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Aug 14. 2023

온고이지신 플레이리스트 (2)

한번 발행했던 글이지만 또 한다. 지난 글에서 눈물을 머금고 뺐던 곡들을 재소환해보려 한다. 1990년대를 한국 대중가요의 황금시대로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이 시대에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갖춘, 이른바 웰메이드 가요가 본격화되었다는 이유에서다. 동의한다. 그런데 그 초점은 주로 1990년대 중반에 맞춰진다. 그러니까 서태지, 신해철, 정석원, 김현철, 이현도, 이승환, 유희열, 김동률, 이적 같은 유능한 프로듀서들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점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을 그냥 넘기기는 아쉽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은 상술한 ‘프로듀서들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이때에도 좋은 음악들이 참 많았다. 요즘 이 시대 음악들을 즐겨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윤상, <너에게> (1992년)

    

초창기 윤상의 곡들은 정말 감각적이다. 자기 곡과 남에게 준 곡의 구분 없이 그렇다. 지금은 대가의 아우라가 강한 그이지만, 군입대 전만 해도 매우 영민하고 트렌디함이 돋보이는 작곡가였다. 윤상의 가요사적 위상은 당연히 커리어 후반기가 규정할 것이다. 하지만 난 그의 초창기 대중성 강한 음악들이 더 좋다.

     

윤상 2집의 이 <너에게>를 숨겨진 명곡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히트곡도 아니다. 차갑고 도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재즈풍의 곡이다. 적당히 그루브한 리듬, 중간중간 치고 빠지는 브라스 편곡, 재지한 피아노 반주, 우수에 찬 보컬이 어우러지면서 극강의 세련됨을 자아낸다. 2020년대에 때아닌 시티팝 열풍을 몰고 온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와도 비슷한 느낌이라면 과한 비유일까.

     

때로는 걱정을 했어
너의 마음속에 숨겨진
끝도 알 수 없는 외로움
아직 남아 있진 않을까


    

2. 박영미,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 (1990년)

     

이 곡을 부른 박영미의 별명은 무려 한국의 셀린 디온이었다(동시대 활동한 신효범은 한국의 휘트니 휴스턴;;). 아닌 게 아니라 목소리가 묘하게 소울풀하면서도 파워가 넘친다. 맑은 듯하지만 내지를 때는 또 허스키한 톤이 나온다. 보컬이 커버하는 스펙트럼이 넓어서 요즘 나와도 성공할 것 같다. 이 곡이 그의 보컬적 장점을 극대화시킨다. <회상>의 레전드 작곡가 김성호의 곡이기도 하다.

     

나는 외로움 나는 떠도는 구름
나는 끝없는 바다 위를 방황하는 배
그댄 그리움 그댄 고독한 등대
그댄 저 높은 밤하늘에 혼자 떠있는 별


     

3. 여행스케치,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어> (1991년)

     

여행스케치는 1990년대 포크록의 일각을 차지했던 팀이다. 다만 대중적 인기보다는 주로 대학생들에게서 사랑받았다. 난 고등학교 때 즐겨 들었다. 그런데 이 팀을 듣는 사람은 전교에서 나밖에 없었다(시커먼 남자놈들만 다닌 학교여서 그랬나 보다). 1990년대 초반에도 대학가에는 민중문화가 살아있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서구적, 친미적(?) 음악은 학내에서 배척받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여행스케치 곡들은 청춘들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냈고, 포크록이라는 형식이 민중문화와도 친화적이어서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어>는 그들을 대표하는 사랑 노래다. 또 하나의 명곡 <운명>과 함께 영혼의 투톱을 이룬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드는 설렘과 두려움을 표현한 가사가 아주 섬세하고 아름답다. 고딩이었던 나도 이 노래를 들으며 ‘으음 사랑이란 그런 것이구나’하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의 사랑이 이렇게 시작되면 먼저 설렘이 앞서는 걸까
알 수 없는 나의 이 마음을
나의 사랑이 이렇게 시작되면 먼저 두려움이 앞서는 걸까
사랑이 이렇게 시작되면


    

