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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Nov 25. 2022

한국의 과학기술 거버넌스 (2)

발전국가적 R&D 체계의 제도화: 박정희 정부 ~ 김영삼 정부

* 시리즈 이전 글

1편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개념


우리나라 근대화의 대부분 분야가 그렇듯, 과학기술도 국가 주도로 사회에 착근했다. 수십 년의 식민통치와 내전을 겪은 이후의 시대정신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일 수밖에 없었다. 과학기술 역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국민경제가 황폐화된 당시 상황에서는 국가 외에는 과학기술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할 주체가 없었다. 과학기술 연구를 이끌 엘리트 집단도 관료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요컨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국가 주도, 관료 중심적 성격은 이미 시대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의 과학기술 진흥은 선진국들에서도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특히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가와 과학기술은 불가분의 파트너십을 맺었다. 과학기술의 성과로 개발된 원자폭탄, 레이더, 페니실린 등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에 전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강대국들은 종전 후에도 과학기술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 예로 1945년 발간된 「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보고서를 들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 정부의 과학연구개발실장으로서 맨해튼 계획을 주도했던 버니바 부시가 작성한 것으로, 현대사회에서 국가-과학기술의 기본 관계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시는 평화 시대에도 과학기술에 꾸준히 투자하여 그 결과가 산업혁신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제안은 전후 미국 정부의 주요 정책 기조로 채택되었고, 국립과학재단(NSF)과 같은 전문 연구지원기관이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무기 개발에서 중요했던 물리학과 화학 중심 지원에서 벗어나, 국민 생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생명과학과 의학에 대한 투자가 늘었다.

버니바 부시의 「Science, The Endless Frontier」는 현대 국가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최초로 체계화했다.


국가-과학기술 관계의 한국적 특수성

     

다만 이러한 경향을 감안해도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에 국가가 미치는 영향은 유독 크다. 이 특수한 관계를 규정하려면 선진국의 경험과는 다른 설명 틀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비교정치경제학에서 쓰이는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개념이 유용하다. 발전국가 이론에 의하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후발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이룬 핵심 원인은 관료들이다. 즉 이 국가들에서는 엘리트 관료들이 본래 자본가들이 수행해야 할 기업가적 역할을 맡음으로써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논리다. 발전국가의 관료들은 국민경제 발전이라는 뚜렷한 목적에 따라 사회 전 분야에 ‘슈퍼 갑’으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전략적 산업정책과 해외 차관 등이 이러한 리더십을 뒷받침하는 정책 수단으로 기능했다(Amsden, 1989).

     

1960~1970년대의 박정희 정부는 발전국가의 전형적 특징들을 보인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위한 정치경제 엘리트 연합이 형성되었다(김종태, 2017). 1962년 설립된 경제기획원은 그 상징과도 같은 관료기구다. 경제기획원은 단순한 경제·재정 담당 부처를 넘어 국가발전전략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다. 이곳에 집결한 엘리트 관료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각 하위 분야들을 기획·조정했고, 사회 곳곳에 필요한 자원들을 배분했다. 1964년부터는 수출기업에 갖가지 특혜를 제공하는 등의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는 근대화라는 목표 아래 정부 조직과 사회 각 부문을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부터 동원’하는 전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김윤태, 1999). 박정희 정부에서는 이러한 동원이 전 사회적 차원에서, 기존에 없었던 정밀한 제도적 체계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R&D에 있어서도 발전국가의 면모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국가가 산업발전을 보조할 R&D 인프라를 구축하고 R&D의 방향을 진두지휘했다는 점에서 그렇다(Evans, 1995). 실제로 박정희 정부는 과학기술을 핵심 국정 과제로 제시한 최초의 정부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만 해도 국내에는 첨단 과학기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부재했다. 이는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해야 할 기업들에게는 큰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화를 계획하면서부터는 자체 기술력 확보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발전국가적 R&D 체계의 성립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당시 전무하다시피 했던 과학기술 인프라 확충에 집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한국과학원(KAIS), 대덕연구단지 등이 대표적 예다. 그때만 해도 농업국가였던 한국은 과학기술 연구소를 만들 수 있는 노하우가 없었다. 결국 베트남 전쟁에 파병해주는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미국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은 대표적 산업기술 연구소였던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를 모델로 KIST의 골격을 디자인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연구자들의 대거 영입에도 성공했다. 이로써 국내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선진기술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해외에서 인재들을 데려올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이공계 전문 대학원 KAIS를 설립하여 고급 연구인력을 육성하고자 했고, 10년도 안 돼 핵심 산업 분야에 1,400여 명의 석·박사학위자들을 배출했다. 대덕연구단지는 1970년대 생겨나기 시작한 정부출연연구소들을 한 곳에 수용할 대단위 연구·학원도시로 구상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까지 충남 대덕군에 다수의 정부출연연구소 및 기업연구소들이 입주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혁신 클러스터라고 할 수 있었다.

