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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매거진 Jul 26. 2020

여자사람지인 인터뷰; 건축사 세수누나

우리 주위 여성들의 솔직한 페미니즘 이야기



 에디터 아햍먼과 펑션은 아는 페미니스트가 없다. 위대한 업적의 페미니스트들과 친분도 없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염치도, 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수많은 여성들과 마주한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가정 내 불평등에 맞선다거나, 사회 편견에 맞서 꿈을 향해 걸어간다거나, 그저 오늘 자신에게 충분한 칭찬을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이야기는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돈도 없고 친분도 없는 김에) 책 속에나 나올 법한, 강연에서 들을 법한 이야기 말고, 평범한 주위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 세상에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여자 사람 지인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2호의 주인공은 쑥의 오랜 친구, 세수누나다. 세수누나는 건축 일을 하는 사람이다. 건축 사무소에서 오래 일하다가 간간이 일탈도 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사무실이 있는 건축사다. 비혼의 삶에서 딱히 부족하다 느끼는 건 없지만, 가끔 필요한 누군가의 도움을 얻기 위해, 그리고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여성 주거 공간 설립을 꿈꾸고 있다. 주위에 결혼하지 않고 동물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입주자이자, 공동 설립자이다. 우리가 막연히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비혼 중년 여성의 삶은 어떤지 묻고 들어보고자 한다.



 



#여성 건축사의 탄생



Q 어떻게 건축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나요?


사실 건축사라는 꿈을 가진 적은 없어. 의도를 가지고 건축사가 된 게 아니고 어쩌다가 된 거야. 대학생 때 건축과를 진학하긴 했는데 나랑 잘 안 맞았어. 그래서 중간에 다른 일도 했었지. 그러다가 나이를 먹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자격증을 따고 이 일을 하게 되었어.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야. 그런데 따고 나서 마음이 좀 바뀌었어. 라이선스가 있으니까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생기고, 뭔가 ‘이제부터 제대로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뭐든지 늦게 되는 타입이거든? 학교 다닐 때도 공부 안 하고, 커서도 철이 늦게 들었었어. 아마 이것도 그렇게 됐던 것 같아.



Q 꿈이 없었다면, 건축과에는 어떻게 진학하게 되었어요?


아이, 그것도 나는 좀 엉망이라서. 친구가 원서를 건축과에 넣었어. 원서도 내가 넣은 게 아니야. (일동 웃음) 우리 때만 해도 여자들이 대학을 가는 게 흔하지 않았고, 집안도 어려워서 공부를 거의 안 했었지. 그래서 막상 졸업하니까 갈 곳이 없어서 ‘전문대라도 가볼까?’ 했었는데 그것도 내 마음에 차지 않았어. 그냥 그렇게 집에 뒹굴고 있다가 친구가 원서를 낸다길래 “그냥 내 것도 내!”라고 해서 원서를 냈지. 원서를 내고 온 친구한테 “어디에다 냈어?” 하니까 건축과 냈다고 해서 ‘그러면 뭐 한번 다녀볼까?’ 이렇게 된 거야.

 


Q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건축사라는 직업의 이미지는 어땠나요?


어릴 때는 딱히 별생각 없었어. 그러다가 처음 건축사 사무소에 취업했는데 소장님이 너무 어른처럼 느껴졌었어. 그래서 ‘내가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 같은 생각도 못 했었지. 현재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건축설계사’이고, 명칭은 ‘소장님’인 것 같아. 많은 사람이 건축과 건설을 헷갈려 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현장 가서 건설해요?” 이런 분도 있고. “도면만 그려요?” 이런 사람도 있고.



Q 저도 건축사를 떠올리면 현장에 있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실제로 건축사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건축사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야. 그 공간이 건물 안에 공간일 수도 있고, 건물들이 구성하는 도시일 수도 있지. 우리가 주변에 시선을 돌리면 전부 건물이잖아. 그 건물 안과 밖을 디자인하는 사람, 즉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 생각해.



Q 다른 직업을 꿈꾼 적도 있었나요?

