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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18. 2023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지동설과 세계관의 전환

과학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고대 이래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과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은 지금 봐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다만 이를 오늘날의 과학과 직접 연결 짓기는 어렵다. 우리가 누리는 현대 과학기술문명의 기원은 16~17세기 유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인류는 모든 것을 신 중심으로 해석하는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났다. 대신 경험적 지식과 합리적 이성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적 사유체계를 확립했다. 과학사가들은 이를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라고 한다.


과학혁명은 세계관의 전환에서 비롯되었다. 중세 말, 근대 초의 인류는 기존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했다. 그것은 ‘자기객관화’ 과정이기도 했다. 사람은 태어나고 유년기를 지나면서 나와 내 것이라는 1차원적 관점에서 탈피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3차원적으로 자신을 인식한다. 자기객관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이 뛰어날수록 사람은 철이 들고 성숙해진다. 인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세계관도 바뀌고 지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결정적 계기는 1543년에 있었다. 이 해 나온 책 한 권이 인류의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켰다.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다. 이 책은 기존의 천동설(지구중심설)에 맞서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제기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문학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중세 사회 곳곳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책 제목부터 상징적이다. 라틴어 Revolutionibus에 대응하는 영어는 Revolution이다. Revolution은 동사 Revolve에서 나왔다. 즉 원래는 ‘회전’을 의미한다. 이 책이 히트한 이후로는 여기에 ‘혁명’의 뜻이 추가되었다. 저자 코페르니쿠스의 본업은 폴란드의 성당 참사원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미사 일정을 챙기고 교회 건물을 돌보는 관리직이다. 딱 봐도 하는 업무가 많지 않을 것 같다. 남는 시간에 소일거리로 천문학을 연구했다. 그러다 기존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우선 중세인들이 우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부터 보자.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중세를 대표하는 언명을 기억할 것이다. 철학뿐만 아니라 천문학도 그랬다. 중세에는 우주를 관측이 아닌 신학적 사고의 틀 안에서 인식했다. 이를 대변한 두 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달을 경계로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눴다. 우리가 사는 지상계는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천상계에는 에테르라는 영구불변하는 제5원소만 있다. 에테르로 인해 천체들(태양, 달, 행성 등)은 천구에 매달려 지구를 중심으로 등속원운동을 한다. 여기서 천체들이 그리는 ‘원’ 모양이 중요하다. 이것은 관측 결과라기보다는 세계관의 반영이었다. 고대인들은 원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도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은 천상계를 상징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가톨릭 교리와도 잘 어울렸다. 가톨릭 세계관에서 신은 우주의 중심에 지구라는 천지를 창조한 존재다. 유한한 지상계 밖에는 영원불멸의 천상계가 있다. 지상계에서 삶을 다 한 인간은 신이 다스리는 천상계로 들어간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논리가 딱딱 맞는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다. 그래서 실제 관측 결과와는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화성이 지구와 반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역행 운동이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지구와 화성의 궤도 속도 차이로 인한 착시임을 안다. 하지만 지구를 중심으로 별들이 등속 원운동한다는 천동설 관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이가 프톨레마이오스다. 그는 수학의 천재였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가상의 원운동을 여러 개 추가해서 모순을 없앴다. 이에 따르면 각 행성은 주전원이라는 가상의 원을 돈다. 그 주전원의 중심이 다시 지구 주위를 돌면서 이심원이라는 궤적을 그린다. 그런데 지구는 이심원의 중심과 일치하지 않으며 조금 더 벗어나 있다. 따라서 지구를 도는 행성의 궤도는 무한대 기호 모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행성 운동이 일정하지 않고, 때로 지구와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복잡한 수학적 기법을 잔뜩 동원해 이 체계를 완성했다. 이 보정 작업에 사용된 천구만 80여 개에 이른다. 너무도 복잡해서 ∞모양으로 도는 행성 궤도들 때문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는 관측 결과와 부합했으며, 무엇보다 천체의 움직임을 잘 예측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1,500년 넘게 천문학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니까 중세가 암흑시대라서, 중세인들이 무지해서 천동설이 강력히 지지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천동설만큼 논리적으로 천체 운동을 설명한 이론이 그때까지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천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수학적 모델링이 합쳐지고, 교회의 신학적 권위까지 더해지면서 지배적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가상의 원운동을 동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보완했다. 그 결과 이렇게 어지러운 모양의 천동설 체계가 만들어졌다.



    

철학적, 심미적 직관으로서의 지동설

     

코페르니쿠스도 본래는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복잡성 때문에 결국 스승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철학적, 심미적 직관에 따라 문제 삼았다. 신이 창조한 우주는 간단명료해야 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우주는 신비한 힘으로 충만하고 수학적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답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는 80여 개의 원이 난무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이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의 신이 만든 우주는 이렇게 너저분하지 않아!”


코페르니쿠스 필생의 목표는 이 체계를 조화롭게 단순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맞바꾸면 많은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았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발상은 분명 상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생각도 아니었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가 이와 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즉 역사 최초의 지동설 제창자는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 아리스타르코스다. 하지만 철저한 비주류의 견해였고,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문학을 평정하면서부터는 완전히 잊혔다. 그로부터 1,700년이 지나서 코페르니쿠스가 묻혀있던 이 학설을 꺼내어 복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새로운 ‘발견’보다는 ‘선택’에 더 가까웠다.