4. 봄여름가을겨울, <어떤이의 꿈> (1989년)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멋진 펑크(funk) 곡이다. 펑크라면 소울의 친척쯤 되는 흑인음악이다. 그런데 재즈나 록을 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이렇게 펑키함을 제대로 살렸다니 놀랍다. 그것도 무려 1989년에. 김종진을 예능 프로에 나와서 썰렁한 소리나 하는 아재로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곡을 한번 들어보라. 후렴에서 “느아는 누구흘까하” 하고 지를 때, 정말 섹시하다.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 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혹 아무 꿈


     

5. 이지연,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1987년)

     

이지연은 청순하고 아름다운 외모(오연수와 닮은 듯?) 때문에 가창력을 저평가받는 가수가 아닐지. 이 노래로 데뷔했을 때가 17살이었다. 고등학생에게 이런 복잡한 감정선의 노래를 시킨 제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은유적인 가사도 이게 과연 고등학생이 이해할 법한 문장인가 싶다. 하지만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이지연은 이 어려운 곡을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잘 부른다. 듣다 보면 고등학생이 아니라 사랑의 아픔에 달관한 30~40대 같다. 그녀가 괜히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이 곡을 통해 알게 된다. 가을방학의 계피가 2018년 리메이크한 버전도 상당한 고퀄을 보인다.


잊는다는 슬픔보다 잊어야 한다는 이유가
내겐 너무도 서글픈 아픔이었네
잊어야 하는 마음을 가을비는 아는 듯이
내게 찾아와 조용히 손짓을 하네


     

6. 빛과 소금, <그대 떠난 뒤> (1990년)

     

한국 시티팝의 원류라고 하면 빛과 소금을 필두로 김현철, 윤상 등이 따라오지 않을까. 그만큼 이들은 세련되고 도회적인 심상, 가요보다는 팝송의 느낌을 현하는 데 장기가 있었다. <그대 떠난 뒤>는 빛과 소금을 대표하는 발라드다. 당시 한국 발라드의 주류를 이루던 뽕끼 가득한 마이너 곡들과는 사뭇 다른 작법을 선보인다. 멜로디도 차분하고 악기 구성도 미니멀하며 편곡도 쿨한 느낌이다. 30년 넘게 지난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다. 여전히 많은 후배가 리메이크하는 곡이기도 하다. 나얼, 박정현, 장범준 등 그 라인업도 후덜덜하다.

     

나 지울 수 없는 지난 추억을
이제 와 생각해 보네
비를 맞으며 걷던 이 길을
나 홀로 걸어가 보네     



7. 듀스, <무제> (1993년)     


이현도야말로 한국의 퀸시 존스다. 그는 힙합, 뉴잭스윙, 펑크 등을 우리 정서에 맞게 재해석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비트를 찍고 대중적인 멜로디를 뽑아내는 감각이 탁월했다. 특히 노래에 자신의 인장을 새길 줄 알았다. 이현도는 제와피! 또는 그뤠이~ 와 같은 시그니쳐 사운드가 필요 없는 뮤지션이다. 누가 들어도 이건 이현도 곡이구나 하고 알만한 작품이 많다. 디베이스의 <모든 것을 너에게>를 처음 듣고 단박에 이현도로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특유의 쿵빡 쿵빡하면서 파워풀하게 전개되는 리듬이 전매특허다.

     

그의 명곡은 너무 많아서 하나만 고르기 힘들다. 하지만 역시 이현도 하면 듀스다. 듀스 2집의 이 <무제>는 이현도의 흑인음악적 색채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곡이다. 녹음 상태가 좀 후진 게 아쉽지만, 여전히 지금 들어도 간지가 뿜어져 나온다.

    

이게 바로 세상인가 나는 아직 모르겠어
다만 나는 지금 자유로워지고 싶어 COME ON BABY
우리는 이것을 하겠어

  


8. 모노, <넌 언제나> (1993년)

    

모노는 흔히 신스팝이라고 하는, 세련되고 산뜻한 음악을 했다. 신스팝이라면 장르적으로 일렉트로니카와 테크노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노는 그 정도로 강렬한 전자음악을 하지는 않았다.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중심에 두었지만, 멜로디만큼은 듣기 편한 대중가요의 작법을 따랐다.


