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Aug 05. 2023

과학에서도 공산주의를 이겨라

아폴로 계획과 우주 경쟁

모든 것의 시작은 지름 58㎝의 둥근 쇳덩어리였다. 1957년 10월 4일, 로켓에 실린 이 쇳덩어리는 엔진에서 불을 내뿜으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우주 공간으로 진입해 메시지를 보냈다. “삐... 삐... ”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우주 경쟁의 개막을 알리는 서곡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이었다.


미국은 왜 그리 충격을 받았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자존심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미국인들은 미국이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했다. 정치・경제적으로는 물론 과학기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했다. 최초로 원자폭탄을 개발해 전쟁을 끝냈고,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도 모두 미국으로 건너왔으니. 반면 소련은 아직 공업화가 더뎠다. 게다가 그들의 원자폭탄도 스파이들이 미국의 기술을 훔쳐서 완성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공포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준전시 상태였다. 언제 무력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약 위성을 쏘아 올린 로켓에 원자폭탄을 달아 미국 본토로 발사한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발사 준비 중인 스푸트니크 1호. 지금 보면 볼품없지만, 바로 저 물건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련은 다음 달 스푸트니크 2호에 ‘라이카’라는 개를 태워 보냈다. 그러니까 우주여행을 한 최초의 생명체였다. 물론 미국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1957년 12월 부랴부랴 뱅가드 위성을 발사했다. 다만 발사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폭발해버렸을 뿐이다. 더욱 망신인 것은, 이 장면이 고스란히 생방송으로 나갔다는 사실. 미국 역사상 이보다 굴욕의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이 당시 국가항공자문위원회와 육해공군의 로켓 기술 부문들을 통합하여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61년 소련은 마침내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 탐사(보스토크 1호)마저 성공했다. 미국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

     

이것이 미국이 유인 달 탐사 계획을 추진한 결정적 이유였다. 단순히 우주에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을 달에 보내서, 거기 착륙시키고, 다시 지구로 귀환시켜야 했다. 이 목표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방법을 체계화한 것이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이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둘 있다. 물론 계획에 참여한 과학자, 엔지니어, 우주비행사, 관제사 등은 족히 수십만 명이 된다. 그러나 백만 대군이 출병해도 선봉에 서는 장수가 뛰어나야 승리할 수 있는 법이다. 소련과 건곤일척의 승부(진짜 전쟁은 아니지만)를 벌인 아폴로 계획에서도 선봉장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다. 아폴로 계획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집단 R&D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그 시작은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전임 아이젠하워는 NASA 설립 외에 우주 개발에 투자한 것이 별로 없었다. 이는 안정적인 재정 운영 기조에 따른 것이다. 일례로 그는 400억 달러에 달하는 NASA의 유인 우주 탐험 예산을 반려시켰다. 군인 출신 아이젠하워에게 우주 경쟁은 소련의 군사력에 대항하는 것보다 나중 문제였다. 그리고 이 사이에 소련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었다.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에서 1961년 보스토크 1호까지, 우주에 관한 최초의 타이틀은 모조리 소련 차지였다.


케네디는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이 문제를 쟁점화했다. 그는 소련으로부터 우주 개발의 주도권을 되찾자고 주장했고, 결국 정권 교체를 이뤘다. 당선 직후에는 우주 개발에서 구체적으로 뭘 할 것인지를 탐색했다. 초기 백악관의 과학 자문위원들은 유인 달 탐사에 부정적이었다. 과학적으로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미국의 위신을 높이면서, 다른 나라에 영감을 주고,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이유에서 달 탐사에 관심을 보였다. 즉 우주 개발은 과학적 성과나 예산 규모만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결국 1961년 5월 케네디는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했다. 10년 안에 달에 사람을 보낸다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세 가지 요인이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소련의 보스토크 1호 발사.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은 우주에 나가 지구 궤도까지 돌고 귀환했다. 둘째는 피그만 침공 실패.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주도로 쿠바에 게릴라를 침투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려고 했으나, 작전이 실패하면서 케네디는 큰 위기에 직면했다. 셋째는 앨런 셰퍼드(Alan Shepard)의 첫 우주 비행 성공. 소련보다 늦었고 지구 궤도를 돈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확인했다.

1962년 라이스대학교에서 저 유명한 "We choose to go to the Moon" 연설을 하는 존 F. 케네디.


