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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18. 2023

한국 R&B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나얼(2005), 「Back to the Soul Flight」

* 이 글은 @일상다반사 작가님의 2023년 7월 7일 글 ‘<한번만 더> 한번만 더 듣고 싶다’에서 영감을 얻어 쓴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나얼의 「Back to the Soul Flight」 앨범은 의외였다. 두 가지 점에서 그랬던 듯하다.

      

첫째는 데뷔앨범을 리메이크곡으로만 냈다는 것. 가요사에서 이런 전례가 있었던가? 본래 리메이크는 잘해봐야 본전인 작업이다. 일단 원곡의 아우라를 뛰어넘기가 매우 힘들다. 원곡이 가요사의 빛나는 한 자리를 차지하는 명곡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원곡의 스타일을 따라만 해서는 리메이크의 의미가 없어진다. 이 모순적 상황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해지는 게 대다수 리메이크곡의 운명이다. 그런데 무려 데뷔작을 리메이크로 낸다고? 물론 나얼은 이미 앤썸 – 브라운아이즈 – 브라운아이드소울로 이어지는 화려한 커리어를 찍었다. 보통의 신인 가수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렇다 해도 솔로 데뷔의 의미는 남다를 텐데, 그걸 그냥 전곡 리메이크로 쌉발라 버렸다. 패기 한번 쩐다. 

    

둘째는 리메이크를 한 원곡들의 다양성. 트랙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좋게 말하면 스펙트럼이 넓고, 나쁘게 말하면 무맥락 무근본이다. 누가 뭐래도 나얼은 한국 R&B의 최정상급 보컬리스트다. 그런데 이 앨범의 원곡들을 보면 퓨전재즈(그대 떠난 뒤), 발라드(귀로, 한번만 더), 보사노바(우울한 편지), 포크록(언젠가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Sad Cafe), 기타 족보 없는 그냥 팝(호랑나비) 등으로 구성된다. 이게 대체 R&B랑 무슨 상관인지. 이 노래들을 나얼이 부르는 모습이 상상조차 안 된다. 설마 호랑나비 춤까지 추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역시 범인이 천재의 심모원려를 이해할 수는 없는 거였다. 이 앨범은 일단 물음표 두 개 박고 듣기 시작하지만, 듣다 보면 어느새 느낌표 여러 개로 바뀐다. 1970~80년대 흑인음악이라는 공통의 지반 위에서 원곡들의 개성을 고스란히 표현해냈다. 앨범을 관통하는 나얼의 절륜한 가창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고. 내가 이 앨범에서 느끼는 지배적인 정서는 ‘신기함’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R&B와 안 어울리는 곡들에 비트감을 삽입하고 그루브를 불어넣는지. 더욱 놀라운 것은 어쿠스틱 악기들만 써서 그 느낌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원래 R&B나 소울이라고 하면 드럼머신과 신디사이저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전자음이 연상된다. 그런데 이 앨범의 편곡은 정확히 그 대척점으로 간다. 이래저래 신기한 앨범이다.

     

뭐 하나 버릴 곡이 없지만, 그중 원탑은 4번 트랙 ‘우울한 편지’다. 유재하의 원곡으로 유명하고, 영화 <살인의 추억> 속 범인 테마곡으로 더 유명한 곡이다. 감히 주장컨대, 원곡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보사노바 리듬과 코드로 전개되는 원곡에 나얼의 소울풀한 목소리와 풍성한 편곡이 더해졌다. 원곡은 보사노바의 맛만 몇 숟갈 보여주는 수준이다. 그런데 나얼 버전은 깊게 우려낸 보사노바 국물을 한 사발 들이켜는 느낌이다. 물론 1980년대에 이런 스타일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유재하가 엄청난 선구자임은 분명하다. 그건 나얼이 아니라 Bruno Mars가 이 곡을 리메이크했대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곡 자체의 완성도만 보자면 나얼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뭐, 그래봤자 대세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음알못 팬의 개인적 평가일 뿐이지만.

 

가요에서 R&B가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90년대 중후반일 것이다. 솔리드와 박정현이 선봉이었다고 보면 대충 맞지 않을까. 이들은 혀에 버터를 바른 듯한 본고장 R&B를 직수입해온 공로가 크다. 그런데 한계도 있었다. R&B의 의미를 당시 유행하던 컨템퍼러리 R&B, 즉 Babyface나 Jimmy Jam & Terry Lewis 류의 스타일로만 한정시켜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은 R&B라고 하면, ‘느린 템포에 보컬의 꺾기와 바이브레이션이 과잉 표현된 팝발라드’ 정도로 인식하게 됐다.

     

이런 관념을 깨준 것이 그 뒤에 등장하는 나얼, 휘성 같은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나얼 R&B의 본류는 Earth, Wind & Fire, Stevie Wonder, Quincy Jones 같은 1970~80년대 흑인음악에 맞닿는다. 이들의 음악에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강렬한 비트와 그루브가 느껴진다. R&B의 풀네임이 ‘Rhythm’ & Blues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겠나. 그래서 나얼을 한국 최고의 R&B 보컬리스트로 꼽는 것일 테다. 나얼의 최고작인 이 앨범도 마찬가지다. 한국 문학의 슈퍼스타인 소설가 김훈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고 싶다. 이 앨범은 “오랫동안 반복의 늪 속을 부유하고 있는 한국 R&B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었다고.



     

p.s. 이 명반의 프로듀서를 언급 안  수 없다. 예전에 한창 들을 때는 나얼의 셀프 프로듀싱 앨범인지 알았다. 그런데 글을 준비하면서 다시 찾아보니, 프로듀서는 돈 스파이크였다. 이 앨범의 모든 편곡이 그의 작품이었다. 마약 때문에 물의 일으킨 그분 맞다. 이분도 뭔가 악마의 재능 계열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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