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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Dec 13. 2022

한국의 과학기술 거버넌스 (3)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태동: 김대중 정부

* 시리즈 이전 글

1편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개념

2편 발전국가적 R&D 체계의 제도화: 박정희 정부 ~ 김영삼 정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정치적 변곡점이었다. 역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고, 민주화 운동의 정통성을 체제로 흡수했으며, IMF 관리체제라는 위기 상황에서 집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유례를 찾을 없는 특수한 조건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 국정철학은 이러한 배경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권력이 시장에 개입할수록 국민의 자유는 제한되고, 시장은 왜곡되며, 경쟁력은 약화된다. 따라서 시장원리에 입각한 경제운영만이 효율적이고 공정한 자원분배를 이룰 수 있다. 시장의 효율성을 갖추려면 기업 내외에서의 권력 분산을 통한 경쟁과 감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존재하는,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것이 핵심 논지다(이선 외, 1999).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박정희 정부로 상징되는 개발독재, 관치경제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0년대부터 경제성장이 정부의 비민주적 시장 통제에 의해 이루어졌고, 여기서 많은 문제점이 생겨났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경제운영도 민주적으로 해야 하며, 대기업 중심성보다는 중소기업과의 공존이 더 바람직하며, 기업 내외 이해관계자 간 견제와 균형이 필요함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1997년의 IMF 외환위기도 국가의 지나친 시장개입으로 인한 감시와 통제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 일이 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론은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1950년대 정립된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현재까지도 독일 정치의 컨센서스로 기능하고 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는 발전국가 시대에 만들어진 제도들의 개혁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예가 재정경제원을 재정경제부로 축소한 것이다. 재정경제원의 전신인 경제기획원은 산업화와 성장을 진두지휘한 발전국가의 상징적 조직이었다. 국가발전전략 수립부터 이와 연계된 경제·사회정책의 조정까지 이곳에 모인 엘리트 관료들이 주도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그 기능이 더 커져 재무부까지 합쳐진 재정경제원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끈 대장성(大蔵省)이 재정경제원의 롤모델이었다. 대장성은 국가예산의 관리·기획, 조세정책, 금융행정을 총괄하는 대형 관청이었으며, 국민경제 운용의 핵심인 재정정책의 결정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이런 막강한 권한은 그대로 유지되어 ‘성 중의 성’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거대 관료조직이 오히려 시장질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관료들의 권한이 강할수록 자의적으로 시장을 흔들거나 정경유착에 빠질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정부조직 개편에서 재정경제원을 재정경제부와 예산청으로 분리했다. 재정경제원 장관의 경제부총리 겸직도 폐지했다. 또한 금융시장의 건전성을 관리·감독하는 금융감독위원회를 신설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구현코자 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그 기본 방향은 관료가 주도하던 R&D 수행 체계를 민간의 자율적 역량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국정철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 시민사회의 정책 참여를 중시했다. 그 결과 다수의 민주화 운동가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공직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간 R&D 역량이 급성장했다는 점도 중요했다. 이에 과학기술 조직, 정책, 제도 등의 영역에서 한국식 거버넌스 모델이 본격화되었다.



     

조직: 과학기술 행정의 범정부적 위상 강화

     

정부 출범 직후 대대적인 조직개편으로 과학기술 분야도 변화를 맞았다. 전반적으로 기존 조직의 위상은 높이고, 신규 조직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과학기술이 국정에서 점하는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이는 과학기술 거버넌스가 작동할 조직적 토대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요약된다.

     

첫째로 과학기술처가 과학기술부로 승격되었다. 과학기술부는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사무국 기능과 함께 과학기술정책 및 사업 총괄, 종합조정 기능까지 갖게 되었다. 2000년 이후에는 여기에 지역 과학기술진흥과 과학기술인 복지지원 기능도 추가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주무부처를 처음 설치한 것은 박정희 정부였다. 그러나 정부부처 간 이해관계 때문에 당초 구상보다 축소된 과학기술처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직 형태는 30년 넘게 유지되었다. 그러다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자적 위상과 기능이 강화될 수 있었다.

