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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Sep 03. 2023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

 나의 일터에서는 드라마를 한다는 미명 하에 개인적인 영역이 침탈당할 때가 종종 있다. 첫 키스 장소가 어디인지. 연인과 헤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등. 일기장에나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들에 관해 동료들 앞에서 질문을 받는다. 대부분 넉살 좋게 적당히 눙치고 넘어가지만, 질문을 던진 자의 권위에 짓눌려 형식적인 답변이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이럴 때 나는 가사를 까먹은 래퍼처럼 횡설수설하는 편이다. 거짓말과 사실을 적당히 섞어 프리스타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던데. 나는 가깝지 않은 타인에게 그런 일들을 진솔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빠는 관심 있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행동을 해?” 

 최근에 동기가 참여하고 있는 로맨스 드라마에 관해 수다를 떨다가 시답잖은 질문을 받았다. 내적 친밀감이 깊게 쌓인 관계에서는 누가 억지로 묻지 않아도 이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간다. 요즘 애들 말로 플러팅 그런 걸 말하는 거냐,라고 물으니 극혐 한다는 표정이 돌아왔다. 내가 누군가에게 플러팅 하는 모습을 상상했단다. 억울하다. 지가 물어봐 놓고 나한테 왜 그러는 걸까. 플러팅이라는 워딩 자체가 나한테 안 어울린단다. 그래 그건 인정이고. 그런데 나는 관심 있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행동을 하지?    

 

 “카페 가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듯?”

 나의 답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이었다. 나는 덥고 뜨거운 건 질색이다. 여름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감기에 걸리지 않는 한 계절에 상관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문제는 하마처럼 아아 한잔을 3분 만에 후루룩 클리어한다는 것. 주변 사람들의 음료는 아직 한참 남아있는데, 나는 음료를 다 클리어하고 얼음을 씹어먹고 있다. 의식하며 천천히 마시려고 해 봐도, 잠깐만 방심하면 어느새 컵이 바닥을 보이고 만다. 그래서 관심 있는 사람과 카페에 가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아무래도 호호 불어서 식혀마실 수밖에 없다. 음료가 남아있으면 더 자연스레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고르게 만든다. 물론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식기만 하면 가차 없이 비워버린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게 뭐야. 그런 걸로 상대가 어떻게 눈치를 채. 더 적극적으로 해야지 등등. 잔소리를 좀 듣다가 앞으로 카페에서 어떤 음료를 시키는지 지켜보겠다는 놀림으로 그날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결국 드라마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역시나 일을 빙자해 사적인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8월에 타인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는데 영 생산적이지 못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계절 안녕.      


 9월이 되자마자 신기할 정도로 아침저녁이 선선하다. 늘 그렇듯 올해 여름도 많이 괴로웠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인 나로서는 밖에 나가면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깨는 가을 겨울이 좋다. 숨이 턱 막히는 여름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끈적한 공기가 여러 가지 생각들과 함께 축축하게 스며들어 머릿속을 유난스럽게도 짓눌렀다. 선선한 가을이 오면 그런 생각들을 하늘 위로 둥실둥실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산책을 나왔는데.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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