예전에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대학 졸업 후 건축사 사무소를 다니고 있었을 때였지. 짧은 광고 속의 화려함이나 짧지만 통찰이 느껴지는 멋진 문구를 쓰는 일과 같은 것들이 마음에 들어서 해보고 싶었어. 근데 뭐 다시 공부를 시작할 용기도 없었고 돈 벌어서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서 주저했던 것 같아.




# ‘여성 건축사’와 ‘건축사’



Q 본인만이 가지는 이 일에 특화된 장점이 있나요?


나는 대화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이야기를 잘하는 것 같아. 예를 들면, 어떤 분들은 집을 지을 때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사진을 들고 와서 “그냥 이렇게 해주세요.” 이렇게 대충 이야기하기도 해. 그런데 나는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이야기하지. 가족 구성원이 어떤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집에 꼭 넣고 싶은 게 있는지 등에 관해 물어봐. 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이야기도 좀 하고, 그분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좀 하면서 대화를 풀어가. 그러면 딱히 할 말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 반면, “사실은 나는 이렇게 해보고 싶었는데…”라고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분도 있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시간이 좀 걸려도 그분에게 꼭 맞는 걸 해드리고 싶은 욕심 때문인 것 같아. 근데 실력이 부족해서… (일동 웃음). 이야기는 잘 듣는데 그걸 구체화하기는 여전히 어려워.



Q 반응이 갈린다고 했는데, 보통 어떤 사람들이 그런 대화를 좋아하나요?


그런 대화나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분들은 좋아하시고,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안 좋아하지. 연령대 차이는 꽤 있는 것 같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짧게 말하는 걸 좋아하고, 젊은 분들은 본인이 자료를 찾아오거나 향후 계획을 같이 얘기하기도 하는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지. 주택 설계 같은 경우에는 주로 여성분들이 이야기하시는 것 같기도 해. 아무래도 여성분들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으니까 본인이 사용할 공간에 대해 직접 이야기하시는 거지.



Q 그렇다면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는 걸까요? 보통 ‘대화’라고 하면 여성의 언어적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정말 그런 것 같은지 궁금해요.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 그냥 그 사람의 성향인 것 같거든. 대화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또, 원래 스몰토크 같은 걸 잘 못 하잖아. 회의 같은 곳을 처음 가면 다들 아는 사람 있나 찾아보고 없으면 조용히 있지. 작은 대화 같은 것도 시도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



Q 일을 하면서 성별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있나요?


우선 기본적으로 우리 업종은 남성이 훨씬 많아. 요즘의 건축사 합격률을 보면 여성이 25% 정도로 많이 배출되며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현장에 가면 “어? 여자분이 건축사예요?” 이런 사람이 많거든. 지금까지도 현장의 디폴트가 남성인 거야. 가끔은 여남 건축사가 동시에 가서 둘이 똑같은 얘기를 해도, 남성 건축사가 하는 말을 더 신뢰하고 여성 건축사의 이야기는 비교적 가볍게 듣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또, 관공서랑 같이 일을 할 경우에도 남성 건축사에게 먼저 일이 가는 거야. 예를 들어, 출장을 갈 일이 있다고 하면 남성 건축사가 같이 가는 게 더 편하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여자랑 어떻게 출장을 가?’ 이런 관습이 남아있기 때문이지.



Q 인식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다는 말이네요. 물리적인 부분이나, 현실적인 부분의 어려움도 있나요?


우리는 설계를 하는 사람들이라 밖에 나가서 몸을 쓸 필요는 없어. 그래서 딱히 물리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없지만…, 아까 말한 인식적인 어려움이 현실로도 다가와. 남성 건축사를 선호한다는 건 인식적인 어려움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들에게 일이 더 많이 가게되면 경제적인 어려움이 될 수 있는 거지. 아까 말했듯 시공자나 높은 사람들은 거의 남자니까 파트너로 동성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느껴져.



Q 여러 어려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꾸준히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요?


먹고 살기 위해서지 뭐. 돈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 특히 여자들한테는, 그중에서도 나이가 있는 여자들에게는 더욱 돈이 힘이 되는 것 같아. 직업이 있으면 독립할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 (우리 또래) 친구들은 나이도 많지, 그러니까 돈 벌 능력도 없지, 그래서 가정불화가 있어도 참고 사는 경우가 많아. 남자들이 힘을 갖는 이유도 경제적인 우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에게 돈은 정말 중요하지.





