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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May 30. 2023

과학이 정치와 사회도 바꾼다

계몽주의와 과학적 사회의 설계

이탈리아의 커피 전통은 유서가 깊다. 전 세계를 석권한 스타벅스도 이탈리아에서만큼은 힘을 못 쓴다. 1990년대부터 세계에 진출한 스타벅스지만 이탈리아에는 2018년에야 첫 매장을 냈다. 그것도 이탈리아의 ‘커피 부심’을 존중하는 겸손한 전략 덕분이었다. 이슬람에서 즐기던 커피를 1615년 처음 유럽에 들여온 것이 이탈리아 상인이었다. 1884년 토리노 박람회에서는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등장했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인들의 에스프레소 사랑은 대단하다. 거의 국민 음료다. 이탈리아인들은 에스프레소에 물을 넣은 아메리카노는 커피가 아니라며 기겁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매운 신라면에 물을 잔뜩 부은 한강 라면과 비슷할 것이다.


수입 초기 커피는 이교도의 음료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가 커피 맛에 매료되어 “커피야말로 가톨릭의 음료다!”라고 선언해 버렸다. 유럽 상류층은 너도나도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원래 사교 모임에서는 와인과 맥주를 주로 마셨다. 그러니 모임을 하다 보면 다들 취해 있었다. 반면 커피는 정신을 일깨우는 각성 효과가 있어서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유럽 곳곳에 커피를 파는 곳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탈리아인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이면 돌아오는 반응. 원래 커피는 뜨겁고 진하고 빨라야 하는 거란다.

     

편지공화국, 프린키피아, 계몽주의

     

영국의 커피하우스(coffee house), 프랑스의 살롱(salon)과 카페(cafe)가 특히 유명했다. 여기에 지식인, 예술가,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니 토론이 활발해졌다. 자연법, 역학, 재산권 등 당시 핫했던 주제들이 커피와 함께 소비되었다. 토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계속했다. 이렇게 형성된 지식인 네트워크를 ‘편지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고 했다.


이 가상의 공화국은 거대한 학문 커뮤니티가 되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편지만큼 지식 교류에 유용한 도구도 없었을 것이다. 편지를 매개로 한 토론은 학술지(journal)로 발전했다. 학술지 제목에 자주 쓰는 ‘letters’의 기원도 여기에 있다. 예컨대 미국 물리학회가 발간하는 《Physical Review Letters》는 물리학의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다. 커피 회합은 과학단체 결성으로도 이어졌다. 1660년 런던 커피하우스에서 자주 만나던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존 윌킨스(John Wilkins) 등은 함께 실험하고 논문도 쓰는 연구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2년 뒤 ‘자연 지식 진흥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London for the Promotion of Natural Knowledge, 이하 왕립학회)’가 되었다. 과학 애호가였던 찰스 2세(Charles II)가 직접 학회를 인가하고 회원이 되었다. 갓 창립한 왕립학회의 명성을 높인 대스타가 바로 뉴턴이다. 뉴턴은 왕립학회를 통해 과학자로 데뷔했다. 1687년에는 왕립학회 명의로 『프린키피아』를 출간했다. 결국 학회장까지 지냈다.


『프린키피아』 편지공화국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교양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과목으로 여겨졌다. 모르면 커피하우스나 카페의 토론에 끼지도 못했다. 뉴턴이 라틴어와 기하학을 동원해 극도로 어렵게 썼는데도 그랬다. 이 책을 이해하려고 과외교사를 고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후죽순처럼 나온 해설서와 참고서도 잘 팔렸다. 『프린키피아』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교훈은 우주의 운동법칙을 알려주는 데만 있지 않았다. 인간 이성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심어주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들 중에는 새로운 사회를 꿈꿨던 반체제 세력도 있었다. 이들은 절대왕정과 교회의 지배 체제가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뭘 어떻게 바꿔야 할지 잘 몰랐다. 여기에 비전을 제시해 준 책이 『프린키피아』다. 『프린키피아』가 기술하는 세계 속에는 합당한 원인 없는 결과란 없었다. 즉 어떤 결과가 존재하려면 그에 부합하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의 권위와 왕권신수설에는 그런 원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신이 그렇다고 하셨으니 정당하다는 설명은 제대로 된 원인이 아니다. 그것은 미신이나 주술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인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부수고 혁파해야 했다.


