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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Nov 19. 2023

책갈피

<더 테이블> 김종관 / 영화 리뷰 ※스포있음※

 책갈피 같은 사람.

 내 마음에 책갈피를 꽂아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이미 오래전에 넘겨버린 삶의 한 페이지가 순식간에 다시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 그 사람의 일화가 스르륵. 불가항력적으로 떠올랐다. 그냥 책은 내가 원하는 부분에만 책갈피를 꽂아둘 수 있다면,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가 달랐다. 헤어진 여자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거나 할 때면 마음속의 책갈피가 요동쳤다.     


 어릴 때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물렁한 편이었다. 그래서 주변인들이 내 마음에 쉽게 책갈피를 꽂을 수 있었다. 물렁했던 마음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빠르게 단단해졌다. 이제는 마음을 잘 주지도 않고 쉽게 상처받지도 않는다. 단단해진 마음을 뚫고 기어이 책갈피를 꽂아내는 사람도 간간이 있긴 하지만.     

 

 그 여파일까. 어린 시절 마음에 책갈피를 꽂아두었던 몇몇 사람들과만 얼굴을 보고 지내는 폭 좁은 인간으로 살고 있다.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던 시절에 책갈피를 꽂아둔 사람들. 그들을 만나면 삶에서 가장 시답지 않았던 순간이 다이내믹하게 펼쳐졌다. 이를테면 옆 테이블의 남은 술안주를 10월의 배곯은 다람쥐 마냥 훔쳐 먹던 순간들. 책갈피가 꽂혀있는 페이지를 뒤적거리다 보면 시간은 쉽게 갔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들을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든다. 지금의 삶에서는 공통분모를 쉬이 찾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추억팔이를 한다. 이미 손때가 가득 타 새까매진 페이지인데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언제고 그 페이지를 펼쳐낼 것이다.      


 추억팔이.

 그땐 그랬지. 깔깔깔. 나는 힘들이지 않아도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그 편안함이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들을 웃길 수 있었다. 굉장한 이야기꾼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엔간하면 그들의 구미에 맞았다. 깔깔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하루 나의 평범함에 좌절했다. 추억팔이란 재능 없는 이야기꾼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도피였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컴퓨터를 켜면 책갈피가 꽂혀 있는 페이지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과거에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상상력은 절망적일 정도로 빈곤했다. 영화를 만들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얼마나 착취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러지 않고는 단 하나의 이야기도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그 사람들의 책갈피가.     


 

 김종관 감독의 영화 <더 테이블>은 서로에게 책갈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나의 카페. 하나의 테이블. 네 개의 인연. 장소를 한 곳으로 고정하자 시간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더디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흐름을 차분히 따라가는 감성이 일본 영화 같기도 하다. 구름이 흘러가듯 영화의 전개는 잔잔하다.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어느 정도 반영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테이블에 누가 앉았는지 따라가 보자.


 오전 10시.

 오래전 헤어진 연인. 그들은 서로의 인생에 책갈피를 깊숙이 박아놓았다. 하지만 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그 순간을 똑같이 기억하는 건 아닐 터. 같은 시기의 페이지를 열었지만 내용은 정반대였다. 남자에겐 여자와의 추억이 아름답고 절절한 멜로일지 몰라도, 여자에겐 그저 지우고 싶은 흑역사라는 게 웃프다. 남자가 하는 꼴을 보아하니 여자가 톱스타가 됐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오후 2시.

 소개팅. 애프터. 그리고 삼프터 만에 잠자리를 가진 남녀. 남자는 뻔뻔하게도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버렸고 여자는 관계의 애매함에 그를 붙잡지 못했다. 남자가 놓고 간 시계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 새해가 되고도 한참. 마침내 그놈에게 연락이 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남자의 능글맞음에 여자는 내심 서운했을 터다. 내가 이렇게 실없는 놈을 기다렸던가. 주섬주섬. 남자가 가방에서 선물을 하나하나 꺼내놓는다. 떠나서도 늘 여자를 생각했다는 증표일까. 그 카페. 그 테이블. 서로에게 책갈피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에. 남자와 여자는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하려는 듯하다.


 오후 5시.

 꼭 헤어진 연인이나 옛 친구만이 서로의 책갈피가 되리라는 법은 없다. 때로는 생면부지의 타인이 나를 과거로 데려다 줄 때도 있다. 은희와 숙자는 결혼사기를 위해 만난 가짜 모녀다. 은희에게는 엄마가 필요하고 숙자는 돈이 필요하다.

 “적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자신의 특징. 별명을 느릿느릿 말하는 은희에게서 숙자는 죽은 딸의 모습을 본다. 결혼식이 열릴 5월 20일. 은희와 숙자는 아마도 진짜 모녀가 될 것만 같다.


 오후 9시.

 남자와 여자는 오늘 정말로 헤어질 것이다. 여자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자는 지금이라도 남자에게 돌아가겠다 말하지만 사실은 안다. 이젠 끝이라는 걸. 이별을 앞둔 남녀는 깨닫는다. 마음 가는 길이 사람 가는 길과 다르더란 걸.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연이라도 남자와 여자가 마주칠 일이 생긴다면. 책갈피는 오늘의 카페를, 테이블을, 비 내리던 밤을, 그들의 앞에 펼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다짐해 본다. 우연이라도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그러니까. 오늘의 페이지를 펼쳐볼 일 역시 다시는 없기로. 남자와 여자는 오늘 정말로 헤어질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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