Q 그렇다면 왜 아직도 경제적 우위를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많을까요?


우리나라는 성별에 따른 임금 차이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똑같은 조건에서 공부하고 대학 나와서 일을 해도, (여성들이) 버는 게 더 적은 사회 구조야. 그러면 여성들이 돈 벌어 오는 남성들한테 기댈 수밖에 없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취집’이라는 이야기를 아직도 하잖아. 그래서 남자들이 돈을 가지고 여성을 사다시피 하는 거고.

 


Q 경제적인 부분이 일하는 이유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경제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이 일의 이점이나 매력이 있을까요?


전문직이고, 오래 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왜냐하면 건축이나 설계를 하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자재, 법, 환경, 사람, 디자인과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도태되지 않거든. 그런데 또, 사람은 공부해야 늙지 않아. 그런 게 즐거움이 되지.

그리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도 꽤 의미가 있는 일 같아. 의도대로 건축물이 세워지면 그에 대한 만족감이 크지. 그런데 그 반대도 많아. 내가 큰 쓰레기를 만들었구나. (일동 웃음) 내가 또 지구에 못된 짓을 했구나. 저걸 언제 또 부수나.



Q 여성 후배들에게 이 직업을 추천하고 싶나요?


이 일은 여성들이 많이 해야지. 전문직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해야 해. 왜냐하면 전문직은 일단 힘을 가질 수 있거든. 그게 사회적인 발언의 힘도 되고 경제적인 힘도 되고. 사람들이 공학 계열이라 생각해서 남성에게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건축은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더 가까운 것 같아. 체력적인 한계가 없기 때문에 전혀 여성이 못 할 것 없는 직업이지. 보통 사람만큼만 건강하고, 디자인 능력 있고, 계속 공부할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도 할 수 있어.




# 여성 주거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Q 여성 공동 주거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가 뭔가요?


우선, 주변에 혼자 사는 여자들이 많았어. 그래서 주거의 독립성이나 안전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 예를 들면, 아파트는 너무 폐쇄적이라 느껴져서 주택에 살고 싶은데 주변에 사람이 없는 채로 혼자 사는 건 무서운 거야. 그래서 ‘같이 모여 사는 것은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어.


처음 생각했을 때는 불과 몇 년 전인 마흔 중반이었던 것 같아. 사실 사십 대만 되어도 외부 활동이 많아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여지도 많아.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그런 새로운 관계를 만들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거든. 비혼으로 살 거라는 마음에 변화가 없었고, 그래서 친구들이 모두 그런 공간을 원하고 있었지.



Q 직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런 건 아니야. 여성들이라면 누구든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지. 나도 혼자 마음속으로만 생각한 거였어.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선배, 같이 사는 것도 한 번 생각해봐요.” 그러는 거야. 그래서 “그래,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지.


공동체들이 각자의 목적에 따라 모여서 사는 공용주택이나 조합주택 같은 개념의 주거 형태가 서울에서는 몇 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했어. 그걸 보고 우리도 한 번 현실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주변에 혼자 있는 여성들이 많은데 다들 나 같은 걱정을 하는 거야. 신변의 안전, 경제적인 이유와 같은. 그러니까 ‘우리도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든 거지.


 

Q 누구나 모여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정확히 ‘여성 공동 주거공간’이라는 플랫폼이 마련되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실화할 생각은 하기 힘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는 직업이 도움을 준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건축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계획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면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아. 다만 나는 친구들보다는 법이나 절차, 진행 방법 같은 것을 조금은 더 알고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이점으로 작용하기는 하지.

 


Q 계획하고 있는 여성 공동 주거공간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나요?


