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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매거진 Aug 30. 2020

페미니즘 담론; '남' 얘기

'신'과 같은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즘을 알게 해준, 그리고 페미니즘을 접한 후 알게 된 많은 사람이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을 지향한다는 것.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가까워진다. 쉽게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낀다. 나보다 먼저 페미니즘을 알고 실천한 사람에게는 동경이나 존경 같은 감정도 느낀다. ‘저렇게 생각해야지.’, ‘저렇게 행동해야지.’, ‘정말 멋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같은. 나를 가부장제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주었다는 고마운 마음도 든다. 그렇게 우리는 자매를 구하고 남자친구와 아이돌을 버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질감과 친밀감을 넘어 그들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그 기대가 불어나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한다. 조금의 코르셋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 혹은 여혐 광고를 한 특정 브랜드의 제품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것들 말이다.

 

 모 페미니스트 유튜버가 얼마 전 개인적인 글에 이렇게 썼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의 척도를 가리기도 전에 우리는 무조건 ‘완벽히’ 그것들을 해내야만 했다.”고. 페미니즘 이전까지의 우리는 우리를 향해 쏟아졌던 수많은 잣대를 다른 여성에게도 들이대 왔다. 어딜 가나 마녀사냥은 재미있는 이야기 주제였고, 예쁘다, 말랐다는 말이 칭찬인 줄 알았으며, 가끔 친절하지 않거나 여성 윤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여성을 욕하기 바빴다. 수많은 혐오를 겪고 자란 여성이 다른 여성을 혐오하기란 우리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비해 너무 쉽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스트의 유튜브를 보는 또 다른 페미니스트가 ‘여자는~’ 에서 ‘페미니스트는~’ 으로 주어만 바뀐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들이 페미니즘을 주제로 영상을 찍고 더 많은 여성이 코르셋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는 본질은 뒤로 한 채 영상에서 신고 나온 운동화의 브랜드가 여혐기업인지 아닌지, 커피 빨대 색깔이 여혐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색인지 아닌지에 집중했다. 그들을 포함한 페미니스트들이 원한 건 잣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용기 있는 한 명의 페미니스트가 수많은 잣대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는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우리도 모르게 여혐이 편해진 세상에서 여혐하지 않으려면 세상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잘못된 건 지적해야 하지 않은가? 내가 그들을 혐오해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이라도 목소리를 내야, 잘못된 건 고쳐야 페미니즘이 발전하지 않을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의 발전이 ‘여성의 개조’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눈에 불을 켜고 지적할 일은 사회에 널리고 널렸다. 당장 TV를 틀면 날씬한 여자 연예인을 모델로 한 다이어트약 광고, 결혼 못 한 늙은 남자 연예인을 어린 여성과 데이트시키는 예능 프로그램, 늙고 안경 쓴 정장 차림의 남자와 화장과 머리셋팅이 완벽하고 색색깔의, 라인이 들어간 불편한 옷을 입고 있는 여자가 진행하는 뉴스. 고쳐야 한다고 지적할 것은 페미니스트 유튜버 말고도 셀 수 없이 많다. 아직 여혐이 뭔지, 페미니즘이 어떤 것인지 하나도 모르는, 모르고 싶은 사람들이 페미니스트의 숫자보다 더 많다. 진정 페미니즘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 ‘고작’ 페미니스트 유튜버가 여타의 사정으로 여혐브랜드를 소비하는 일, 그리고 페미니스트 작가가 머리를 자르지 않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미 수없이 많은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걸 본 어떤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응원과 위로를 받았으며 또 누군가는 탈코르셋을 했을 수도, 다른 누군가는 가슴속에 야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이 용기 있는 그들로 인해 페미니즘을 외치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들에게 마음 깊이 공감하며 동경하고 여러 번 그들이 하는 일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한 번 실수일지 모를, 개인적인 사정일지 모를, 내가 본 그 한순간이 그들의 과거 행동을 모두 의심해볼 정도로 큰 잘못일까? 여혐기업의 제품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치마 길이만 보고 성격과 습관, 과거까지 상상해내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실수나 오차도 없는 ‘신’과 같은 페미니스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페미니스트니까, 여자니까 그런 것들쯤은 봐주자는 말이 아니다. 그냥 다 덮어놓고 여자 패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나와 같이 실수할 수 있는 한 사람이고 아직 코르셋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열심히 지우려 노력하지만 때때로 힘들어 포기할 때도 있는 한 사람, 나와 비슷하지만 다른 개인, ‘남’인걸 인정하자는 거다. 우리는 우리를 ‘자매’라고 칭한다. 하지만 실제 피를 나눈 형제들도 각자 자기의 영역이 있듯이 어제까지 남이었던 우리가 페미니즘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을 내세워서 그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 여혐기업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페미니스트 유튜버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건 순전히 남의 사정이다. 그 사람이 나와 어떤 약속을 한 것도 아니며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던 사실이 단지 그 이유로 없어지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안타깝다.’ 혹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안 그랬으면 좋겠다.’ 같은 감정 정도는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모두에게 소모적인 일이다.


 자매라고 믿었던 남에게 걸었던 기대를 이제는 조금 철수해야 한다. 그런 방향의 욕구를 그만 멈춰야 한다. 이전의 남자친구와 아이돌에게 쏟았던 자아의탁심이 이제는 ‘페미니스트 롤 모델’로 옮겨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숱하게 겪어 왔듯이, 누군가를 ‘모델’처럼 생각하고 그 원형을 멋대로 정해놓는다면, 후에 나의 모델에게서 기대하지 않은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얻는 건 배신감과 또 한 번의 상처뿐이다. 그리고 역시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는 없다는 착각 혹은 또 다른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또 다른 롤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자아의탁심의 강화 정도 밖에는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채우는 것은 내 옆의 동지, 자매의 존재를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인식이나 행동을 바꾸는 주체는 당연히 나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을 접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 가장 집중해야 할 것도 결국 나다. 여러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엔 나만이 내 의식을 구원할 수 있다. 가장 기본의 내면적인 탈코르셋은 나의 의사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쏟아야 할 에너지를 같은 여성에게 잣대를 겨누는 것으로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페미니스트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페미니즘을 지지하며 스스로 페미니스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그들 말고 진짜 비판이 필요한 곳에 목소리를 높이자.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당당하게 페미니스트로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 외에는 모두 남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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