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호지방이 Nov 26. 2023

할부되나요?

 어제는 NBA 경기를 틀어놓고 시집을 뒤적였다. 스테판 커리가 삼 점 슛을 집어넣자 관중들의 아메리칸 함성이 텔레비전을 뚫고 나왔다. 아메리칸 함성을 배경음으로 삼아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같은 구절을 읽었다. 농구경기를 보며 도파민을 올리든가. 좋은 문장을 읽고 감성에 젖어있든가. 둘 중에 하나만 할 일이지 도대체 뭐 하고 있나.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괴이한 짓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뭐 하나에 쉽게 집중하지 못하겠다.

      

 작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마음이 좋지 않다. 글을 쓰는 일이 외로움과 싸우는 일임을 머리로 잘 알고 있다. 나는 작가가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그 외로움에 마음을 얕게 담그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작가와 대본 이야기를 할 때는 늘 조심스럽다. 모든 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는 외로움과의 지난한 싸움 끝에 태어난 소중한 결과물임을 잘 알고 있다.

     

 가장 괴로운 순간은 그런 소중한 결과물이 나에게 재미없게 느껴질 때다. 재미없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작가의 기분을 생각해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해 줘야 한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애매하게 두루뭉술 구렁이 담 넘듯 지나간다면, 상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작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질문을 던진다거나 예쁜 말로 포장을 해줄 수야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짚어줘야 하는 순간이 잔인하게도 꼭 온다. 그때 도망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의 의견을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작가의 몫이다. 만약 여자친구가 한강라면을 만들어왔다면 얼마든지 맛있게 먹어줄 수 있겠지만, 작가가 한강라면을 끓여 왔다고 느낀다면 이게 싱겁다고 솔직히 말을 해줘야 한다.

     

 그런 순간마다 마음을 사용하는 일에도 할부가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3개월 할부로 전달해 주세요’ 따위의 상상 말이다. 상처를 조금이라도 나눠서 줄 수 있다면 그나마 덜 괴로울 수 있을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외로운 싸움 끝에 탈고를 마친 작가에게는 상처가 되겠지.

      

 애석하지만 이번에도 작가에게 일시불로 마음을 긁고 말았다. 성미에 내키지 않는 짓을 일 때문에 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상처를 할부로 전달하는 일도, 엄청난 인사이트를 전해주는 일도 아닐 터다. 당신이 외로운 싸움을 하는 동안 나 역시 그 옆에 서 있는 일. 외로운 싸움을 해내야만 하는 당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뿐이다.      


(*끝)

작가의 이전글 책갈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