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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Jul 16. 2023

장마

 간신히 기운을 긁어모아 동굴 같은 집에서 빠져나오니 어두운 낮이었다. 밖이 이렇게 어두웠었나. 올여름은 마음만큼이나 공기도 무겁다. 하늘이 움푹 주저앉아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집 밖으로 나와야 한다. 일상은 동굴 밖으로 나올 때 시작되니까. 동굴 밖으로 나오는데 에너지를 많이 써서 그런지 일상을 꾸역꾸역 소화하다 보면 체한 느낌이 들 때가 잦다. 마음의 속도가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기 수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올해는 유독 숨이 차다.


 집 밖을 나서 좀 걷자마자 갑자기 비가 내렸다. 요즘은 늘 이런 식이다. 비 예보가 있어도 감감무소식이다가 기습적으로 폭우가 쏟아진다. 고작 집 앞 카페에 가는 게 계획의 전부였으니 요정도 비 잠깐이야 얼마든지 맞아줄 수도 있다. 후다닥 카페에 자리를 잡으며 생각했다. 인생이란 원래 예측 불가능한 것의 연속이니까. 괜찮다. 괜찮아야만 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왜 이렇게 승질이 나는 걸까. 산다는 건 왜 이따위일까. 


 올여름에는 짧게 만났던 연인과 이별했다. 그리고 마음 깊이 좋아했던 선배를 회사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누군가 작정하고 비라도 뿌리는 것 같다. 기습적인 폭우다.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늘 불행에 대비하며 살아온 삶이었으니까. 그동안 불행에 대비한답시고 해왔던 모든 허튼짓들이 카페 창밖에 물방울이 되어 똑똑 흐르고 있었다. 똑. 혹여 무슨 일이 생길까 다달이 붓고 있던 적금. 똑-똑. 뇌졸중에 걸려 쓰러지진 않을까 들어놨던 건강보험. 똑.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가입한 운전자보험. 똑-똑-똑. 휴대폰이 꺼질까 노심초사하며 끼고 다니던 보조배터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서 깔깔깔 비웃는 느낌이었다. 네가 그래봤자 예정된 불행을 막을 순 없다고.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게는 그 이유를 끝까지 따져 묻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차피 바뀌는 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회사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선배를 위해 아무런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연차가 아직 낮은 편인 나에겐,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다. 나의 이런 얄팍한 의리가 싫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걸까? 허무하다. 

    

 한 때 열심히 산다는 말을 싫어했다.      

 열심히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사는 것 자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거기에 또 열심히 살라니. ‘열심히 산다’는 말은 역전 앞 같은 모순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나는 열심히 지내는 게 아니라 열심히 열심히 지내다가 너무 지쳐버렸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겠다는 다짐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어떻게 매일매일을 전날보다 나아질 수 있을까. 하루에 1점씩 올려서 수능 만점을 맞겠다는 고딩도 아니고.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되는대로 살 생각이다. 낮과 밤도 막 바꿔 살고. 그러다가 그게 또 지겨워지면 역전앞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이나 다녀와야지. 간만에 허무주의의 먹구름이 내 삶을 뒤덮고 있다.


 올여름은 유독 장마가 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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