1972년 KIST 초기의 실장급 연구자들. 대부분이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과학자들이다.

중앙정부도 과학기술을 지원할 제도적 체계를 갖췄다. 우선 1967년 1월 과학기술진흥법이 공포되었다. 정부가 과학기술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명시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기술 관련 법령이었다. 이 법을 근거로 정부가 과학기술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여기에 국가 재정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3월에는 과학기술처가 출범했다. 본래 정부의 과학기술 업무는 경제기획원 산하의 기술관리국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기술 주무부처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독자 조직화했다.

      

다만 최초 구상은 처(處)가 아닌 경제기획원과 같은 원(院) 조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과 경제기획원은 과학기술을 진흥하려면 경제기획원처럼 집행 기능과 계획 기능을 모두 갖춘, 부총리급의 조직 위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총무처의 내부 검토를 거치면서 계획이 수정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발전 추진을 위해 경제기획원 장관을 헌법에도 없는 부총리급으로 임명한 전력이 있었다. 따라서 과학기술 분야에 또 하나의 부총리를 두면 다른 부처들과 갈등을 일으킬 위험이 다분했다. 결국 부총리 설치는 없던 일이 되고, 부(部)보다도 위상이 한 단계 낮은 처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국가적 R&D 체계의 특징을 보여주는 지표가 전체 연구개발비 중 정부와 민간 재원의 비율이다. 이는 KIST와 과학기술처 출범 직후인 1967년 86.7%와 13.3%에 달했고, 1970년대 초반까지도 약 7:3의 비율을 유지했다(과학기술처, 1987). 이후 과학기술 연구에서 정부의 역할은 꾸준히 줄어들었지만, 2020년에도 정부·공공재원은 전체 국가연구개발비의 23.2%를, 대학연구개발비의 80% 이상을 부담하고 있다(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2021).

[표] 1967-1972년 전체 연구개발비 투자 추이 (출처 : 과학기술처, 1987)

특히 KIST는 현재까지도 운영 중인 정부출연연구소의 원형이 되었다. KIST에서 한국표준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선박연구소, 한국전기연구소 등이 스핀오프하면서 정부의 재정 지원에 따라 R&D를 수행하는 연구소 모델이 확립되었다. 1970년 정부출연연구소는 국가R&D 예산의 약 59%를 차지하면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이끌었다(박희제·김은성·김종영, 2014). 물론 민간부문이 급성장하면서 오늘날에는 기업이 국가R&D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출연연구소 등 공공연구기관의 연구비 비중은 대학보다 높은 수준이다. 그만큼 박정희 정부 시대에 형성된 발전국가적 R&D 체계가 여전히 과학기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한다.



    

발전국가적 R&D 체계의 특징

    

발전국가적 R&D 체계는 한국의 과학기술에 몇 가지 특징들을 만들어냈다.


