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날아가신 외할머니는
나 어릴 적, 함께 포도봉지 씌우며
속이 썩기 전에 빨리 팔려야 할 텐데
썩기 전에 팔려야
그 돈으로
내 새끼 대학도 가고
용돈도 주고 할 텐데
땅바닥에 우뚝 선 나는
포도 팔은 돈으로 간 대학에서
포장지를 뒤집어쓰려고 안간힘을 쓰며
속이 썩기 전에 빨리 팔려야 할 텐데
썩기 전에 팔려야
그 돈으로
고향에 있는 우리 엄마
하늘로 가신 외할머니
용돈도 주고 할 텐데
포장지가 화려해 갈수록
속이 썩어가는 느낌은
내 착각일까
완전히 썩기 전에 팔려야 할 텐데
꼭. 팔려야 할 텐데.
- 자기소개서 -
인생의 목표가 취업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도저히 써지지 않는 글의 꽁무니를 쫓다가 지쳐버리는 일이 잦았다. 특히 내 이야기를 요리해야 하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는 더욱 그러했다. 코드가 빠진 냉장고 같은 기분이었다. 재료가 상하고 있다. 심지어 냉장고 안에 소고기나 참치 같은 재료가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게 마땅치 않으니 속을 한동안 끓여 간신히 초라한 라면 한 그릇을 내놓는 기분.
취업하던 시기의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는 이유는, 최근 퇴사에 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문제점을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수도 없이 많다. 심지어 그 모든 문제점을 다 열거하며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회사를 천년만년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이 타이밍을 충동적으로 잡지 않으려고 두 가지 방면으로 노력한다. 하나는 냉철한 방식으로. 또 하나는 감정적인 방식으로.
냉철한 방식은 자기 객관화를 해보는 것이다. 현재 나의 능력치와 외부 업계 상황 등등을 돌아본다. 누가 봐도 나는 쪼렙이니까. 퇴사하기 전에 프리랜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경력들을 내복처럼 겹겹이 껴입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은 맨살이나 다름없다. 회사 밖은 내복 따위로 버티기에는 너무 춥다는 냉엄한 현실도 잘 알고 있다.
감정적인 방식은 취업하던 상황의 나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퇴사에 관한 충동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취업 준비를 할 때 썼던 글들을 열어본다. 내가 이 회사에 얼마나 어렵게 들어왔는지. 취업이 되지 않던 그 시기에 얼마나 절실하고 아팠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그 글을 읽고도 내가 회사를 뜰 마음이 든다면 그때는 퇴사해도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그래서 그때 썼던 글은 나를 늘 포도밭 한가운데로 데려간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땐, 포도 농사를 짓는 외갓집에서 농사일을 참 많이 도왔는데. 그때 외할머니와 했던 얘기들이 떠오른다. 나는 퇴사 충동이 들 때마다 기억 속의 그곳을 소환한다. 포도밭 탈출하기 게임이 플레이되는 기분이다. 외할머니고 뭐고. 포도밭을 빠져나올 수 있다면 이번에는 꼭 퇴사하리라.
이번에도 이런저런 일련의 사정으로. 이러쿵저러쿵 머리 아픈 일들로. 일일이 설명하기엔 너무나 초라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간의 꿈과 도전적인 마음으로. 포도밭 탈출하기를 시도했다. 애석하지만 늘 그렇듯 이번에도 역시 실패였다. 다만, 처음으로 문 앞까지는 다다른 느낌이 들었다. 코앞에서 게임오버된 느낌. 이런 적은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다음 판엔 진짜 포도밭 탈출하기에 성공해 버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