과 제도 설계, 인력 양성 등 연구현장의 주요 부분을 좌우한다. 이 공룡 부처가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우리나라 R&D 생태계는 뒤죽박죽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아무 관여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 주무 부처만 없을 뿐, 여러 국가행정조직들이 부문별로 R&D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에너지, 보건의료, 항공우주 등의 분야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전문연구기관을 운영한다. 다만 이 역시 정부 주도보다는 민간에 대한 협력 및 지원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세계 자유시장경제의 총본산인 미국다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국립연구소도 이러한 독특한 R&D 시스템에 따라 운영된다. 즉 에너지부가 소유는 하지만 운영은 계약을 통해 민간이 맡는 형태(Government-Owned, Contractor-Operated, GOCO)다. 그래서 각 국립연구소들에는 별도의 민간 운영기관이 존재한다. 연구소 인근에 소재한 대학이나 주식회사가 대부분이다. 국립연구소뿐만 아니라 대학 등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국립과학재단(NSF)도 GOCO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와 달리 정부가 소유와 운영을 모두 하는 형태(Government-Owned, Government-Operated, GOGO)도 있다. 보건사회복지부 산하의 국립보건연구원(NIH), 독립행정기관인 항공우주국(NASA) 등이 그렇다.

    

LBNL은 에너지부와 위탁 계약을 체결한 UC 버클리가 운영하고 있다. 잘 알려졌듯 UC 버클리는 뛰어난 연구중심대학들이 모인 캘리포니아대학교(UC) 시스템을 대표하는 대학이다. 비록 주립대학이지만 아이비리그나 HYPSMC 등 명문사립대학들에 밀리지 않는데, 제로 각종 세계 대학 순위에서 매년 최상위권에 오르고 있다. 1931년 방사선연구소가 UC 버클리 내에 설립된 이후 두 기관은 뗄 수 없는 관계로서 함께 성장해왔다. LBNL의 최첨단 연구시설을 UC 버클리의 우수한 교수와 학생들이 활용하며 시너지를 내온 것이다. UC는 LBNL(1931년~) 외에도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ANL, 1943년~)와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LNL, 1952년~)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1991년부터 총장실(Office of the President) 직속으로 국립연구소 전담조직(UCNL)을 두어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LBNL은 공동임용제도(joint appointment)를 통해 UC 버클리의 교수들을 연구원으로 두고 있다. 이러한 이중 소속 연구원들을 joint faculty라고 하는데, LBNL의 1,700명이 넘는 연구인력 중 242명이 이에 해당(2020년 기준)한다. 이들은 LBNL과 UC 버클리의 업무를 50대 50으로 하며, 연봉도 양 기관으로부터 절반씩 받는다. LBNL에서 이들의 위상은 막스플랑크연구협회의 디렉터나 RIKEN의 주임연구원과 유사한, 연구소의 지도급 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소장인 어니스트 로렌스부터 가장 최근에 노벨상을 수상한 제니퍼 다우드나까지, 전통적으로 LBNL의 우수한 연구자는 UC 버클리 교수직을 겸해 왔다. 이는 고용계약을 한 사업체하고만 체결할 수 있고, 대학과 연구소를 관리하는 정책체계가 분리(교육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된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제도다. 그러나 연구와 교육을 하나로 병행하는 시스템은 외국에서는 거의 상식에 가깝다.

    

요컨대 LBNL은 ‘핵무기까지 만들어낸 첨단 시설을 세계 최고의 대학이 활용하고 있는 연구소’라고 할 수 있다. 시설과 인력은 현대과학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LBNL은 한 마디로 이것들이 최고 수준에서 결합한 연구소인 것이다.



     

어니스트 로렌스, 모든 것의 시작

    

1928년 어니스트 로렌스가 예일대에서 UC 버클리의 조교수로 옮겨오면서 LBNL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27세(우리나라로 치면 대학원 박사과정에 갓 들어갈 나이다)였던 그는 다방면에서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일단 동부의 아이비리그에서 발전 수준이 훨씬 낮았던 서부로 홀연히 온 것부터 평범한 선택은 아니었다. 1930년 UC 버클리의 최연소 정교수가 된 그는 이듬해 방사선연구소를 설립하고 현대물리학과 미국 과학기술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업적들을 쌓게 된다.