요컨대 유인 달 탐사는 케네디가 선제적으로 던진 메시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얽히고설킨 국내외 정치・군사적 상황을 돌파하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의회도 이 계획에 동의하면서 NASA의 1962년 예산을 2배 증액했다. 본격적인 아폴로 계획의 시작이었다.

    



나치 출신 과학자

     

두 번째는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이다. 아폴로 계획은 물론 현대 로켓공학의 조상님과도 같은 인물이다. 달에 가려면 무엇보다 로켓이 있어야 했다. 폰 브라운은 아폴로 계획의 로켓으로 새턴Ⅴ(Saturn Ⅴ)라는 희대의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냈다. 1960년대 만든 이 로켓은 현재까지도 인간이 만든 비행체 중에 가장 큰 엔진과 강한 추력을 가졌다. 아폴로 계획 동안 단 한 번도 발사에 실패한 적이 없다. 그 정도로 기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본래 폰 브라운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독일인이다. 그런데 평범한 독일 태생이 아니다. 히틀러 직속 나치 무장친위대의 로켓 개발 책임자였다. 그가 만든 V2 로켓은 실제로 영국 폭격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전쟁 막판 제공권을 모두 잃은 독일은 그나마 이 로켓에 의지하고 있었다. 1944년 V2 로켓이 런던의 한 극장에 명중해서 무려 11개 건물이 파괴되었고 567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 잔해를 치우는 데만 1주일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1발의 미사일 공격으로 발생한 최대의 인명 피해였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아군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폰 브라운은 ‘악마의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 천재성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1945년 독일이 항복하자, 미국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은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이라 불린 나치 독일 과학자 포섭에 나섰다. 나치는 원자폭탄 개발에는 실패했지만, 항공, 로켓, 미사일 등에서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다. 특히 로켓은 미국보다 25년은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포섭 1순위는 역시 폰 브라운이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몸값이 뛴 폰 브라운은 마치 프로야구 FA(자유계약) 선수처럼 느긋하게 협상하며 좋은 조건을 받아냈다. 그리고 100명이 넘는 연구팀(가족 포함 300여 명)과 함께 미국으로 투항했다. 이들은 대부분 V2 개발자들로, 그대로 아폴로 계획의 핵심 인력이 된다. 물론 이들의 정착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독일군과 피 흘리며 싸웠던 군부의 반발이 컸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 이들은 로켓 개발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V2 기술을 군에 이전해주는 일 정도가 전부였다.

 

그 무렵 소련에서는 미국이 상상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소련은 1949년 원자폭탄을 개발했으나 정작 떨어뜨릴 방법이 없었다. 미국이 일본에 그랬듯 폭격기로 떨어뜨려야 하는데, 소련의 공군력으로는 미국의 방어망을 뚫고 본토까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련은 이 차이를 한 방에 뒤집을 방법을 찾았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개발이었다. 미국에 폰 브라운이 있었다면 소련에는 헬무트 그뢰트룹(Helmut Gröttrup)이 있었다. 그 역시 독일 출신 과학자였다. 그뢰트룹은 지독히 사이가 나빴던 라이벌 폰 브라운이 미국으로 가자 소련을 택했다. 그리고 소련 로켓의 아버지인 세르게이 코롤료프(Sergey Korolyov)와 함께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R-7을 개발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발사한 인공위성이 스푸트니크 1호였다.

존 F.  케네디와 베르너 폰 브라운은 아폴로 계획을 이끈 두 주역으로서 상당히 케미가 좋았다.

     



10년의 기한

     

위기에 몰린 미국은 결국 폰 브라운을 NASA의 발사체 개발 부문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미 폰 브라운의 머릿속에는 사람을 달까지 태워 갈 로켓의 기본 설계가 완성돼 있었다. 남은 건 이걸 구현하는 일뿐이었다. 그도 어릴 때부터 우주여행을 꿈꾼 덕후였다. 무장친위대 시절 우주탐사를 위해 만든 V2가 폭격에 쓰이자, “개발은 완벽했으나 엉뚱한 행성에 떨어졌다”라고 자조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따라서 그에게도 아폴로 계획은 덕업일치의 기회였다.