17~18세기 이러한 생각을 공유했던 이들을 계몽주의자라고 한다. 계몽주의는 한자로 啓蒙主義, 영어로 enlightenment, 프랑스어로 lumières다. 언어는 다르지만 모두 ‘빛’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무지와 인습의 어둠을 이성의 빛으로 깨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의 힘과 진보의 필연성을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였다. 형이상학보다는 경험과 과학을 중시했고, 권위와 특권보다는 자유와 평등을 앞세웠다.

계몽주의는 단순한 사상체계가 아닌 실천적 지향을 상정하는 시대정신에 가깝다. 그래서 그 결론은 혁명으로 귀결된다.



     

뉴턴을 추종한 볼테르

     

볼테르(Voltaire)는 가장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주장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당신을 위해 싸우겠다”라는 그의 명언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사실 볼테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1906년 영국 작가 이블린 홀이 볼테르의 전기에서 쓴 문장이다. 볼테르의 인생 역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이라 자주 인용된다). 그만큼 권력과 종교의 독선에 평생 맞서 싸웠다. 재미있는 사실은 볼테르가 프랑스인이었지만 영국, 특히 뉴턴을 동경했다는 것이다. 이는 젊은 시절 정치적 이유로 영국에 망명했던 경험과 연관된다. 젊은 볼테르의 눈에 비친 영국은 자유, 관용, 정의가 꽃을 피운 이성의 나라였다. 왕의 목을 친 국민의 대표들이 통치하고, 국민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며, 종교나 사상을 이유로 박해받지도 않았다.


영국에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볼테르가 주목한 것은 뉴턴역학이었다. 물론 그는 『프린키피아』를 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강력한 시대정신은 감지했다. 뉴턴역학의 핵심은 우주가 하나의 원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이것이 정치와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영국에서 뉴턴역학, 종교의 자유, 입헌정치, 자유주의는 서로 연결된 체계로 공존했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뉴턴을 열심히 알렸다. 특히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근거로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데카르트는 우주에 가득한 에테르라는 신비한 물질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켜서 행성이 회전한다고 했다. 이론 행성과 혜성의 운동을 동시에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를 평정한 데카르트의 학문적 권위는 대단했다. 볼테르는 영국인 뉴턴의 편에 서서 프랑스인 데카르트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데카르트의 체계는 이후 설명이 추가되면서 바뀌어 이 현상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듯 인식되었다. 누구나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만큼 간단했기에 더 진실처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철학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너무 쉽게 이해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핵인싸 기질이 다분한 오지라퍼였다. 아마 그 시절 SNS가 있었다면 엄청난 팔로워 수를 자랑하는 인플루언서였을 것이다. 이른바 계몽주의자 중에 그와 연결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볼테르는 파리 국립극장 앞 카페 프로코프(Procope)에서 하루에 4~50잔의 커피를 마시면서(그러고도 84세까지 살았다) 후일 프랑스대혁명의 아이콘이 되는 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러면서 반체제적 메시지를 담은 무신론, 관용론, 사회계약론을 퍼뜨렸다. 프랑스 왕실이 봤을 때는 볼테르야말로 혁명을 배후에서 조종한 최종 보스 중 하나였던 셈이다.

볼테르의 단골 카페 프로코프는 아직도 영업 중이다. 매장에 볼테르의 책상과 흉상도 전시해두었다.



    

영국과 미국의 시민혁명

     

