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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구름 Mar 02. 2021

라떼와 정체성

지난 1월에 아버지가 흑색종으로 수술을 받았다. 왼쪽 발 뒤꿈치에 탁구공보다 크고 테니스 공보다 작은 커다란 검은색 점, 흑색 종양이 있었다. 언제부터 그것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어느 날 보니 검은색 점이 보였는데 아프지도 않아 그냥 두고 살았다고. 동네 작은 피부과에서, 더 큰 을지병원으로, 을지병원에서 고대병원으로 옮겨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흑생종을 제거하는 수술 하나, 사타구니 쪽 림프관 조직을 떼어내어 종양이 퍼졌는지를 검사하는 수술 하나. 총 두 종류의 수술을 각각 한 시간 정도 받았다.


코로나로 인해 병실에는 간병인 1명만 출입 가능하다. 처음 입원 수속을 할 때에는 내가, 그 뒤에는 어머니가 간병인으로 아버지를 도왔다. 저녁때가 되어 어머니와 저녁을 먹기 위해 고대 주변 식당을 알아보는데 '웃겨 죽겠다'며 한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신다.



수술을 두 번 하는데, 피부과와 외과 의사가 집도한다. 흑색종은 피부과에서 담당하는데 수술 병실이 없어서 7층 외과 병동으로 병실이 예약되었다. 간호사가 오더니 피부과 의사와의 상담이 있으니 3층으로 (2층인가?) 내려가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돌연히 환자복을 벗더니 다시 평상복으로 갈아입더란다. 자신은 환자복을 입고 병원의 복도를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병원은 원래 환자복 입고 돌아다녀도 괜찮은 곳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막무가내였다.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고집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그냥 냅뒀단다. 옷을 다시 갈아입은 아버지가 병실을 나와 간호사가 있는 데스크를 지나간다. 담당 간호사는 깜짝 놀란다. 환자복을 입으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다시 병실로 돌아가 환자복으로 입는다. 


어머니 말은 죽어도 안 듣더니 간호사 말에 바로 들어가 환복을 갈아입는 모습이 너무 웃기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하신다. 아버지로서는 환자복을 입고 병원을 돌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는 열쇠이다. 이는 정체성에 기반한 행동 혹은 정체성에 기반한 의사결정이다. 아버지는 종종 "우리들은 말이야..." "에이.. 우린 그렇게 안 해..."라는 말을 자주 쓰며 자신의 행동을 (고집을) 정당화하곤 한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그 '우리'가 누구야?


상계동에 위치한 아파트 옆에는 작은 산이 있고, 그 산기슭에는 조그마한 텃밭도 있다. 여기 텃밭을 대여하여 작게나마 농사를 짓고 계신다. 거기에는 아버지 말고 같이 텃밭을 가꾸고 계신 동네 아저씨들이 많이 있다. 그렇게 만나 어울리다 보니 텃밭은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의 아지트 역할을 한다. 그 아지트에서 모이는 모임. 바로 그분들이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우리'이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단서'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단어로 꼰대를 설명하곤 하는데, 나는 이것도 '정체성'의 관점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과거의 '우리'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 다만, 그 '우리'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남들'이 되니까 문제인 게지.

 



한 사회심리학자가 '우리'와 '남들'에 대한 실험을 했다. 200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진행돼 실험이라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리버풀과 맨유(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라이벌이었다. 실험은 맨유 서포터즈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한 대학교의 심리학과 건물로 안내되었다. 이들에게 영국 축구팀에 대한 간단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예를 들면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팀은? 물로 맨유겠지. 왜 그 팀을 좋아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팬이었는지, 얼마나 자주 그 팀의 시합을 보는지 등등...


그리곤, 실험의 일부로서 축구 관련 동영상을 봐야 하는데 현재 실험실은 너무 작아서 바로 옆 건물로 가야 한다고 안내했다. 


진짜 실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참가자가 옆 건물로 가는 길은 좁고 인적이 드문 곳이다. 뿐만 아니라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람이 다닐 수 없도록 하였다. 실험 참가자는 동영상을 시청하기 위해 옆 건물로 혼자 걸어가고 있다. 이때 앞에 조깅을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실험 참가자 앞쪽에서 넘어지고 만다. 이 실험은 45명의 맨유 팬들에게 진행되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45명의 실험 참자가들의 눈 앞에 넘어진 사람은 각기 다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맨유 유니폼, 리버풀 유니폼, 흰색 셔츠


*실험은 45명에 대해 각각 진행되었고, 조깅을 하는 사람은 세가지 셔츠 중에서 임의로 하나를 입고 넘어졌다.


과연 참가자는 넘어진 사람 중에 누구를 도와주었을까?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다. 

Levine, Prosser,, Evans, & Reicher. (2005).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맨유 팬인만큼...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팀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넘어져 있을 때에 더 많이 도와주었다. 그들의 경쟁 팀이었던 리버풀, 평범함 흰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많이 주지 않았다.




이 연구자는 이번에는 또 다른 실험을 진행한다. 실험 대상은 32명의 맨유 서포터즈들이다. 실험 조건도 똑같다. 맨유 유니폼, 리버풀 유니폼,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이 눈 앞에서 넘어진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Levine, Prosser,, Evans, & Reicher. (2005).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실험 결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실험과 달리, 두 번째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축구라는 스포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하여, 축구 팬들의 모습 등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맨유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두 번째 실험에서는 축구라는 스포츠에 더 집중하였다. 따라서 실험 참가자들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도 달라졌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행동도 달라졌다.




기업에서는 목표 달성을 위해 합리적인 토론과 논의를 거쳐 의사결정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직원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행동하고 판단한다. 대부분 정체성은 내가 속한 부서에 따라 결정된다. 각 부서별 이기주의가 생겨난다. 그렇기에 직원들이 올바른 생각과 행동 양식을 가질 수 있도록 올바른 '조직 정체성'을 갖게 하는 것. 강력한 조직문화를 통해 공통의 지향점을 갖는 것. 이것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전략이 되어야 한다. 최근 넷플릭스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직원들에게 "당신은 어른이에요."라는 정체성을 강력하게 심어주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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