먼저 합의가 된 부분은 빌라 형태로 짓겠다는 거. 땅이 비싸니까 각자 주택 하나씩은 못 짓고 위로 쌓기로 했어. 1층 한쪽에는 주차장, 다른 쪽에는 근린생활 시설이나 공동 커뮤니티를 둘 거야. 2, 3, 4층에는 사람들이 살고, 추가적으로 루프 탑 사우나, 강아지 운동장 같은 시설도 있을 수 있지. 입주자들은 여성이고, 동물 친화적이고, 조합의 규약에 찬성하는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 거야.


아직 정해진 건 이 정도인데, 생각해본 건 많아. 다들 나이를 먹으면 차를 많이 안 쓸 테니까 공유 차량을 하나 두는 것도 경제적으로 이득일 것 같고. 주거는 각자 영역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모여서 공동주방에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도 하고. 우리가 은퇴한다면 강사를 초빙해서 취미 생활을 하거나 공부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고. 누군가 여행을 간다면 남은 사람들이 동물을 봐주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상담도 하고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의지처가 되기도 하고. 결국 한번 재미있게 살아보자는 거야.



Q 선생님이 이 공간의 입주자로서 가장 기대되는 부분은 어떤 걸까요?


일주일에 한 번 저녁을 먹는 것? 같이 모여서 일상을 나누는 것들. 그런 게 좋을 것 같아.



Q 그렇다면 반대로 그 공간이 생겼을 때 우려되는 부분도 있나요?


가장 큰 걱정은 여러 명이 같이 살다가 한 명이 나가게 된다면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와 잘 맞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거야. 조합원끼리 의기투합해서 시작했지만 ‘불만 같은 게 생겼을 때 잘 해결 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있고. 많은 돈을 투자하는 거니까 이해관계를 잘 조율해야 하잖아. 아무래도 다들 혼자 살던 사람이니까 공동체 생활을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있는 것 같아.



Q 여성 주거공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내가 만들어서 공급할 생각은 없어.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외롭지 않고, 다들 각자의 (혼자 사는) 이유가 있거든. 그 사람들 중에 모여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많을 거야.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공동 주거공간을 만들고 싶다면, 그때 하면 될 것 같아. 오히려 그런 공동 주택의 공급이 가장 필요한 건 노인 분들인 것 같아.

 


Q 그래도 막상 여성이 집을 구하려면 마땅치 않은 경우도 많아요. 방범 시설이 걱정되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국가에서 여성 전용 원룸과 비슷한 여성 전용 주거 공간을 지원해준다면 좋지 않을까요?


여성 전용이라는 것에 어폐가 있는 것 같아. 많은 남성이 여성 우대라고 생각하기도 하기도하고.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걸 한쪽으로 모아서 철망을 치면, 그대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해. 그런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과 멀어지는 것 같아. 섞여 살면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Q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질문에 나의 대답은 항상 딱 한 마디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나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관심이 없었어. 그래서 결혼을 안 한 거지. 결혼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면 될 것 같아. 결혼제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끼리 배타적 소유권을 획득하는 제도잖아? 행복한 사람들 둘이 같이 살면서 공간을 꾸미겠다는 건데 (나쁘지 않지).



Q 하지만 나의 보호자가 ‘남편’이어야 하는 건 좀 억울한 것 같아요. 친구가 더 믿음직스러울 수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생활 동반자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구체적인 법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요즘은 동성애자나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현재 우리나라의 기준에서 있으면 좋을 만한 법이라 생각해. 과거의 가족의 범위가 지나치게 적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 아프거나 죽었을 때 의지할 사람을 두는 거지.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



Q 결혼을 안 함으로써 얻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까요? 그걸 어떻게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결혼으로서 얻어지는 건 법적인 것이라 생각해. 다른 것들은 결혼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지만, 법적 보호의 여부가 결혼에 달린 거지. 그것뿐인 것 같아.


애정 같은 경우는 동물이나 식물한테도 주고받을 수 있고. 애정을 꼭 사람한테 구해야 한다면 연애를 할 수도 있는 거고. 재력은 둘이 벌면 더 나은 사정이긴 하지만 둘이 쓰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능력을 키우는 게 나을 것 같고. 보호자 같은 경우는… 가끔 “친구들이 자식이 없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 장성한 자식들이 있는 게 부러울 때도 있어. 만약 친구들끼리 70대가 되어서 해외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자식 있는 사람은 다 데리러 올 거 아냐. 그러면 ‘내가 칠십에 돋보기를 쓰고 운전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 그런 면에서는 아쉬운 점도 있지만, 워낙 요즘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을 위한 복지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잖아. 그래서 ‘세금 잘 내고 자식한테 기대지 말고 사회 시스템에 기대자.’ 그런 마음으로 바뀌었지. (웃음)



Q 본인이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느끼는 부족한 것들이 있나요?