     

둘째로 과학기술정책 최고심의기구로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출범했다. 국가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정책 심의, 투자계획 마련, 관련 사업 조정 등이 주요 기능이었다. 이에 발족 직후 ‘2025년을 향한 과학기술 장기비전’, ‘제1차 과학기술기본계획’ 등의 거시 계획들을 수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범부처 조직으로서 대규모화된 R&D 투자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업 간 조정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전체 위원회는 민관이 협업하는 형태로서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고 15명의 정부위원(장관, 국무조정실장 등)과 9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셋째로 정부출연연구소들을 연구회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미 1980년대부터 정부출연연구소의 효율화 시도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위로부터의 조직 통폐합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아래로부터의 자율과 책임을 강화하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1999년 19개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3개 연구회 산하로 편성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정부출연연구소의 문제점으로 정부의 과도한 간섭, 연구현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부족, 경쟁체제 미흡 등을 꼽았다. 이를 해결하려면 정부의 현장 개입을 우선 줄여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1999년 1월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총리실 산하의 연구회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 체제에서 총리실은 연구회를 감독·평가하고, 연구회는 소관 기관을 지도·관리하도록 했다. 이처럼 연구회가 정부와 연구현장의 중간관리기구로 기능하면서, 정부출연연구소들이 관료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정부출연연구소의 거버넌스적 관리를 위해 연구회 체제를 도입했다. 이에 총 5개 연구회(인문사회 분야 2개, 과학기술 분야 3개)가 출범했다.

    

정책: 민간의 전문성과 자율성 존중

     

김대중 정부 과학기술 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의 전문성을 적극 활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예산 편성 과정에서 이것이 두드러진다. 민간 전문가들이 다수 참여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R&D 예산 편성에 대한 심의 의견을 기획예산처에 제시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곧 결정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사전 심의 의견은 권고 사항이므로 예산 주무부처인 기획예산처가 따라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럼에도 정부 예산 편성은 관료들만이 할 수 있다는 전통적 인식에서 벗어나,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최초로 반영했다는 의의가 있다(천세봉, 2017).

     

김대중 정부에서 R&D 예산이 대폭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R&D 예산은 1997년 2조7천57억 원으로 정부 예산의 3.6%에 불과했으나, 2002년에는 4조 9,556억 원으로 늘었다(이삼열, 2021).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강도 높은 예산 절감과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국가경쟁력 강화와 직결된다는 대통령의 지론이 국민적 공감을 받았기에 예외적으로 예산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중장기 R&D 계획의 수립을 체계화하였다. 1999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채택한 ‘2025년을 향한 과학기술 발전 장기 비전’은 지식정보화, 세계화, 새로운 가치체계 등 메가트렌드 분석을 기반으로 과학기술의 장기 비전을 도출했다는 의의가 있었다. 2001년 제정한 ‘과학기술기본법’은 과학기술 진흥의 총괄 계획으로서 과학기술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도록 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6T(IT, BT, NT, ET, CT, ST) 육성 정책을 발표해 국가적 주력 분야에 대한 집중 지원을 천명하였다. 이로써 과학기술기본계획을 중심으로 분야별 R&D 계획이 연계되어 과학기술정책이 종합 패키지로서 전략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과정도 민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연구현장 및 국민들의 여론을 반영하도록 하였다.

      

벤처기업 지원도 크게 늘었다. 이는 대기업 주도 모델보다는 중소기업과의 공존 모델이 더 바람직하다는 정부의 경제관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1997년 제정한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그 근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청장이 기술력과 수익성이 우수한 기업을 ‘벤처기업’으로 인증하여 다양한 지원을 하였다. 인증을 받은 벤처기업은 코스닥 상장 심사 시 여러 등록 요건 면제를 포함, 각종 조세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9천억 원에 달하는 벤처기업 지원 자금을 마련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만큼 벤처기업 육성은 경제 및 기술진흥의 핵심 목표로 인정받았다. NHN, 엔씨소프트, 티맥스소프트 등 대표적인 기업들이 이 시기에 창업되었고, 인터넷과 이동전화 이용자도 가파르게 늘어났다(이삼열, 2021).