첫째로 과학기술 연구가 최고 통치자의 철학과 관료집단의 기획력에 의해 운영되도록 했다. 일례로 이 시대 널리 쓰인 ‘과학입국 기술자립’은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 철학을 응축한 표어였다. 대통령이 직접 제시한 이 화두는 사회 각 분야로 퍼져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같은 맥락에서 1973년에는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최고 통치자의 의지를 다양한 제도를 통해 현실에 퍼뜨린 것이 경제기획원과 과학기술처 같은 관료기구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과학기술 연구는 다양한 개인들의 창의성에 의해 발현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집중화된 권력의 의도에 따라 좌우되는 정치적 도구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둘째로 산업화 목표에 따른 응용·개발연구의 비중이 커졌다. 역사적으로 과학기술 연구는 자연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지식 탐구 활동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은 산업에의 기여라는 분명한 국가적 목표 아래 발전해왔다. 이에 따라 산업기술 중심의 응용·개발연구가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개발주의가 널리 퍼졌었던 1960년대에도 개도국의 국공립연구소들은 선진국 연구소들을 모방해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정부출연연구소는 기술력이 부족한 기업들이 산업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도입해 보급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박진희, 2006). 국가R&D 비용 통계가 처음 수행 단계별로 잡힌 1983년 공공연구기관의 기초연구비 비중은 약 18%에 불과했다(과학기술부·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2005). 물론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1980년대 이후부터 기초연구 비중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부출연연구소의 임무가 산업발전과 연계되면서 형성된 경로의존성에서 탈피할 수준은 아니었다. 실제로 2013년 33%까지 늘어났던 공공연구기관 기초연구비 비중은 다시 감소세를 보이며 2020년에는 23.2%로 줄었다(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2021).

    

응용·개발연구 편중은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가 연구비 배분을 매개로 대학의 과학연구를 산업기술 분야로 유도해 왔기 때문이다. 1983년만 해도 대학 연구개발비의 66%가 기초연구에 쓰였지만, 1990년대부터 급감하여 2010년대에는 37%대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박희제, 2013;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2021). 이러한 현상은 대학이 기초연구의 거점 역할을 하는 선진국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지식을 수급하는 독특한 형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초연구 지식은 해외 수입으로 대체하되, 국내에서는 응용·개발에 집중함으로써 단기적 부가가치 창출을 노리는 것이다. 송위진 외는 이러한 모델을 후발국가 특유의 기술추격체제로 설명한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지식의 원초적 발견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기술의 도입·소화·개량이 연구개발의 핵심 과정이 된다(송위진 외, 2003).

     

셋째로 연구조직과 문화의 획일성이 커졌다. 이는 연구비 공급을 정부가 주도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한정된 연구비를 두고 경쟁하는 연구집단들이 정부의 지원 기준에 맞춰 조직을 운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구분야, 수행방법, 성과창출 등에 있어서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획일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대부분 예산을 정부에 의존하는 정부출연연구소는 물론, 대학 역시 자율성을 잃고 정부의 연구지원 정책에 따라 재편되는 모습이 나타난다(박희제·김은성·김종영, 2014). 정부가 우수연구센터사업을 통해 대학에 대규모 연구개발비를 지원하자 거의 모든 이공계 대학들이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한다거나, 정부의 평가 기준에 따라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의 업적평가 기준이 거의 같은 시기에 획일화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한경희, 2004).



    

경제안정화 기조와 R&D의 변화

     

발전국가적 R&D 수행 체계는 1980년대부터 약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다양한 정치·경제적 요인과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어졌다. 대내외적으로 19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신자유주의, 민주화, 세계화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 역시 이러한 거대 담론과 함께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의 화두는 무엇보다 경제안정화였다. 이는 대외적으로 오일쇼크와 신자유주의 전환, 대내적으로는 불균형 성장 문제와 연관되었다. 한국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결과로 산업구조 전환에는 성공했다. 일례로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의 비율은 1962년 71.4%와 28.6%였으나, 1979년에는 47.7%와 52.3%로 역전되었다(한국은행, 1984). 그러나 1980년대 초반까지도 투자 대비 수익성은 저조한 수준이었다. 막대한 정부 재정을 투입하고 해외 차관까지 들여와 중화학공업 인프라를 구축했지만, 산업 특성상 투자효과가 곧바로 나타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태그플레이션의 장기화로 국제수지 역시 악화되었다. 이로써 1960년대부터 추진해온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제 개발과 성장보다는 안정과 균형이 국정과제로 떠올랐다.

