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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Nov 05. 2023

모아모아

 친구들이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단순한 문장인데 글로 옮겨놓고 한참을 노려보니 괜히 오싹하다. 언젠가 30대를 겨냥한 스릴러를 쓴다면 꼭 이 문장으로 시작해야지. 무튼간. 친구들이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누군가의 삼촌이 됐다. 나비잠을 자는 갓난아이를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경건해진다. 예수님이나 부처님 앞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부끄러운 삼촌이 되지 말자는 다짐이 잠깐 든다. 그리고는 모찌떡 같은 볼따구를 콕콕 찔러보는 것으로 삼촌이 된 권력을 만끽한다. 볼따구를 콕콕 찔러 아이의 잠을 깨웠다면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갈 차례다. 아기와 연예인은 TV로 볼 때가 가장 좋다는 회사 선배의 엄중한 가르침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H삼촌을 떠올려 본다. H삼촌은 엄마 쪽 남매의 막냇동생이다. 나는 삼촌들 중에 H삼촌과 가장 친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가 안 된다는 건 죄다 시켜줬기 때문이다. 삼촌은 모아모아라는 문방구를 학교 앞에서 3년 동안 운영했다. 그곳에는 가게 이름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듯 온갖 불량식품들이 모여있었다. 학교 수업은 지루했지만 모아모아에서 엄마 몰래 아폴로나 쫀드기를 먹는 건 재미가 있었다. 한 번은 삼촌이 발바닥 모양의 파란 페인트 사탕을 준 적이 있는데 입술이 시퍼레지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빨아먹다가 바로 들통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알면서 준 것 같기도 하다.   

   

 문방구를 운영하던 삼촌은 돌연 도배장이가 됐다. 작업복에는 늘 지저분한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고물 트럭에는 뭔지도 모르겠는 잡동사니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 정겨운 문방구 냄새가 나던 H삼촌에게 코를 찌르는 페인트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가 싫었다. 나는 문방구를 하는 삼촌이 좋았지 도배장이 삼촌은 싫었다. 하지만 삼촌 앞에서 그런 마음을 꽁꽁 숨겼다. 여전히 H삼촌은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였다.  

   

 여느 때처럼 H삼촌과 노닥거리던 어느 날 어린이 백일장 대회가 열렸다. 교외의 한 공원에서 열리는 야외 백일장이었다. 부모님이 너무 바빠서 H삼촌이 나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삼촌의 고물 트럭을 타고 가던 중, 저 멀리 모여있는 친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페인트가 덕지덕지 튀긴 삼촌의 작업복과 트럭 안 잡동사니들이 떠올랐다. 나는 H삼촌이 부끄러웠다. 나는 사람들에게 삼촌을 숨기고 싶었다. 삼촌에게 꽁꽁 숨겨왔던 내 마음을 들키는 것보다, 친구들에게 삼촌이 도배장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게 더 싫었다. 나는 삼촌에게 대회 장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차도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삼촌이 돗자리와 간이 테이블을 들어다 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혼자 갈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H삼촌은 멀찍이서 대회장까지 무사히 들어가는 나를 확인하고서야 고물 트럭을 몰고 사라졌다. 그날 백일장에서 무슨 글을 썼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H삼촌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아이도 어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나는 어른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는 아이였다. 철원에 살아서 지금은 철원이모라고 부르는 이모에게도 그랬다. 나는 이모를 슈퍼뚱땡이 이모라고 불렀다. 조금 뚱뚱하다는 이유였다. 그때의 이모는 지금의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았다. 내가 맨날 슈퍼뚱땡이 이모라고 놀려도 이모는 싫은 기색 한번 없었다. 나에게 사회성이란 게 생긴 이후로 슈퍼뚱땡이 이모는 자연스레 철원 이모가 됐다. 지금은 이모가 너무 야위어서 마음이 아프다. 이모에게 언제 다시 슈퍼 뚱땡이로 돌아올 거냐고 장난을 걸었는데, 이모가 네가 어릴 때 하도 슈퍼 뚱땡이라고 놀려서 이젠 살이 안 찌는 것 같다며 힘없이 웃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면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다. H삼촌은 지금 어엿한 인테리어 업체의 대표다. 춘천에 건물도 있다. 아마 우리 집보다 30배는 부자일 거다. 나는 여전히 H삼촌과 친구처럼 지낸다. 철원 이모는 지금도 김치를 담그면 내 몫을 엄마에게 챙겨 보낸다.

      

 H삼촌과 이모는 어린 조카가 마음에 낸 생채기를 어떻게 참아냈을까. 부디 그들의 마음에 흉이 지진 않았기를. 삼촌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의 생채기 정도야 언제든 사랑으로 덮어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진정한 삼촌의 자격을 획득하는 게 아닐까. H삼촌이 그런 삼촌이 되어줘서 고맙다. 이모도.


 친구의 딸이 언젠가 나에게 슈퍼뚱땡이 삼촌이라고 불러도 너그러이 용서해 줘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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