벤처기업 지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중소기업 중시 철학과 당시 각광받던 지식정보사회론이 만나 이루어졌다. 그러나 혁신보다는 거품만 조성하고 끝난 실패작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제도: 연구지원 사업과 법령 체계 확대

     

김대중 정부는 국가R&D 사업의 종류와 규모를 크게 확대했다. 1999년부터 시행된 창의연구사업, 국가지정연구실사업, 21세기프론티어사업 등이 그 대표적 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연구기관 중심 지원에서 벗어나, 사업책임자 중심 지원으로 사업의 초점과 방식을 전환하게 되었다(김계수·이민형, 2003). 그 결과 사업 참여 주체를 보다 다양화하고, 운영의 유연성 또한 높일 수 있었다.

    

창의연구사업은 신산업 창출의 핵심기술 확보 및 차세대 연구리더 육성을 위해 도입되었다. 이 사업은 산업기술에 치중한 기존 국가R&D 사업과 달리, 미개척 분야 기초원천연구에 집중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연구 기간과 규모에서도 파격적인 지원을 보장했다. 최장 9년 이내에 과제당 8~9억 원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연구리더 육성이라는 목표에 따라 연구책임자의 권한과 자율성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국가지정연구실사업은 IMF 외환위기로 인한 민간부문의 R&D 투자 위축에 대응하고자 시행되었다. 산·학·연에 매년 150개 내외의 국가지정연구실을 선정해 5년간 매년 3억 원을 지원했다. 창의연구사업과 마찬가지로 연구실 운영의 독창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21세기프론티어사업은 선진국 진입에 필요한 전략기술을 선택과 집중의 논리에 따라 개발하고자 시행되었다. 특히 2001년 종료되는 선도기술개발사업(G-7사업)의 후속 프로젝트로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기 사업으로 기획되었다. 연구능력과 경영능력을 함께 갖춘 사업단장의 책임에 따라 사업을 운영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업들과 차별성을 두었다.

     

과학기술 관련 법령도 재정비했다. 과학기술기본법은 과학기술이 관련 부처의 소관 업무가 아니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범정부적 과제임을 명확히 했다는 의의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다른 분야와 달리 과학기술 투자를 늘린 근거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과학기술기본법의 시행으로 R&D 정책과 계획을 범부처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김대중 정부의 다양한 제도 혁신(정부출연연구소 개편, 국가R&D 사업 확대, 벤처기업 지원 등)을 뒷받침했다. 또한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김영삼 정부가 제정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김대중 정부였다. 이 법의 후속조치로 벤처기업들이 투자를 쉽게 받도록 코스닥 시장을 개설하였으며, 세금 부담을 줄여주고자 소득세법, 조세특례제한법, 법인세법 등도 개정하였다. 1999년에는 ‘기술이전촉진법’을 제정하였다. 이로써 정부가 나서서 공공부문 기술의 민간 이전과 거래 활성화를 지원해 기술의 사회적 활용을 유도하고자 했다.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거버넌스 장치들은 오늘날에도 과학기술행정의 기본체계로서 상당 부분 작동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를 거치며 민주화와 세계화의 담론 속에서 발전국가적 요소들을 걷어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를 기점으로 거버넌스 원리에 따라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가 과학기술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장기 비전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다. 그만큼 거버넌스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 정부를 한국 과학기술 거버넌스의 태동기로 규정할 수 있다.

     

※ 참고 문헌

김계수・이민형(2003), 「국가과학기술 종합조정시스템과 연구회 운영시스템 발전방안」,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이삼열(2021), 「우리나라 과학기술행정체제 이력 분석 연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선 외(1999),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DJ노믹스의 이론적·경제사적 고찰」,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천세봉(2017), “과학기술정책 거버넌스 분석: 김대중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한국거버넌스학회보》 제24권 3호, 한국거버넌스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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