중화학공업화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핵심 정책이었지만, 초창기에는 세계적 불황과 맞물리며 큰 위기를 유발하기도 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경제정책의 기조를 안정화에 두고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조정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우선 산업 전반에 만연한 정부 개입을 축소하였다. 중화학공업화로 비대화된 대기업들을 경쟁체제로 전환시켰고, 선택과 집중의 논리에 따라 산업지원의 대상을 유망 분야로 한정해 축소하였다. 시장원리도 기존보다 강화되었다. 수입자유화 시책으로 과보호된 국내시장의 경쟁력 강화를 유도했고, 공정거래제도를 도입해 담합과 불공정거래를 단속하여 시장질서를 정립하고자 했다.

     

전두환 정부의 시장 중심 개혁은 과학기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발전국가적 R&D 체계도 효율화의 논리에 따라 재편되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다수의 정부출연연구소들이 통폐합되었다. 1966년 KIST 설치 이후 꾸준히 증가한 정부출연연구소는 1980년대에는 7개 부처 산하에 19개 기관(1개 부설기관 포함)에 이르렀다. 전두환 정부는 국가R&D 규모에 비해 정부출연연구소가 지나치게 많고, 상호 역할도 중복된다는 이유로 통폐합을 결정했다. 이에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과학재단을 제외한 16개를 9개 연구소로 개편하여 과학기술처 산하로 일원화했다.

     

둘째로 국가R&D 사업이 본격 시행되었다. 1982년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시작된 특정연구개발사업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업으로 133억 원의 예산이 국가 핵심산업기술 고도화를 위해 투입되었다. 첫해에는 국가주도연구개발사업(정부 전액 부담)과 기업주도연구개발사업(정부·민간 공동 부담)으로 구성되었으나, 1983년 목적기초연구사업, 1985년 유망중소기업기술지원사업과 국제공동연구사업 등이 추가되면서 대규모화되었다. 그 결과 1986년에는 예산 규모가 500억 원에 달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여러모로 국가R&D 시스템에 전환점이 되었다. 기존 R&D는 정부출연연구소가 고정적으로 수행하는 과업이었기에 유연성이 떨어졌다. 이것이 사업 형태로 바뀌면서 R&D 기능이 다원화될 수 있었고, 대학과 기업이 새로운 국가R&D의 수행 주체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셋째로 기업부설연구소가 확대되었다. 이는 당시 세계를 덮친 장기 불황과도 관련이 깊다. 한국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 여파로 더욱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기업부설연구소 설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황에 맞선 기업들은 기존의 경영전략을 바꿔 기술 개발을 통한 제품의 고급화와 원가절약을 도모했다. 정부도 이에 발맞춰 적극적인 기술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1981년 기업부설연구소가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주관할 수 있게 된 것, 1986년 기업의 연구소 인가 기준을 완화한 것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 결과 1979년 전국 46개였던 기업부설연구소는 1986년 290개까지 늘어났다(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1987). 1986년 국제경제의 3저(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로 우리나라도 일대 호황을 맞는데, 여기에는 기업들이 선제적 R&D를 통해 기술 역량을 갖춘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민주화·세계화와 민간부문의 성장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에서도 발전국가적 R&D 체계는 꾸준히 축소되었다. 특히 민주화와 세계화의 확산으로 과학기술의 민간 주도권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는 민간의 과학기술 역량이 급성장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은 1988년 2%에서 1994년 2.75%로 증가했으며, 기업부설연구소도 1991년 1,000개를 돌파하여 1996년 2,610개로 늘어났다. 연구개발성과에서도 뚜렷한 성장세가 나타났다. 기업의 특허등록은 1995년 78,499건으로 1981년의 5,303건 대비 약 15배가 늘었다. 첫 기술수출에 성공한 1978년부터 1993년까지의 총 수출액은 4억 8,322만 달러였으나, 1995년 한 해에만 1억 1,237만 달러를 기록했다(과학기술처, 1997)

     

과학기술의 임무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발전국가 시대에는 과학기술이 성장의 수단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제는 성장 자체를 선도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다(송하중, 2017). 이에 따라 과학기술 연구는 과학기술처 소관 사업에서 벗어나 범정부적 의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시기 과학기술의 정책적 주안점은 다음의 두 가지에 집중되었다.