    

우선 최초의 입자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했다. 사이클로트론의 등장은 막 태동하던 핵과학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1919년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원자핵을 다른 원자핵으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물리학의 새 지평이 열렸다. 그때까지 물질의 궁극적 한계라고 생각되었던 원소를 인위적으로 다른 원소로 바꿀 수 있음이 처음 알려진 것이다. 다만 핵반응에 사용되는 헬륨을 자연의 방사성 원소에서만 얻어야 했기에 실험에 제약이 많았다. 이에 러더퍼드는 1927년 전 세계 물리학자들에게 고에너지 입자의 대량 공급 방법을 찾아달라고까지 요청한다.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은 이 요청에 대한 정확한 응답이었다. 자기장과 교류전압을 이용해 입자를 가속하고 원자핵에 충돌시켜, 원하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분리해내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통해 얻은 원소의 에너지는 러더퍼드의 실험에서 이용되던 자연의 방사성 원소보다도 훨씬 높았다. 로렌스는 이 업적으로 193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은 통상 학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논문을 낸 사람에게 주지만, 로렌스는 그런 논문이 없었음에도 수상했다. 그만큼 사이클로트론이 과학적으로 중요한 장치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사이클로트론은 빠르게 전 세계의 연구실로 퍼졌다. 노벨위원회 표현에 의하면 사이클로트론 실험으로 발표된 논문은 눈사태처럼 불어났다. 이는 사이클로트론이 싸고 간단하게 고에너지의 원소를 얻을 수 있는, 혁명적인 ‘혜자’ 장비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로렌스가 1931년 최초 제작한 사이클로트론은 직경 5인치(약 12cm)에 제작비는 25달러에 불과했으나, 2천 V의 전압으로 양성자를 8만 eV까지 가속시켰다. 게다가 이후의 스케일업도 매우 빨랐다. 10년도 채 되지 않아 16 MeV의 출력을 내는 60인치 대형 사이클로트론이 만들어졌다. LBNL은 이러한 사이클로트론의 원천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핵과학 연구의 신흥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LBNL 초대 소장인 어니스트 로렌스와 그가 만든 최초의 사이클로트론.



   

팀 사이언스 시대의 도래

     

사이클로트론의 등장은 과학의 연구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바로 ‘팀 사이언스(Team Science)’라는 학제 간 협동연구가 보편화된 것이다. 이전까지 과학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전통적 학과 틀 내에서 개인 또는 소규모로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양한 활용도를 가진 사이클로트론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졌다. 원자보다도 작은 세계(subatomic)를 탐구하는 사이클로트론은 순수 물리학 외에도 화학, 생물학, 공학, 의학 등에도 유용한 실험 도구가 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장비의 설계, 구축, 운영에 지식을 가진 다수의 과학자, 엔지니어, 전문가들이 하나의 팀으로서 연구하는 것이 효율적인 형태가 되었다.

     

실제로 당시 버클리는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드는 과학 연구의 세계적 핫 플레이스다. 설립 때 5명이었던 연구소 직원은 10년도 안 되어 60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초대 소장 로렌스 외에도, ‘로렌스의 아이들(Lawrence’s Boys)’로 불린 에드윈 맥밀런, 루이스 알바레즈, 글렌 시보그, 에밀리오 시그레 등의 젊은 유망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초창기 사이클로트론 개발은 물론, 이후 전개될 맨해튼 계획에도 참여하며 세계적 대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로렌스 사후 연구소 경영을 물려받아, 1950~60년대에 5개의 노벨상을 휩쓸며 LBNL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들 외에도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초대 소장이 되는 펠릭스 블로흐, 물리학자이면서 뛰어난 장비 제작자였던 도널드 쿡시 같은 유명인사들도 함께 연구했다.

    

물리학자나 화학자만 연구소의 중추였던 것은 아니었다. 팀 사이언스가 정체성이었던 만큼, 다양한 전문가들이 이 시기 LBNL을 이끌었다. 우선 기계공학자 윌리엄 브로벡은 로렌스의 머릿속에 있던 사이클로트론의 개념을 실제로 구현했다. 브로벡은 1957년까지 연구소 수석 엔지니어로 재직하면서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은 물론, 훨씬 더 진화된 베바트론에 이르기까지 LBNL의 가속기 시설을 도맡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확립한 설계 방법은 모든 가속기 건설의 표준 절차가 될 정도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어니스트 로렌스의 형이자 의사였던 존 로렌스는 사이클로트론이 생성한 방사성 동위원소를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 활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오늘날 사이클로트론은 핵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기기다. 일례로 양전자단층촬영(PET) 진단 시 반감기가 짧은 인공원소를 활용하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암세포를 진단할 수 있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로렌스의 리더십이 있었다. 로렌스는 당시 과학자로서는 드물게 경영자적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학문 간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연구소가 대학의 물리학과나 화학과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독립기관으로서 핵과학 분야를 주도하게 했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을 규합해 팀워크를 발휘하는 데에도 능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주변에는 인재들이 넘쳐났고, 그와 협력한 연구자들은 모두 큰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사회와의 소통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1930년대 캘리포니아의 성숙한 산업 조건(광산업, 통신시설, 발전시설 등)을 사이클로트론 실험에 접목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여기저기서 연구비를 조달해오는 데에도 수완을 발휘했다. 이런 로렌스에 대한 정부의 신뢰도 매우 두터웠는데, 이는 향후 그가 맨해튼 계획의 주도적 역할을 맡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맨해튼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다