딱히 없는 것 같아. 보통 사람들은 (부족한 것들로) 애정과 성욕을 많이 꼽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욕구가 적은 것 같아.




# 50년의 페미니즘



Q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다른 것 같아. 페미니즘에도 워낙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말하는 기준이 다 다르잖아.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여남 동등의 개념이야. 반드시 이루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여남이 행복해지고 사회가 발전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더더욱 양성평등의 시대가 와야 함을, 페미니즘이 남성에게도 이로운 것임을 잘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해. 잘 가르쳐야 하는 부분도 있고.



Q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딱히 명명한 적은 없지만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나는 페미니스트였던 것 같아. 형제가 위로 언니 둘, 오빠 둘이 있는데 내 생각엔 언니들이 더 똑똑해서 공부를 잘할 것 같았어. 근데 집에서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흥미도 없는 오빠들만 교육지원을 해준 게 항상 의문이었거든. 커서 ‘나는 결혼을 하게 돼도 절대로 직업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어.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왜 항상 남자가 앞장을 서야 하는지, 남자의 발언은 중요시되고 여자들은 말 많고 나대는 걸로 치부되는지 의문이 많았지.



Q 선생님이 현재 페미니즘 운동을 봤을 때 내심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나요?


지금 페미니즘 운동 중에 이해 가지 않는 건 딱히 없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있잖아.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 그걸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불용시위’와 같은 것들로 인해 실제로 제도가 바뀌고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보면 젊은 여성들이 아주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해.





Q 맞아요. 10-20대의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탈코르셋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죠. 이처럼 어린 세대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이 기성세대 여성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하네요.


지금 보시다시피 내가 탈코르셋이잖아. 나는 그냥 예전부터 이 모습이었으니까. 내가 게으르기도 하고, 예전에 나는 스스로 중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었고. 그래서 난 이게 자연스러워. 근데 내가 생각하기엔 아름다움에 대한 선호는 인간의 본연이라 생각해. 아기들은 예쁜 거 좋아하거든. 그 선호가 있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화장이 내가 좋아서 하는 건 상관이 없지만, 남의 시선 때문에, 혹은 예의라고 생각해서 한다면 문제가 되는 거지. 내가 하기 싫고 좋음을 잘 생각해 보고 그거에 따라야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지나치게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 곧 남성들이 만든 기준이 내 기준이라 생각할 수 있잖아. 그런 면에서는 꼭 필요한 운동이지.



Q 탈코르셋 운동이 필요하다는 부분은 인정하시는 거네요.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운동을 전파해야 할까요? 일각에서는 강요의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데 싶다가도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표현에서 강요가 있다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는 평등을 원하는 사람들이야. 그 과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면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아. ‘나는 이런 방법을 택했고 이 방법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라고 표현하는 건 괜찮지만 ‘너 그냥 그렇게 해야 돼!’라는 것은 문제가 있지. 이야기는 해줄 수 있어.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내 경험을 얘기해 주는 식으로. 결정은 듣는 사람이 선택하게 두어야지. 그리고 그 효과는 분명히 있다고 봐.


나는 페미니스트는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해. 약자인 여성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인류가 같이 잘 살길 원하는 거지,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 반대편으로 기울이고 싶은 건 아니잖아.


 

Q 이런 운동이 있기 전부터 오랫동안 탈코르셋의 상태를 유지하셨잖아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사회가 강요하는 코르셋에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나는 친구들이 내 성격을 알기 때문에 “화장 좀 해~” 같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어. 그런데 스무 살 넘은 다음에 가끔 가족들이 “너도 치마 좀 입고 여자 티를 내야지. 여자가 되어 가지고 한 번도 그런 걸 안 하느냐.” 그런 얘기를 하긴 했었지.


