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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12. 2022

이념과 정치보다 우선하는 과학기술

이 글은 2022년 7월 13일자 대전일보에 기고한 것이다.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두세 편의 칼럼을 쓰게 되었다. 칼럼을 통해 좀 더 밀도 있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본다.


미국의 1940~60년대는 대규모 과학기술 혁신의 시대였다. 원자폭탄과 레이더 등 무기 개발, 유인 달 탐사에 연이어 성공했다. 이로써 미국은 세계 헤게모니 국가로 등극하게 된다. 이는 과학기술이 국가적 과제로서 이념이나 정치보다 우선하면서 가능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계획의 핵심은 과학자들이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필요성을 공론화했고,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개발을 총괄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는 국가를 허위의식의 산물이자 계급 지배의 도구로 본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이념을 버리고 국가를 선택한 셈이었다. 결국 이들이 만든 원자폭탄으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


전쟁이 끝나자 우주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소련이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로 한 발 앞섰고, 미국은 이를 뒤집고자 사람을 달에 보내려는 아폴로 계획을 추진했다. 그런데 계획의 핵심인 로켓기술 개발 책임자가 독일 출신의 전범이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나치 친위대의 로켓과학자로, 패전 후 그 기술을 그대로 가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사상보다 실력을 본 미국 정부는 폰 브라운에게 갓 출범한 항공우주국(NASA)의 발사체 부문을 맡겼다. 그가 만든 새턴 V 로켓은 아폴로 11호의 첫 달 착륙을 포함, 13번의 발사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아폴로 계획은 정치인들에게도 관심사였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어 찬반 여론이 갈렸기 때문이다. 계획의 시작은 존 F. 케네디였다. 뉴프런티어를 내세운 케네디에게 이것만큼 잘 어울리는 정책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대형 프로젝트라서 몇 번의 정부 임기가 더 필요했다. 결국 최초의 달 착륙은 정부가 두 번 바뀐 뒤인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 이루어졌다. 그 사이 예산 낭비를 이유로 반대 여론이 커졌고,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정권도 넘어갔다. 게다가 닉슨은 케네디와는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있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다. 아폴로 계획은 초당적 목표로 인정되었고, 과학기술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합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사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금 우리는 대선 후 새 정부의 이념에 따라 기존 인사와 정책의 변화를 겪는 중이다. ‘전 정권 지우기’ 논란도 나온다. 민주주의에서 집권세력이 바뀌면 정책 기조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분야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경제·사회정책은 이념 차이가 큰 분야다. 보수정부가 시장 자율, 재정 건전성, 개인 간 경쟁, 성장 촉진을 중시한다면, 진보정부는 시장 개입, 재정 지출, 사회의 책임, 분배 정의에 방점을 찍는다. 이는 국가 안에서도 어떤 계급을 더 대변할지에 따라 생기는 차이다. 반면 외교·안보정책처럼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거의 없는 분야도 있다. 여기서는 계급보다는 국익이라는 보편적 이해관계가 우선 고려된다. 물론 대북정책처럼 이념 갈등을 일으키는 분야도 있으나, 이는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경우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외교와 안보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며, 정치인보다는 전문가들의 영역이다.


과학기술도 외교·안보처럼 이념 차이보다는 전문성이 핵심인 분야다. 또한 국가의 공공재로서 그 효과가 국익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념과 무관하게 장기 지속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만약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가 사회주의에 충실했다면, 폰 브라운의 실력보다 사상이 부각되었다면, 공화당이 아폴로 계획을 중단했다면,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과학기술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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