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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Dec 17. 2023

어른이 됐다고 느끼는 순간

 경찰청에서 면허를 취소해 버리겠다고 우편이 왔다. 내년 1월까지 면허갱신을 하란 이야기. 면허를 딴 지 10년이 지나면 적성검사란 걸 받아야 하는데 게으름 피우며 차일피일 뭉개버린 결과다. 한겨울에 면허가 취소돼 뚜벅이가 된다면, 낡아버린 내 신체 기관들이 갖은 방법으로 고통을 주고는 게으름의 이유를 추궁할 터다. 그보다도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게을러서 면허가 취소되다니. 아무리 일상을 내팽개쳐두고 살아왔대도 이건 선 넘는 거다. 면허가 취소되면 운전면허시험을 다시 봐야 한다. 가스비나 내려고 우편함을 뒤적거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권력의 엄중한 경고를 받고야 말았다.

      

 제때 했으면 인터넷 접수로 30분 만에 끝낼 수 있었는데. 게으름의 대가는 허공에 날려버리는 시간이다. 가까운 운전면허시험장에 직접 방문해서 증명사진을 내고 시력 검사를 하는 수고를 들여야만 한다. 후기를 검색해 보니 연말에는 무려 6시간씩 대기할 때도 있단다. 일기 쓰기 싫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개학을 앞둔 초딩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그리 다른가. 이럴 때마다 아직도 어른 되려면 멀었다고 느낀다.

     

 면허시험장에 도착하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나에게 대기번호 230번을 줬다. 무언가 죄수 번호 같은 느낌이다. 게으름에 대한 형벌로 징역 6시간에 처한다! 이런 곳에선 책도 눈에 잘 안 들어오고 일도 잘 안된다. 죄수들과 나란히 앉아 석방되길 간절히 기다린다. 그러면서 으레 죄수들이 그러하듯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나이는 한 살 두 살 먹어가는데. 어른이 됐다고 느낀 적은 없다. 어른 되려면 멀었다고 느낀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과음한 다음 날 변기통을 붙잡고 있을 때는 아직도 내가 대학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고, 친구들과 만나면 조던이 위대하니 메시가 위대하니 따위의 실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고 33살인데 애라고 할 수도 없고. 서글픈 노릇이다. 청춘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느낌. 신호등으로 치면 노란불 인간.  

   

 어릴 때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무언가 맘에 와닿을 때 스스로 어른이 됐다고 느끼려나. 이를테면 네가 애를 키워봐야 내 맘을 알지,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처럼 말이다. 결혼과 육아가 어른으로 가는 길이라면, 아직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게 확실하다. 역시나 아직 어른 되려면 멀었다. 어른 되려면 멀었는데, 재발급받은 면허증 속의 나는 예전보다 10년이나 삭아있다는 게 조금 웃프다. 그래도 6시간을 넘기지 않고 탈출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나가는 길에 누군가가 번호표를 뽑는 걸 유심히 봤는데 대기 번호가 252번이라 기뻤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먼 정도가 아니라 애새끼임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고통 끝에 방학 숙제를 해치워버린 초딩의 마음으로 콧바람 흥얼거리며 면허시험장 밖을 빠져나왔다. 집에 가서 누울 생각에 신바람이 났다. 시험장 앞에는 휘황찬란한 광고 현수막들이 많이 붙어있었다. 운전면허 도로주행 광고도 있었고, 증명사진 현수막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 한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앗! 타이어 신발보다 싸다’

 현수막을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친김에 타이어나 갈까. 신발보다 싸다는데. 그리고는 순간 흠칫했다. 저 광고에 내가 반응하는 날이 오다니. 어렸을 때는 그냥 지나가던 현수막이었는데. 


 어쩌면. 나 어른일지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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