데뷔곡 <넌 언제나>가 그 전형을 보여준다. 귀에 감기는 듯한 달콤한 멜로디가 신시사이저 반주와 어우러지면서 세련된 매력을 뽐낸다. 이 팀의 프로듀서이자 베이시스트 박정원은 이상우의 히트곡을 만들었고 윤종신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멜로디메이킹 능력이 아주 탁월하다. 나중에는 드라마 OST로 활동 영역을 옮기는데, 가요 작곡가로서 계속 활동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네가 떠난 그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을 거야
더 이상 거짓으로 나를
위로하고 싶진 않아



9. 박준희, <눈 감아봐도> (1991년)

     

1990년대 초반 대중가요는 의외로 장르적으로 다양했다. 여성 보컬이 부르는 흑인음악도 그 예가 아닐까. 1980년대 팝의 이정표를 세운 마이클 잭슨과 바비 브라운의 뉴잭스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현진영과 이현도가 이 스타일로 일가를 이뤘고, 여성 보컬 중에도 마찬가지의 시도가 있었다. 1990년 밀리언셀러를 찍은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가 대표적이다.

     

이듬해 나온 박준희의 이 곡도 비슷한 노선에 있었다. 퀸시 존스와 바비 브라운을 충실히 따라 한 리듬 편곡은 레퍼런스로 퉁치기에는 좀 과해 보이기는 한다. 그럼에도 박준희의 탁월한 보컬을 앞세워 뉴잭스윙의 세련된 그루브를 제대로 살렸다. 특히 눈감아봐~~도 할 때의 가성은 미쳤다. 포지션의 편곡자(특히, 번안곡 I Love You)로 유명한 유정연이 곡을 썼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유정연은 클래시컬하고 고급스러운 발라드 작·편곡에 일가견을 보였다. 그런 그가 이런 그루브한 흑인음악도 곧잘 만들어내는 걸 보면 음악도 진리의 잘놈잘인 듯하다.

    

눈 감아야 널 바라보는 내 마음
너는 알 것 같니
눈 뜨면 아쉬운 이별
자꾸 애만 태우는 꿈속의 널 어떡하나     



10. 언타이틀, <책임져> (1996년)

    

서태지 이후 댄스와 아이돌의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가수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작곡과 프로듀싱 능력을 갖춘 아티스트형 가수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언타이틀의 음악적 리더 유건형은 찐 인재였다. 남성 2인조로서 강렬한 비트의 고퀄 댄스곡들을 냈다는 점에서 언타이틀은 포스트 듀스였다. 아이돌 댄스음악에 인기와 자본이 몰리면서, 한탕을 노린 성의 없는 가수들도 많이 제작됐던 시기였다. 하지만 유건형은 세태와 무관하게 자기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고 관철했던, 뚝심 있는 실력파로 기억한다.

      

이 <책임져>도 가사는 유치하지만(중간중간 들어가는 겟겟겟올라잇 추임새도...) 곡의 중추를 이루는 비트의 전개는 아주 세련됐다. 역시 댄스음악, 흑인음악은 비트가 80%다. 언젠가 박진영이 댄스음악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을 신나게 만든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일갈했었다. 이 <책임져>는 그 어려운 일을 충실히 해낸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개털린 뒤에 들어도 신날 것 같다. 언타이틀은 데뷔 3년 만에 해체했다. 하지만 유건형은 오히려 요즘 더 잘 나간다. 싸이의 협업 파트너로서 꾸준히 히트곡을 내고 있기 때문. <강남스타일>을 필두로 <젠틀맨>, <행오버> 같은 월드클래스 성공작들을 같이 썼다. 그러니까 싸이에게 유건형은 SM의 유영진, YG의 테디 같은 존재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때를 잘 타야 하고 운대도 잘 맞아야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실력이 중요함을, 뮤지션 유건형을 보며 새삼 깨닫는다.


이렇게 망친 내 인생 책임져
날 떠난 후 너는 행복하니 난
그렇지 않아 내 인생 책임져
너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어 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