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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ug 13. 2023

입자물리학과 냉전이 연결한 세계

인터넷과 정보혁명의 기원

2012년 런던 올림픽. 역대 올림픽 개막식 중 최고로 꼽힌다. 영국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뽐냈기 때문이다. 특히 팝음악과 문화예술에 있어서 원조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보통 올림픽 개막식은 그 나라의 특수성을 자랑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우리 이런 것도 있다!”라는 메시지가 주가 된다. 그런데 런던 올림픽은 역으로 보편성을 강조했다. “너희 이거 다 알지?” 이런 느낌의 메시지였다. 조앤 K. 롤링(Joanne K. Rowling), 콜드플레이(Coldplay), 아델(Adele),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로 이어지는 초호화 라인업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화려한 면면 사이로 다소 생소한 얼굴이 등장했다.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라는 과학자다. 영국 출신 과학자라면 뉴턴, 패러데이, 맥스웰 등등 차고 넘친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사람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인류에 미친 영향이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버너스리는 인터넷의 기본 형식인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의 발명자다. 단순히 발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 위대한 발명품을 무료로 전 세계에 풀었다. 그래서 개막식에서 그가 등장한 쇼의 주제가 ‘This is for Everyone’이었다.

월드와이드웹의 발명자 팀 버너스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런던 올림픽 개막식 무대에 섰다.

 


    

입자물리학 실험과 소통의 문제

     

월드와이드웹은 의외의 장소에서 탄생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같은 IT 기업이 아니다. 입자물리학 연구소, 그것도 실험 하나에 수천 명이 참여하는 거대 시설이 고향이다. 바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다.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에 걸쳐 있는 이곳에는 둘레 27㎞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 LHC가 있다.

 

CERN의 과학자들은 이걸로 물질의 근원을 이루는 기본입자들을 충돌시키는 일을 한다. 이러한 실험의 목표 중 하나는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다. 원래 물리학의 최소 단위인 물질과 최대 단위인 우주는 오랫동안 별개의 질문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빅뱅을 알게 되면서 이 질문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37억 년 전 아주 작고 뜨거운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우주를 채우는 물질이 이때 만들어졌다. 우선 빅뱅 직후 쿼크, 전자 등의 기본입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우주의 온도가 낮아지면서 양성자와 중성자, 헬륨 원자핵, 원자가 만들어졌다. 다시 원자들이 중력에 의해 합쳐져 별과 은하가 탄생했다. 이러한 이유로 기본입자를 쪼개면 우주의 기원을 추적할 단서를 찾을 수 있다.

 

CERN의 LHC를 비롯한 많은 입자가속기는 원형이다. 실험이 시작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입자들은 이 크고 둥근 관을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질주한다. 그러다 서로 충돌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는데, 과학자들은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한다. 이를 돕는 장치가 가속기 곳곳에 설치된 검출기다. 과학자들은 마치 잠복 수사하는 형사들처럼 팀을 이루어 검출기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입자 충돌 순간에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분석한다. 아주 미세하더라도 뭔가 새로운 반응이 나오면, 과학 교과서가 바뀌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화학 시간에 배우는 원소 주기율표다. 주기율표에는 118개의 원소가 올라 있다. 이중 자연에서 발견된 것은 92번 우라늄까지다. 93번 이상 원소는 가속기 실험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


LHC 정도의 대형 가속기는 검출기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투입 인력만 몇백 명에 이른다. 그래서 입자가속기로 실험한 논문은 저자도 엄청나게 많다. LHC의 명성을 알린, 힉스 입자 발견에 대한 <Physical Review Letters>의 2012년 논문 저자는 무려 5,154명이었다. 문자 그대로 1개 사단 수준이다. 논문 33페이지 중 24페이지를 저자들 이름이 차지했다. 이러한 이유로 입자물리학 실험에서는 상호 소통이 중요하다. 많으면 몇천 명에 이르는 인력이 실험 데이터를 정확히 분석하고 의견을 신속히 공유해야 한다.