     

우선 국가R&D 사업이 확대 개편되었다. 기존 사업은 목표지향성을 강화하는 한편, 부처별로 신규 대형사업들이 시행되었다. 그럼으로써 보다 다양한 연구집단들에게 사업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2년 시작된 선도기술개발사업(G7 프로젝트)이다. 이 사업은 2000년대까지 과학기술 역량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산·학·연, 정부부처, 정부투자기관 등이 협동으로 R&D를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여기에는 과학기술처 이외에도 정보통신부, 통상산업부, 농림수산부 등이 참여했다. 1993년부터는 산학연 공동기술개발 컨소시엄 사업, 산업현장기술 지원사업 등이 신설되어 산업계에 대한 국가 지원이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출연연구소 개혁도 계속되었다. 전두환 정부에서는 효율화를 이유로 정부출연연구소를 통폐합한 바 있다. 그런데 노태우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전문화에 따른 새로운 연구개발 수요에 따라 다시 11개 기관(본원)과 11개 부설기관으로 확대했다. 뒤이은 김영삼 정부는 정부출연연구소의 운영 시스템을 바꾸고자 하였다. 1993년 정부출연연구소를 특성에 따라 연구기관, 교육·연구기관, 연구·규제지원기관으로 분류하여 고유기능에 따라 인력, 조직, 재원 등을 재분배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정부가 연구수요를 먼저 결정한 후 결과를 구매하는 연구과제중심 운영제도(Project Based System)를 도입했다. 다만 이는 정부출연연구소의 제도적 근간과 배치되는 면이 있어서 현장의 상당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결국 적용 대상 기관 일부를 제외하고, 기관 고유사업 신설 및 자율성 보장 등을 보완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다(박동규·안현실, 2000). KIST 출범 이후부터 정부출연연구소 개혁은 꾸준히 이루어졌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표 ] 정부출연연구소 제도 개혁 과정(출처 : 과학기술정책연구원・(주)기술과가치, 2004에서 재구성)


발전국가와 거버넌스의 사이

     

1980년대 말부터 호황기가 도래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과학기술에서 민간 기여도가 크게 늘었다. 따라서 민간부문 R&D를 주축으로 삼고 공공부문이 이를 뒷받침하자는 구상이 힘을 얻었다. 정부도 이러한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시도하였으나, 실제 결과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물론 수십 년 축적된 제도의 경로의존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발전국가적 R&D 체계를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외형적으로 민간부문에는 관여를 줄였지만, 공공부문에서는 발전국가 시대와 별반 차이 없는 규제와 감독 위주 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산업화를 거치며 거대화한 정부출연연구소의 운영이 그러했다. 국가R&D에서 민간의 역할이 커지면서 정부출연연구소에도 자율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한편으로는 자율성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인사, 예산 등을 지렛대로 삼아 연구소 운영을 정부의 관리 범위 안에 두었다(송하중, 2017). 결국 정부출연연구소 운영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는 계속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는 국가와 과학기술의 관계에 있어 과도기였다. 박정희 정부에서 형성된 발전국가적 R&D 체계, 즉 국가가 주도권을 갖고 엘리트 관료집단이 R&D를 기획·이행하는 모델은 이 시기의 다양한 모색을 거치며 거버넌스 모델로 바뀌어 갔다. 이 전환이 마무리되고 과학기술 거버넌스가 태동하는 것은 첫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인 김대중 정부부터라고 할 수 있다.


※ 참고 문헌

과학기술부·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2005), 「2004 과학기술연구개발활동조사보고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2021), 「2020 연구개발활동조사보고서」

과학기술정책연구원·(주)기술과가치(2004),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전략적 발전방안」

과학기술처(1987), 「과학기술행정 20년사」

과학기술처(1997), 「과학기술 30년사」

김윤태(1999), “발전국가의 기원과 성장: 이승만과 박정희 체제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 《사회와 역사》 제56호, 한국사회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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