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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Nov 19. 2022

뜻밖의 출판 계약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남을 위한 글, 글을 위한 글을 쓰는 일에 그만큼 이골이 났다. 이제 이런저런 주문에 맞춰 글을 납품하는 OEM 업체 노릇은 그만하고 싶어졌다. 어설프더라도 작가로서 내 사유를 온전히 표현하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유시민이 될 수 없음은 잘 안다. 하지만 남들이 작가로 인정하든 말든, 최소한 내 글 앞에서 당당해지고는 싶었다. 야구에 답내친(답답해서 내가 친다)이라는 말이 있다. 투수가 타자들의 득점 지원을 못 받고 본인의 타격으로 점수를 낼 때 쓰는 드립이다. 나도 투아웃 득점권(당연히 번트는 없다)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투수의 심정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간 많지는 않지만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썼다. 정치경제, 과학기술, 역사, 책, 드라마, 기타 뻘소리 등등. 그저 쓰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내키는 대로 썼다. 그 결과 내 브런치는 뚜렷한 콘셉트가 없는 중구난방이 되었다. 그래도 한 편을 쓰더라도 내공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글들이 서로 주제적 연관이 없다 보니 구독자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하긴 글이 노잼인 게 더 문제일 수도 있겠다). 예상 독자층을 고려하지 않고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은 읽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 가치가 있다. 처음에는 구독자가 100명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수천 명의 구독자를 가진 작가들에 비해 내 브런치는 영세하기 짝이 없다. 나도 타겟 독자층을 겨냥해 구성과 기조를 트렌디하게 바꿔야 할지 고민도 해봤다. 하지만 그럴 능력도 없거니와, 어차피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시작한 일이니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던 지난 8월 웨일북이라는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 브런치의 「사회 속의 과학 이야기」 매거진을 책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브런치를 통해 출간하는 작가들이 꽤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게 내가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내 글은 구독자도 적고 브런치 메인에도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내 이름으로 된 책을 팔자는 제안인가? 반신반의하면서 출판사 에디터를 만났다. 처음에는 회사 이름부터 영 생소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 유명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과 「90년생이 온다」를 낸 곳이었다.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동생에 의하면 인문·사회 분야의 신흥 강자라고 한다. 인문·사회라면 내 전공 분야이기도 한데, 왜 내 책장에는 이 출판사 책이 없지? 에디터의 설명을 들어보니 없을 만도 했다. 웨일북은 요즘 뜨는 쉽고 친근한 인문학을 선도하는 곳이다. 실제로 책들을 훑어보니 인문학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즘보다는 스토리텔링에, 학자보다는 일반인을 쓰는 데 장기가 있어 보였다.

     

에디터는 내 브런치의 '과학은 어떻게 인류의 삶을 바꾸는가'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글의 콘셉트를 확장해 책 한 권으로 만들자고 했다. 출간해준다면 나야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책이 팔릴까? 의외로 에디터는 팔린다고 단언했다. 인문학 열풍을 이끌었던 대중들의 지적 관심이 과학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과학을 역사, 철학, 종교, 정치 등과 접목해서 인문학적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는 책을 구상했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내 글을 읽고 연락했다는 것이다. 즉 출판사의 기획이 먼저였고, 그 프로젝트를 실현할 작업자로 내가 얻어걸린 것이었다.

     

첫 만남 이후 가제, 목차, 서문, 샘플을 만들어 에디터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시원하게 까였다. 내가 정한 가제는 「과학이 만든 사회, 사회가 만든 과학」이었다. 과학과 사회의 양방향적, 중첩적 영향 관계를 강조하는 제목이었다. 기획 의도상 이 책은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의 체계를 따라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목차를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을 교차시키며 구성했다. 1부에서는 과학적 발견이 사회 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 2부에서는 반대로 사회의 제도가 과학의 성과에 일으킨 변화 다루고자 했다. 3부에서는 1, 2부 논의를 종합해 과학의 현주소를 분석하여 실천적 결론을 도출하고자 했다. 과학사의 세기적 발견인 X선을 소재로 샘플 원고도 썼다(고생해서 쓴 게 아까워 브런치에도 올렸다).

    

하지만 에디터는 2, 3부 모두 날리자고 했다. 독자들이 관심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출판사의 의도는 1부의 문제의식을 풍부한 현실 사례로써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과학이 이끈 문명의 진보를 해석할 나만의 견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달리 말해 인터넷만 뒤져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은 아무리 많아도 별무소용이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돈 주고 책을 사서 읽는 목적은 작가의 견해에 공감하고 싶어서라는 이유에서다. 샘플로 쓴 원고도 정보 전달에 치중한 나머지, 내 장점이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첫 만남에서 에디터는 내가 웬만한 기성 작가보다 글을 잘 쓴다고 했었다. 그래서 원래 칭찬에 후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냉정하고 칼 같은 사람이었다.


결국 원점에서 콘셉트부터 다시 고민하고 있다. 출간 제의를 받을 때는 좋았다. 그러나 이후 진행은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뭐든 내 마음대로였던 브런치 글과는 확실히 다르다. 출판사 기획에 부합해야 하고, 독자들을 유혹할 매력적인 소재를 발굴해야 하며, 시중의 유사한 책들 사이에서 튈 펀치라인도 갖춰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의식, 에디터가 말한 독자와 공감을 이룰 지점일 것이다. 그게 뚜렷해야 나머지 문제들이 해결된다. 그래서 요즘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자주 떠올린다. 나는 ‘모든 것을 꿰뚫는 하나의 이치’를 지면을 통해 보여줄 수 있을까. 책의 성공 여부는 거기에 달렸다.

   

내년 하반기에는 책이 나와야 한다. 무려 계약금도 받았다. 유명 작가의 신간 기사에서나 보던 선인세를 나도 받게 된 것이다(물론 액수는 비교불가로 적다). 이전에도 글을 기고한 대가로 돈을 몇 번 받았었다. 그러나 쓰기도 전에 돈부터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명실상부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마흔이 넘어 내 이름으로 뭔가를 이룰 기회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설레고 또 감사한 일이다. 회사의 부속품으로서 10년 넘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을 해왔다. 더 늦기 전에 흔적을 남기는 일을 하고 싶다. 나를 위해 브런치를 시작했듯, 책도 다른 누구보다 나를 위해서 잘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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