    

2차 세계대전 중 만들어진 원자폭탄은 미국은 물론 LBNL의 운명도 뒤바꿔 놓았다. 엄청난 힘을 가진 핵분열을 이용해 폭탄을 만든다는 발상은 당시의 핵물리학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로 인식되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론적 가능성일 뿐이었고, 누구도 이를 당장 현실화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그저 일부 학자들이 언젠가는 실용화가 되겠지 싶은 생각으로 소규모 연구들을 진행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이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의 국책 사업으로서 입안되었다. 그 발단은 1939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보내진, 레오 실라르드가 초안을 쓰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편지(새로운 폭탄은 충분히 가능하며 독일은 이미 시작했다는 내용)라고 알려져 있다. 편지를 받은 루스벨트는 S-1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해 원자폭탄 개발의 타당성을 검토하게 했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이 과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기에, 관련 연구를 모니터링하는 수준 이상의 활동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에 먼저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던 영국이 나서서 미국을 설득했다. 영국의 원자폭탄 제조 계획인 마우드 위원회(MAUD Committee) 소속 과학자들이 미국에 그때까지의 연구자료를 넘기며 동참을 촉구한 것이다. 이 자료를 보고 가장 먼저 원자폭탄의 제조 가능성을 확신한 과학자 중 한 명이 로렌스였다. 그는 S-1 우라늄 위원회 소속으로서 동료들과 함께 원자폭탄 개발에 필요한 다섯 가지 기술을 정리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것이 1942년 6월 루스벨트의 승인을 받으면서 비로소 맨해튼 계획이 본격화되었다. 다만 보안 유지를 위해 계획의 총괄은 과학자들이 아닌 군부가 맡았다. 명칭도 미군 공병대 사령부가 있던 지역의 이름을 따서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이라고 무미건조하게 붙여졌다.

      

맨해튼 계획은 현대물리학의 거성들이 총출동한 집단연구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이 최초 제안을 하고,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연구를 총괄했다. 그리고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해럴드 유리, 어니스트 로렌스, 존 폰 노이만 등이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니까 과학 교과서에서 한 챕터씩은 너끈히 차지할만한 석학들이 모두 참여한 셈이다. 세계사를 통틀어 이 정도의 천재들이 정치적 목표를 위해 집단으로 연구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사회주의자였음에도, 애국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 계획에 적극 관여했다(다만 이들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확인한 후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0년 버클리에서 만난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 왼쪽부터 어니스트 로렌스, 아서 콤프턴, 버니바 부시, 제임스 코넌트, 칼 콤프턴, 알프레드 리 루미스.

로렌스는 폭탄의 핵심 재료가 될 우라늄-235 동위원소를 분리하고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를 제조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는 LBNL에 세계 최고의 사이클로트론 시설과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초에 S-1 우라늄 위원회는 우라늄-235 분리를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이중 로렌스는 전자기적 분리 방법을 사용했는데, 다른 두 가지에 비해 가성비는 극악이었지만 검증된 기술로서 리스크가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결국 세 가지 방법 중 유일하게 성공했는데, 이렇게 확보한 우라늄으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만들어졌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번째 폭탄에도 로렌스의 기여가 컸다. 제자들인 글렌 시보그와 에드윈 맥밀런이 발견한 플루토늄으로 ‘팻 맨’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 초기에는 버클리, 시카고, 오크리지 등에서 주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총괄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은 폭탄을 설계 및 제조할 연구소를 더 필요로 했다. 이곳의 소장으로는 오펜하이머가 선임되었다. 그는 UC 버클리의 이론물리학 교수이자 로렌스의 동료이기도 했다. 맨해튼 계획의 다른 시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연구소도 보안 유지를 위해 깡촌인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에 건설되었다. 이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각지에서 분산 수행된 연구결과들을 종합해 폭탄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전체 계획의 연구책임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 비교해 경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무엇보다 노벨상을 못 받았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맨해튼 계획이 진행됐던 주요 연구시설들.