그런데 나는 좀 개인적인 이유지만 화장하는 게 분장한다고 느껴져. 본연의 내가 아닌 것 같은 거야. ‘분칠한 인간을 믿지 말라.’ 그런 말도 있듯이 사람들은 선글라스만 써도 눈빛이 달라지잖아. 화장이 그렇게 느껴졌어. ‘본연의 얼굴과 표정이 나쁘지도 않은데 굳이 분칠하고 그릴 필요가 있나?’ 그렇게 생각했지.



Q 페미니즘이 조금 더 발전하기 위해서 현재 페미니즘에 필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법제화나 시스템화. 그리고 어릴 때부터의 양성평등 교육이 제일 중요하지. 그걸 바꾸지 않고 사람들의 관념이나 관습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해.


 


#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



Q 올해 목표가 어떻게 되나요?


난 사실 올해 목표가 없었어. 그래서 이 질문을 받고 생각해 봤는데, 일단은 아프지 말고 일을 열심히 하자는 것이 목표인 것 같아. 이 일은 오래 했지만 사무실 개업한 지는 이제 3년 차거든. 3년 차는 (이 업계에서는) 새내기야. 좀 더 일을 열심히 해서 사무실 기반을 다지자. 그러려면 우선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이 들어.


Q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야망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나는 좀 꿈도 야망도 없는 사람이었어. 옛날에 나의 유일한 꿈이 시내에서 자장면 먹고 해외여행 가는 것일 정도로. (웃음) 그래서 그걸 다 이루니까 꿈이 없는 거야. 나는 그래서 내 인생이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지금은 경제적 독립을 빨리하고 싶은 꿈이 있어. 사실 화려한 백수가 빨리 되고 싶은 거지. (웃음) 우리가 직업을 선정할 때 돈이 이유가 되는 경우가 정말 많거든. 그런데 가끔은 돈은 안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해. 그러려면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 그런 게 안정화된 이후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

 


Q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꿈을 크게 가져라. 가능한 한 빨리 가져라. 꿈이 없어서 문제야. 크고 높게 가져야 그 가까이는 가거든. 소박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꿈을 소박하게 가지면 그 이상 큰 걸 잘 못 해.


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자기 검열하지 말기. (여자들은) 사회 통념에 따라 자기 검열을 하게 되거든. 여자로서 ‘이걸 해야 하나? 이 나이에는 그런 걸 하면 안 되나?’ 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좀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 여성에게 신체의 자유가 필요한 만큼 마음의 자유도 필요해. 자기검열은 내적인 코르셋이잖아. 그런 걸 좀 덜하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즐겁게 살았으면 해.


여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남편 뒷바라지,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살지 말고. 어떤 사람들은 뒷바라지가 행복인 줄 알지만 그게 행복은 아니라고 생각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영역이 있거든. 내가 아무리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다 해도 자기 영역은 있어. 그래서 여성들이 용기를 가지고 사회에 나와서 자신의 몫을 찾아가길 바라. 당당하게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고 모으고. 경제적인 독립이 있으면 정신적인 독립도 가능하거든. 내가 아무리 이상과 정신이 높아도 돈이 부족하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사람이 지친단 말이야.


결국, 여성들이 행복해지면 남성도 분명 행복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회가 행복해질 거라 생각해.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수 누나 같은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는 흔치 않다. 우리 주위에 있는 중년 여성은 엄마, 이모, 먼 친척 혹은 직장 상사, 사장님 정도이다. 우리는 그들을 꽉 막힌 기성세대라고 부르곤 한다. 그래서 페미니즘이라는 수많은 오해와 구설수로 둘러싸인 말 꺼내기 힘든 주제로 기성세대와 대화하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그가 비혼 여성이기 때문에 혹은 가정주부가 아닌 커리어가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대하기 비교적 쉬웠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인터뷰를 통해 나이와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가 같은 고민을 겪어 왔음을,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대화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특별한 경험이 그다지 특별하다 느끼지 못할 때까지 우리는 우리 곁에 수많은 지인들과 대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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