무모해 보였던 케네디의 ‘10년 기한’ 목표를 앞장서 이행한 것도 폰 브라운이었다. 그는 케네디의 달 탐사 선언 8개월 만에 새턴Ⅴ 로켓 개발 계획을 내놓았다. 여기서 그의 우주덕후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새턴Ⅴ는 처음부터 화성 탐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어떤 로켓보다 훨씬 더 강한 엔진과 거대한 추력을 갖추게 되었다. 애초에 이렇게 넉넉한 스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계획을 여유롭게 운용할 수 있었다. 이는 케네디가 약속한 10년 기한을 맞출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 만약 목표에 딱 맞는 사양으로 제작했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변수나 난점에 대응해 로켓을 기술적으로 보완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턴Ⅴ 로켓의 발사 장면(위)과 크기 비교(아래). 이제껏 인류가 만든 최대 규모, 최대 추력의 비행체다.

폰 브라운은 또한 엄청난 추진력과 임기응변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케네디가 질러 버린 10년 기한을 맞출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 수행하거나, 일부 단계들을 과감히 건너뛰는 방법으로 아폴로 계획을 이끌어 나갔다. 대표적 예가 아폴로 계획의 가장 결정적 순간 중 하나였던 아폴로 8호였다. 폰 브라운은 1968년 갓 완성된 새턴Ⅴ를 별도의 테스트 없이 곧바로 유인 달 궤도 선회 비행에 투입했다. 이는 몇 단계로 나눠서 시험해봐야 할 일을 한 번의 발사로 몰아서 한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개발한 새턴Ⅴ에 그만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도박으로까지 평가되었던 아폴로 8호가 달의 궤도를 돌고 귀환함으로써 미국은 비로소 소련에 앞서나갔다. 이듬해에는 개발이 지연되었던 달 착륙선까지 완성되었다. 이제 정말 달 착륙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1969년 7월,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라는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명언을 남기며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던 케네디의 선언이 단 8년 만에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선언 당시에는 경쟁 상대인 소련도, NASA의 직원들도, 심지어 케네디도 실현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은 그만큼 수많은 어려움을 뛰어넘은 극적인 결과였다.



     

과학, 정치, 경제의 삼위일체 

    

만약 미국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았거나 소련의 로켓에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달 착륙은 아예 없었거나 아주 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폴로 계획의 시작은 이렇듯 냉전과 군사 위기를 직접적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요컨대 인류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이라는 과학적 위업으로 이어졌다. 아마 인류가 과학을 싹 틔우고 발전시켜온 이래로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과학이 훨씬 더 발달한 지금의 기준에서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을 때만큼 극적인 순간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과학적 위업이 온전히 과학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과학이 정치, 경제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가능했다. 아폴로 계획의 모든 순간이 다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중단될 위기도 수차례 있었다. 1967년 아폴로 1호의 사령선에서 훈련을 받던 세 명의 우주비행사들이 화재 사고로 사망한 것이 대표적 예다. 이 사건으로 상원에서 청문회까지 열렸다. 자칫하다가는 위험성을 이유로 계획이 폐기될 수도 있었다. 1968년에는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중단 여론이 들끓었다. 그해 미국에서는 68혁명으로 상징되는 반전 운동과 민권 운동이 정점에 올랐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로버트 F. 케네디(Robert. F. Kennedy) 등 진보운동의 리더들이 암살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혼란한 때에 달에 가려고 수십억 달러를 쓴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그 돈을 가난과 불평등의 해소, 의학 발전, 환경 보호 등을 위해 쓰자고 주장했다. 이렇듯 아폴로 계획은 자주 정치 쟁점화되었고,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은 늘 존재했었다.

1968년 우주 개발 예산을 빈민 구제에 쓸 것을 주장하는 시위대.

하지만 동시에 당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국가의 과제로 인정받기도 했다. 아폴로 계획은 이러한 정치적 합의가 있었기에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또한 케네디 이후 정부가 두 번 바뀌었어도 계속될 수 있었다. 아폴로 계획은 경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국민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폴로 계획의 총 비용을 202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1720억 달러(약 224.4조 원)가 넘는다. 2023년 미국 정부 예산(약 5.8조 달러)의 3%, 한국 정부 예산(약 638.7조 원)의 무려 35.1%를 차지한다. 당시 미국이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의 호황기여서 가능했던 일이다.

역대 NASA 예산 추이. 설립 직후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던 때가 이들의 리즈 시절이었다.

 

요컨대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순수한 과학연구만의 목적만 있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시작조차 못했거나, 시작했어도 금방 좌초했을 것이다. 공산주의를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가 있었기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폴로 11호로 목표의 상당 부분을 이뤘기에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웠음을 함의하기도 한다. 원래 아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되었으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17호로 끝났다. 그리고 냉전 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이후, 더 이상 달에 가려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진국의 과학 필수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