맨해튼 계획은 3년 만에 성공했다. 13만 명의 인원과 20억 달러의 예산을 작정하고 갈아 넣은 결과였다. 그러나 아무리 천문학적인 자원을 투입했다 해도, 당대의 천재들이 만들어낸 과학 지식이 없었다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화의 시대와 역할 재정립

     

전쟁이 끝나고 군사작전으로서의 맨해튼 계획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원자력 에너지의 개발 및 관리 업무는 새로 설치된 원자력 위원회(US Atomic Energy Commission)가 맡게 되었다. 평화 시대에 원자력은 폭탄이 아닌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어야 했고, 따라서 정부는 군부가 독점하고 있던 지식과 노하우를 사회와 공유하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버클리, 시카고, 오크리지, 로스앨러모스의 기밀 연구시설들이 정부가 관리하는 민간 연구소로 재편되었다. LBNL을 비롯해 아르곤 국립연구소(ANL),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RNL),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ANL)는 이렇게 과학 연구소로 새출발하게 되었다.

     

이는 맨해튼 계획을 계기로 성립한 과학과 정부의 새로운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승리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과학기술에 국력을 집중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군사무기를 개발해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평화 시대에도 과학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이러한 노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1945년 발간된 「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보고서다. 정부의 과학연구개발실장으로서 맨해튼 계획을 주도했던 버니바 부시가 루스벨트의 요청에 따라 작성한 이 보고서는 현대 과학기술정책의 기본틀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서 부시는 평화 시대에도 과학 연구에 꾸준히 투자하여 그 결과가 산업혁신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정부가 과학 연구의 주된 투자 및 관리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전까지 과학에 대한 지원은 기업이나 민간 재단의 크고 작은 기부금에 의존했다. 이러한 재정 구조로는 맨해튼 계획 같은 대규모 과학적 성취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정부가 중장기 전략 포트폴리오에 따라 사회에 필요한 연구 프로젝트들을 운영해야 한다. 부시의 제안은 해리 트루먼 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채택되었고, 국립과학재단(NSF)과 같은 전문 연구비 지원기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무기 개발에서 중요했던 물리학과 화학 중심의 지원에서 벗어나, 국민 생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생명과학과 의학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었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한 로렌스는 연구소 경영을 새로운 정책 흐름에 맞게 재조직했다. 그는 LBNL의 비전을 빅 사이언스, 팀 사이언스로 설정하고,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대형 인프라들을 갖춰 ‘규모의 과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실제로 1946년 구축된 184인치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은 정부 지원금 17만 달러를 받아 완성될 수 있었다. 연구 못지않게 영업 능력도 뛰어났던 로렌스는 정부 관계자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여 연구기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 전환을 통해, 불과 몇 년 전 원자폭탄의 재료를 만들어냈던 사이클로트론은 인류 복지를 위한 기초연구 시설로 탈바꿈했다.

1946년 LBNL에 구축된 184인치 사이클로트론.




순수 기초지식에서 실용기술까지

     

연구소의 역할 재정립과 함께 연구분야도 확장되었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순수 기초지식부터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실용기술까지 다양한 영역을 포괄했다.

      

우선 핵의학이라는 새로운 히트상품을 런칭했다. 이는 의사 과학자 존 로렌스가 중성자 빔의 종양 파괴 효과가 X선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순수 물리학 장비인 사이클로트론으로 암이나 백혈병을 치료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로렌스는 존 로렌스를 부소장으로 발탁하고 새로 구성된 핵의학 연구실(Donner Lab.)의 운영을 맡겼다. 이 핵의학자들은 LBNL에 상대적으로 늦게 합류했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핫한 분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1950년대 자본주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늘어난 건강에 대한 관심도 한몫을 했다. 현대의학의 필수 장비인 감마카메라와 컴퓨터 단층 촬영(CT) 스캐너도 이 시기 LBNL의 연구진이 개발한 것이다.

     

또한 생화학 분야에서는 멜빈 캘빈이 1940년 발견된 방사성 동위원소 탄소-14에 대한 후속 연구(전쟁이 일어나면서 연구가 더 이어지지 못했다)를 진행했다. 반감기가 5,700년에 이르는 탄소-14는 분자의 일생을 추적하는 도구로서 최적의 조건을 가졌다. 캘빈은 로렌스의 조언에 따라 이를 식물 내부의 생화학적 과정에 적용, 물과 이산화탄소를 재료로 유기분자를 생산하는 광합성의 메커니즘을 밝혀냈다. 캘빈은 이 공로로 1961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간단해 보이지만 무려 4년간 실험을 반복한 끝에 얻은 성과였다. 오늘날 광합성은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개념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경로의 규명은 꽤 어려운 과학적 문제였던 것이다.