뉴턴의 고향 영국은 계몽주의의 메카이기도했다. 특히 영국 시민혁명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과 그 이후의 개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로크는 경험주의 철학의 대가이자 뉴턴보다 10살 많은 왕립학회의 선배였다. 그러나 뉴턴을 수학으로 새로운 진보를 이끈 비교 불가한 석학으로 치켜세웠다. 로크는 국가 권력의 원천에는 개인들이 맺은 계약이 존재한다는 사회계약론을 주창했다. 이는 사회의 문제를 올바로 판단하는 이성적 개인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이성에 기초한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는 개인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이것이 오늘날 자유주의 국가의 원형이 된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도 공리주의를 체계화하여 자유주의의 한 축을 쌓아 올렸다. 흔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칙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공리라는 한자어를 공공의 이익(公利)으로 오인하면서, 이 원칙을 집단주의적으로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공리주의는 오히려 개인주의를 극대화한다. 공리(功利)가 개인의 효용(utility)을 뜻하기 때문이다. 뉴턴주의자였던 벤담은 철학에도 『프린키피아』의 보편 법칙을 적용하고자 했다. 그것은 고통과 쾌락이다. 우주에 만유인력이 작용하듯 인간은 쾌락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 따라서 개인 행복의 총합을 극대화하도록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벤담에 의하면 이 행복의 총량 산출에는 신분의 차이가 없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말고 행복 지수가 더 높아지도록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벤담의 공리주의는 민주주의와 통한다. 벤담은 철학계의 뉴턴답게 행복의 정도를 수학으로 산출하는 계산법까지 만들었다. 물론 인간의 행복을 그렇게 수식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가는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의 권위가 여전히 높았던 당시에 개인의 효용을 중시하는 학문적 시도는 파격적이었다. 그때까지도 개인은 지고의 가치를 위해 욕심을 억눌러야 한다는 도덕관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벤담은 이렇게 비판했다.

     

수많은 인간들의 감정을 줄곧 금욕주의 원칙으로 물들인 학설은 위의 두 원천에서 흘러나왔다 … 철학적 차원에서 흘러나온 학설은 교양 있는 사람들의 고상한 감정에 더욱 적합했다 … 이에 반해 미신적 원천에서 흘러나온 학설은 지식을 넓히지 못하여 지성이 한정되고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는 비참한 상태의 우매한 사람들에게 더욱 적합했다.

    

요컨대 금욕주의는 철학적 위선이거나 종교적 미신이라는 것이다. 벤담은 인간 본연의 쾌락과 행복을 철학의 핵심 문제로 다루었다. 그때까지 철학은 인간의 본능을 사유로써 통제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반면 공리주의자들은 개인의 행복과 효용을 철학적으로 긍정하고, 나아가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까지 파악했다. 이 점에서 이기심을 문명사회의 정당한 요소로 본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와도 궤를 같이했다. 이러한 공명은 자본주의 발전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뉴턴을 계승한 계몽주의는 맹위를 떨쳤다. 1776년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을 알린 독립선언서에는 그때까지 나온 계몽주의의 성과들이 총망라되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이를 기초한 핵심 인물이다. 본업은 변호사였지만 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특히 『프린키피아』를 비롯한 뉴턴의 저작들에 심취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립선언서 기술에 『프린키피아』를 참조했다. 『프린키피아』는 세 개의 법칙을 공리(axiom)로 제시하여 자연의 운동을 연역적으로 설명해 낸다. 공리는 증명하지 않아도 참으로 인정되는 명제다. 독립선언서의 두 번째 단락, 즉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로 시작하는 부분이 이와 같은 논리 구조로 진행된다. 이로써 제퍼슨은 식민지의 독립이라는 급진적 결론이 수학의 연역법처럼 불가피한 귀결로 보이고자 했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음모론에 대한 내용인데... 허무맹랑한 음모론보다 그 논리구조를 과학의 원리와 비교해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과학적 사유의 방법

     

과학혁명, 편지공화국, 계몽주의, 시민혁명은 뉴턴에서 촉발된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뉴턴의 후예를 자처한 로크, 볼테르, 벤담, 제퍼슨은 요즘으로 치면 문과생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과학과 철학은 다른 학문이 아니었다. 과학도 자기 전공의 일부로 여겨 공부하고 연구했다. 물론 이들의 과학 지식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볼테르는 15년 동안 뉴턴을 공부하고 번역했지만 『프린키피아』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었다.


다만 자연보다는 인간, 과학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했다. 계몽주의자들이 과학에 열광한 이유는 어떠한 권위나 독단 없이 합리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그 ‘방법’에 있었다. 이러한 과학적 방법, 과학적 사유는 그들이 설계했던 사회에 꼭 필요한 핵심 원리였다. 근대세계를 만든 청사진에는 이렇게 과학의 지분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이에 대한 이해는 문과와 이과처럼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 계몽주의는 문과의 세계사에, 뉴턴은 이과의 물리학에 갇혀서 서로 다른 지식으로 기능한다. 어디서 접근하든 반쪽짜리 이해에 머무른다. 인문학과 과학의 통섭을 지식의 확장보다는 시원으로의 회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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