입자물리학 실험은 많으면 수천 명에 이르는 연구인력이 투입되므로 상호 소통이 중요하다.

버너스리가 고민했던 문제도 이것이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1980년부터 CERN의 소프트웨어 컨설턴트로 일했다. 입사 후 첫 임무가 대형 입자물리학 실험을 지원할 정보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버너스리는 연구소 곳곳의 컴퓨터들이 거미줄(web)처럼 얽혀 실험 참여자들이 쉽고 빠르게 정보를 얻는 체계를 구상했다. 즉 오늘날 인터넷이 작동하는 방식의 원형을 제시한 것이다. 버너스리는 이 시스템에 인콰이어(Enquire)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의’라는 뜻은 입자물리학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에 썩 잘 어울렸다. 유럽 국가들이 공동 운영하는 CERN에는 많은 과학자, 엔지니어, 직원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이 남기는 논문, 데이터, 실험기록, 매뉴얼, 메모 등도 엄청났다. 그런데 CERN은 워낙 사람들이 자주 바뀌는 조직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료들이 없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인콰이어는 이러한 연구자료를 조직화하는 동시에 효과적 검색을 가능케 했다.



     

월드와이드웹 프로젝트의 성공

     

인콰이어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버너스리는 더 발전된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네트워크화로 요약된다. ‘하이퍼’는 ‘과도한, 초과된’을 뜻하는 접두사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는 초월문서, 즉 문서를 뛰어넘은 문서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비순차성, 비선형성이다. 문서들이 중간에 머무는 단계 없이 직진으로 연결된다. 반면 전통 텍스트를 대표하는 책은 철저히 순차적이다. 어떤 지점에 도달하려면 처음과 그 사이의 단계(페이지)들을 거쳐야 한다. CERN의 문서 시스템도 이런 방식, 즉 순차적인 트리 구조(컴퓨터의 폴더 구조와 같은)를 따랐다. 따라서 이 시스템에서 문서 간 이동은 상위 폴더로 올라갔다가 다시 하위 폴더로 내려오는 등의 번거로움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버너스리는 새로운 시스템의 제안서에서 이 계층 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의 거미줄 시스템의 핵심은 보편성이라는 논지를 폈다. 버너스리는 이런 의미를 담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월드와이드웹이라고 명명했다. 이름에서 보듯 전 세계의 컴퓨터를 정보의 그물망으로 엮는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버너스리는 하이퍼텍스트를 기본 형식으로 채택함으로써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에 프로젝트의 각 구성 요소들에 하이퍼텍스트의 약자 ‘ht’를 붙이기로 했다. 인터넷에 쓰이는 http, html 등이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팀 버너스리가 CERN에 제출한 월드와이드웹 프로젝트 제안서(위)와 초기의 웹페이지(아래)

월드와이드웹 제안서는 당장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에 관심이 지대했던 연구원 로베르 카요(Robert Cailliau)의 눈에 띄어 뒤늦게나마 인력과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원래 버너스리는 이 프로젝트를 민간 기업과 함께 추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안을 받아들이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결국 버너스리는 자신의 컴퓨터에 웹 코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착수 두 달 만에 웹 클라이언트와 서버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턴 연구원이었던 니콜라 펠로(Nicola Pellow)의 도움으로 최초의 웹 브라우저도 만들었다. 1990년 크리스마스에 버너스리와 카요는 이 브라우저로 자신들이 개설한 최초의 웹 사이트(http://info.cern.ch)에 접속했다. 월드와이드웹이 만천하에 위용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월드와이드웹의 최대 강점은 보편성과 접근성에 있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컴퓨터 간 호환은 어려운 문제였다. 사용하는 언어와 운영체제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윈도우, 도스, 리눅스가 모두 쓰였다. 그런데 월드와이드웹은 일단 웹상에 업로드된 자료라면 누구라도(어떤 컴퓨터를 쓰든) 접근할 수 있다는 원리에 기초했다. 그 경로는 복잡한 설명이나 매뉴얼이 아닌 하이퍼링크라는 간단한 형태로 주어졌다. 이것은 버너스리와 카요가 그토록 강조한 하이퍼텍스트의 핵심 원리이기도 했다. 특히 버너스리가 1993년 CERN으로부터 소유권을 양도받아 누구나 로열티 없이 서버와 브라우저를 제작 및 판매할 수 있도록 한 조치는 월드와이드웹 확산에 불을 지폈다. 이를 계기로 넷스케이프, 익스플로러와 같은 브라우저들이 개발되었고, 그만큼 일반인들의 접근성도 높아졌다.