지구(파랑), 태양(노랑), 화성(빨강). 지동설은 천동설을 훨씬 간결하게 재구성했다. 코페르니쿠스에게 이것은 철학적, 미적 당위성이 있는 시도였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훨씬 간결하고 우아해진 지동설 체계를 선보였다. 이로써 태양계는 각 행성이 조화를 이루며 질서정연하게 궤도를 돌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동원했던 80여 개의 천구는 34개로 줄어들었다. 흔히 말하는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즉 경제성 원칙에 근거한 논리적 추론의 전형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책머리에 교황 바오로 3세(Paolo III)에 대한 헌사를 썼다. 다음의 문장이 유명하다.

     

이는 한 화가가 각각 다른 모델로부터 잘 그려진 손, 발, 머리 등을 모아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나, 그것이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조각들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 결과물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통렬하면서 패기 넘치는 비판이다. 여기서 말하는 괴물은 당연히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다. 코페르니쿠스는 어떻게든 이 괴물을 무찌르고 싶었다. 마침 그는 '전사의 심장'을 가진 이였다. 그것은 1,700년 동안 아무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꾼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이러한 대담한 사고를 정밀한 논리와 데이터로 뒷받침한, 코페르니쿠스 필생의 역작이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계산한 지동설 체계와 실제 행성 운동 사이에는 오차가 존재했다. 겉보기에 복잡해도 수학적으로 완벽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대비되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도 죽을 때까지 이 문제를 고심했다. 그러나 이유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오차가 누적되자 결국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궤도 보정 장치(주전원, 이심원)를 똑같이 가져다 썼다. 그 결과 천동설과 지동설은 태양과 지구의 위치라는 근본 발상만 다를 뿐, 논리 구조는 서로 비슷해졌다.


오차는 행성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는 잘못된 전제 때문에 발생했다. 코페르니쿠스도 원이 완벽한 도형이라는 과거의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기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학문으로서의 과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험 방법론도 정립되지 않았고, 관측에 필요한 망원경도 발명되기 전이었다. 요컨대 천문학이 과학보다는 철학에 훨씬 가까웠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책에는 과학 연구서로 보기 힘든 요소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모든 것의 중심은 태양이다. 이 가장 아름다운 신전에서 사방을 비출 수 있는 이곳 말고 대체 어디에 눈부시게 빛나는 이 불빛을 둘 수 있겠는가? … 그래서 태양은 왕좌에 앉아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그의 가족, 즉 행성들을 지배한다. 

    

마치 고대의 서사시 같다. 코페르니쿠스가 고대의 세계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코페르니쿠스의 한계는 그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의 후배들이 극복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망원경을 이용해 지동설의 경험적 증거를 관측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행성 운동의 법칙을 수학으로 정립했다. 


이렇듯 코페르니쿠스는 ‘경계’를 상징하는 학자였다. 중세와 근대, 철학과 과학, 프톨레마이오스와 뉴턴의 경계에 그가 서 있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은 역사에 이런 복합적인 경계들을 만들어냈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Kuhn)이 그를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로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초판 400부 중 현재 276부가 남아있다. 그중 한 권이 2008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22억 원에 팔렸다.



    

중세의 연쇄적 균열

     

흔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성경에 반하는 내용 때문에 교회의 탄압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교회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은 출간 73년 뒤인 1616년이다. 즉 교회는 꽤 오랫동안 이 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교회는 출간 훨씬 전부터 지동설을 인지하고 있었다. 1533년 지동설 강의를 들은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t Ⅶ)와 추기경들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출간을 재촉할 정도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평생 가톨릭에 봉직한 사제로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교황에게 헌정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중세 사상체계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세의 천문학이 신학, 물리학, 화학, 의학 등과 구분이 어려울 만큼 통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일례로 천상계는 신학의 성경과 곧바로 연결되었다. 또한 점성술 및 의학에서는 항성이 인간의 기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이해되었다. 행성은 지상의 금속과 관련이 있었고, 인체는 소규모의 우주로 여겨졌다. 코페르니쿠스도 천문학자인 동시에 점성술사였으며 신학자이자 또 의사였다. 그래서 천문학이 한번 뒤집히자, 사상의 전 체계가 연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천장지제 궤자의혈(千丈之堤 潰自蟻穴), 작은 개미구멍으로 인해 높은 둑이 무너지는 모양새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는 세계관의 전환을 상징한다. 지구는 천지창조의 중심에서 우주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신이 만든 세계에서 보살핌을 받는다고 믿었던 인간들은 강제로 홀로서기를 당했다. 그리고 각성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물질 중 일부일 뿐이라고. 이로써 인간은 중세를 지배한 종교적 믿음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근대를 만든 새로운 세계관, 과학적 사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기념상. 코페르니쿠스는 쇼팽과 함께 오늘날 폴란드가 세계에 자랑하는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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