     

LBNL의 대표 분야인 핵과학의 새로운 발견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글렌 시보그의 핵화학 연구실(Hot Lab.)은 기존 92개의 자연 발생 원소 외에 첫 인공원소인 넵투늄(93번)과 플루토늄(94번) 등 9개의 새로운 원소와 수많은 동위원소를 발견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원소 주기율표의 적지 않은 부분은 LBNL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공로로 1951년 에드윈 맥밀런과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이어 1954년에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가속기 베바트론도 완성되었다. 에밀리오 시그레와 오언 체임벌린이 이를 이용해 반물질의 구성 요소인 반양성자를 발견하여 195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시대의 아들’로서의 과학기술

     

이렇게 영광의 시간이 이어지던 1958년, 로렌스가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7년간 LBNL을 이끈 로렌스는 연구와 경영에서 모두 만렙의 리더였다. 그의 일생을 대표하는 키워드인 사이클로트론, 팀 사이언스, 맨해튼 계획, 새로운 원소 등은 미국 과학기술사에 중요한 이정표들로 남았다. 로렌스의 이러한 업적들은 비전 제시자(Vision Provider)라는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로렌스가 젊었을 당시의 미국은 아직 세계 최강의 국력을 갖추기 이전이었다. 게다가 대공황과 전쟁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시대정신을 읽어내 과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비전으로 삼았다. 즉 눈앞의 실험과 데이터에만 갇히지 않고,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을 개발해 발전을 견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20세기 초 혁신주의 시대(Progressive Era)에 성장한 그들은 과학을 통해 사회 개조와 자본주의의 합리적 조직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로렌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다른 나라는 가지지 못한 과학적 지식을 축적했고, 이것이 미국을 패권국가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로렌스 사후에도 이러한 LBNL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았다. 연구소 경영을 물려받은 2세대 학자들이 그대로 로렌스의 방침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버클리 방사선연구소를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로 개명했다. 시대의 개척자인 로렌스를 기리면서, 미래에도 그의 철학과 비전을 계승하겠다는 의미였다.

     

로렌스의 후임은 에드윈 맥밀런이 맡았다. ‘로렌스의 아이들’의 일원이었던 그는 LBNL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1951년 노벨화학상)이기도 했다. 맥밀런이 2대 소장으로 재임한 14년간 LBNL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기존 방사선연구소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만이 내려다 보이는 현재의 부지로 이전했고, 대규모 연구시설을 새로 지었다. 맥밀런과 함께 노벨상을 받은 시보그는 같은 시기 UC 버클리 총장과 원자력 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최초의 인공원소를 발견한 영혼의 파트너들이 다시 연구소와 정부의 행정가로서 호흡을 맞춘 것이다. 그 덕분인지 LBNL은 원자력 위원회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연구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맥밀런-시보그의 재임 기간 LBNL은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정부의 투자 효과를 확실히 증명했다.

     

1970~80년대는 급격한 사회 변화의 시대로서 LBNL의 연구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일쇼크, 환경파괴, 고령화, 기후변화 등이 미국의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이에 대한 과학적 해결 역시 중요해진 것이다. 1977년에는 오일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원자력 위원회가 에너지부로 재편되었고, 이에 LBNL을 비롯한 산하 연구소들은 에너지 관련 연구개발에 더욱 주력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가의 전략적 문제로 떠오른 환경·지구과학, 생명과학 등의 분야도 LBNL이 수행하게 됐다. 4대 소장 데이빗 셜리는 정부와 연구소의 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1987년부터 진행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에 참여해 연구의 한 축을 맡았다. 또한 6대 소장 스티븐 추는 버락 오바마 정부의 에너지부 장관에 취임, LBNL에서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정부의 신재생 에너지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이는 국가의 문제들을 연구소가 해결해야 할 목표로 흡수한 결과다. 오늘날 LBNL을 포함한 국립연구소들의 명칭에 ’National’이 붙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근대철학의 태두 G. W. F. 헤겔은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로렌스 이후 LBNL의 과학자들이 실천했던 바이기도 하다. 과학도 그 시대의 아들이었던 셈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인류의 지식 지평을 넓히고 복지 수준을 높였다. 따라서 그들의 슬로건인 ‘Bringing Science Solutions to the World’는 그저 멋있어 보이려는 홍보성 레토릭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며, 출범 후 9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LBNL이라는 연구소가 존재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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