     

냉전과 아파넷 개발

     

오늘날 월드와이드웹은 거의 인터넷 그 자체로 인식된다. 이는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전 세계에 존재하는 컴퓨터 네트워크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다. 월드와이드웹은 이 방대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공유되는 하이퍼텍스트들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작동하려면 다양한 네트워크들을 표준화하는 프로토콜(통신규약)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서로 데이터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터넷에서 이 역할을 하는 것이 TCP(Transmission Control Protocol)/IP(Internet Protocol)다. 요컨대 인터넷은 TCP/IP를 따르는 컴퓨터 네트워크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원형을 확립한 것이 바로 아파넷(ARPAnet)이었다.


아파넷의 기원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국방부 산하의 고등연구계획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ARPA)이 주도해서 만들었다. 1958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푸트니크 충격에 대응해 두 개의 조직을 설치한 바 있다. 하나는 항공 및 우주 부문의 NASA고, 다른 하나는 군사 부문의 ARPA다. NASA가 소련 우주 계획에 맞대응했다면, ARPA는 국방에 필요한 장기·기반기술을 축적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기존 질서를 재편하는 와해성 기술, 성공 확률은 낮지만 효과는 큰 고위험 기술에 집중했다.


ARPA는 보통의 군사 조직과 다르게 유연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자체 연구소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특채로 영입한 전문가들이 프로젝트 매니저(PM)로서 그때그때 필요한 기술을 외부에 위탁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는 군과 민간의 경계를 넘어서 언제 어디서라도 최고의 기술을 흡수하기 위한 방식이었다. 조직의 핵심인 PM에게도 직업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쁘게 보면 단기간에 최대 역량을 뽑아내고 다른 곳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ARPA의 높은 위상과 의사결정의 전권을 보장하는 운영 때문에 최고의 인재들이 꾸준히 모였다. 작가 마이클 벨피오어(Michael Belfiore)는 이렇게 철저히 성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ARPA를 ‘미친 과학자들의 부서(The Department of Mad Scientists)’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 미쳤다는 표현은 좋은 뜻으로 쓴 것이다. 실제로 현대사회를 뒤바꾼 혁신적 기술들이 이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GPS, 자율주행 자동차, 음성인식기술, 스텔스기, 수술용 로봇 등 적용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ARPA 내부 서버들을 연결한 아파넷(ARPAnet)도 그중 하나였다. 1960년대 냉전의 격화로 중요하게 관리되어야 할 군사정보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럼 소련과 핵전쟁이 일어나 그간 축적한 정보들이 파괴되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고민이 대두되었다. ARPA는 서버들을 4개 대학으로 분산하되,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정보를 교환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를 위한 내부 연구를 해보니 기존의 회선 연결보다 패킷 교환 방식이 안정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패킷(packet)은 우편 용어로 소포 꾸러미라는 의미다. 이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분할이다. 기존 회선 연결은 선이 끊어지면 데이터도 다 날아간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패킷 교환은 덩어리진 데이터를 분할하므로 시간을 나눠 전송할 수 있으며, 중간에 유실된 부분은 다시 보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핵공격을 당해도 기존보다 리스크를 훨씬 줄일 수 있었다.

아파넷은 1969년 서부 4개 대학에 설치되었으나, 갈수록 수요가 높아져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로런스 로버츠(Lawrence Roberts)를 비롯한 4명의 과학자가 이러한 방식에 기초한 아파넷을 완성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빈트 서프(Vint Cerf)가 패킷 교환에 적합한 프로토콜로서 TCP/IP를 도입했다. 이러한 공로로 로버츠와 서프는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서프는 구글의 부사장으로서 현재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게 아파넷이 고도화되면서 대학과 기업들도 이것이 학문연구와 제품 개발에 유용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ARPA에 너도나도 참여를 요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결국 국방부는 아파넷을 민간에 개방해 버렸다. 이로써 1990년대 인터넷이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 촉발한 혁명

    

이렇듯 인터넷은 입자물리학과 국방이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출발한 기술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영국 혈통과 아파넷이라는 미국 혈통이 만나 탄생한 혼혈인 셈이다. 요즘 유행하는 융합기술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초창기 인터넷은 특정한 기술적 수요에 의해 탄생했으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현대인의 생활양식까지 바꾸게 된다. 흔히 정보혁명, 또는 3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사회적 현상이다. 가장 직접적인 변화로는 인간이 정보를 얻는 방식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문서와 문서를 직접 연결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에서 기인한 바 크다. 대표적 예가 구글, 네이버와 같은 검색 엔진이다. 검색 엔진은 사람들이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간 인간은 책, 신문, 텔레비전 등 전통적 매체들이 주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보에 불만이 있다 한들 그 의사를 표출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검색 엔진으로 대변되는 하이퍼텍스트 원리가 도입되면서, 필요한 정보를 직접 찾아 나서는 능동적인 소비자가 되었다. 정보의 획득 과정 역시 대단히 간편하고 효율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의미를 알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이걸 책으로 익힌다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일단 근대철학, 17세기 유럽사, 데카르트 등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들은 중세 말에서 30년 전쟁 이후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철학 원리가 성립한 이론적 맥락을 소개할 것이다. 데카르트를 다룬 책은 그 개인의 생애를 주로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이 책들만으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의미만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설령 안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목표 지점까지 순차적으로 가는 과정에서 원하지 않는 지식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 엔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구글이나 네이버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쳐서 나오는 결과물 중에 적당한 것을 골라서 그것만 읽으면 된다. 어떤 방황도 없이 필요한 부분만 정확히 얻을 수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 인터넷이 혁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혁명은 무엇보다 정치경제적 변화를 수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점에서 보면 인터넷도 틀림없는 혁명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다. 인터넷은 정보기술 기반의 거대한 신산업을 창출했다. 만약 인터넷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구글, 애플, 아마존, 네이버, 카카오 같은 기업들은 없었거나 지금과 모습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당연히 이 기업들이 생산하는 부가가치와 일자리 규모 역시 비교도 안 되게 줄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이유다.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현대국가는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존 정치인들은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만 걱정하면 되었다. 선거 외에는 대중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의견을 표출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물리적인 세 과시가 중요해서 자본과 인력이 풍부한 주류 정치인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로 선거 이외의 정치적 공간이 확대되었고, 이는 참여민주주의와 풀뿌리민주주의가 각광받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비주류 후보라도 인터넷에서의 조직과 선전 활동을 잘만 활용하면 충분히 당선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한국의 16대 대통령 노무현과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대표적 성공 사례일 것이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비주류의 약점을 딛고 당선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인터넷을 3차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꼽을 만하다. 산업혁명은 인류 문명과 생활양식의 극적인 변화를 포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개념이다. 인터넷의 기원을 1969년의 아파넷으로 본다면, 3차 산업혁명도 벌써 50년이 넘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혁명의 기세는 줄지 않는 모양새다. 초창기 PC가 주도했던 인터넷의 영향력은 이제 모바일과 스마트폰이 넘겨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앞으로는 사물인터넷(IoT)이 대세가 될 것이고, 이를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으로 예상하는 학자들도 많다. 인터넷의 전성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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