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리매거진 Aug 23. 2020

우리 생각; '개그' 인

개그맨과 개그우먼의 차이에 대해



'개그'인




 지금처럼 살기 팍팍한 세상에도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개그맨이다. “그 재미있는 사람들 있잖아!” 했을 때, “아, 개그맨?”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어떤가? “그러면.. 개그우먼은? 개그우먼도 재미있는 사람들 아냐?” 그때부터 문제는 복잡해진다. “재미있는 사람 중에.. 여자가 개그우먼 아닐까?” 그렇게 말한다면 개그맨 안에 개그우먼이 포함되는 개념이라는 것인데, 그 포괄적인 개념에 하필 ‘맨’이라는 성별을 지칭하는 단어를 포함해놓은 것이 거슬린다. 실제 포털사이트 어학 사전에 검색해봐도, 개그맨의 뜻은 ‘익살이나 우스갯소리를 하여 일반 대중을 즐겁게 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개그우먼의 뜻은 ‘익살이나 우스갯소리를 하여 일반 대중을 즐겁게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여성’이다. 뭐야. 남자는 그냥 사람이고, 나는 뭐… 뭐, 별종이라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man은 그냥 사람이면서, women만 ‘여성’이라고 못 박아 특별한 취급을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개그맨과 개그우먼이라는 단어를 같이 봤을 때, 두 단어를 나눠서 생각하지 한쪽이 한쪽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없을 거라 믿는다) 그럼 그 두 개념을 모두 통합해서 말하고 싶으면?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 있잖아, 개그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 누구야!” 답은 어김없이 ‘개그맨’이다.



▲ 개그맨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할 결과, 여성 개그’맨’이라는 연관검색어가 보인다. 개그우먼을 포털사이트에 친 결과, 외모와 관련된 단어들이 연관검색어에 올랐다.



 이로써 개그맨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개그’맨’이라는 단어가 어떤 한 직업을 포괄하여 칭하고 있다. 둘째, 그 이유는 개그를 하는 사람 중 남성이라는 특정 성별이 디폴트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개그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며, 모든 분야에서 그렇듯이 성별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개그맨이 아닌 ‘코미디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코미디보다는 개그라는 단어를 더 친숙하게 생각하고, 나도 개그라는 단어가 좋으니 ‘개그인’이라 칭하겠다.


 이제, 두 가지 문제가 왜 생겼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두 가지 문제들에 대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차별’의 결과라고 하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여자들이 개그 별로 안 하고 싶어 하는 거였을 수 있잖아.”와 같은 논리는 언뜻 맞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개그맨이라는 단어가 개그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은, 개그인 중 개그맨이 아주 많았고(심지어는 전부였다.), 그에 따라 남성이 개그인의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럼 단 한 가지 의문점만이 남는다. ‘왜 남성 개그인들이 많았는가?’ 누군가 다시 답한다. “여자들이 개그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수요가 없으니까 일자리 공급도 안 됐던 거지.” 정말 그게 사실일까? 미묘하게 오래 겹 쌓인 촘촘한 차별인 경우엔, 사실을 사실 자체로 보지 않고 그 이면의 사실이 발생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봐야만 한다.


 여성들이 개그와 친하지 않다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아이돌이 예능에 나와도 여성에게는 재미있거나 우스꽝스러운 개인기를 잘 시키지 않고(이미 그런 걸 준비해오지도 않았다),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체적으로 개그를 이끌어간다기보다 남성 개그인의 개그를 도와주는 역할로 많이 나왔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다른 멤버들은 개그인이 아닌 남성도 개그 캐릭터로 잘만 가져다 쓰면서 홍일점은 꼭 예쁜 여성으로 둔다. 그 기저에는 개그를 우스꽝스러움과 동일시하는 인식이 숨어있다. (그것 또한 개그인에 대한 저급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은 우스꽝스러움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실제로 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여성다움’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원하는 ‘여성다움’에는 우스꽝스러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원 참. 정말 여성들이야말로 얼마나 재미있고 유머에 민감한지 모른다. 주변 친구들만 봐도 개그인 뺨치게 웃긴 친구들 한둘씩은 꼭 있고, 친구 때문에 웃다 울어본 경험도 있고, 게다가 요즘 여성 개그인들의 성장과 새로운 여성 유튜버들의 등장으로 인해 여성이 얼마나 웃기고 재미있고, 웃음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몸을 사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단지, 여성은 지켜줘야 하는 가녀리고 아름답고 도도한 것으로 취급해오는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그 규범을 강요받은 여성들이 개그인으로 많이 등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몇몇 여성 개그인들이 뜨기 시작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들의 개그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여성미’에 주목했다. 이를테면, ‘답지 않게’ 예쁘다던가, 조신하다거나, 몸매가 좋다거나 등의 여성에게 들이대는 잣대 그대로 평가했다. 유난히 못생겼거나, 뚱뚱하다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같은 잣대로 판단한 결과다. 개그인이라고 해서 개그인의 잣대(이를테면, 얼마나 웃기고 얼마나 많은 유행어가 있는지와 같은 것들)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고, 여성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든 여성의 잣대를 부여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은 근로자가 아닌 ‘여성’의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지금은 점점 그 인식을 개선해나가는 여성 개그인들로 인해 처우가 나아지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개그를 더 쉽게 받아들인다뿐이지 ‘여성성’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 남아서, 그들이 가지는 여러 가지의 자아에 해당하는 기준들이 한데 섞여 그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아직 나아갈 길이 많은 그들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


 사람 웃기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게다가 요즘같이 불편한 것 많고, 지켜야 할 것 많은 세상에는 그런 것들을 요리조리 피해 웃음을 주려면 보통 똑똑해서는 안 된다. 실제 개그인 장도연은 무지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개그를 할까 봐 신문과 책을 읽으며 공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과정을 거쳐 나온 웃음이란 얼마나 진귀한 것인가. 우리는 그 진귀한 것들에 감사하기는커녕, 여성의 ‘외모’나 ‘화장’ 따위를 논하고 개그맨과 개그우먼 사이의 ‘별종’ 같은 뉘앙스에 불편해하느라 여성 개그인들의 더 아름다운 것들을 조명할 기회를 잃고 있다. 그 시간에 그들의 빛나는 ‘웃음’에 한 번 더 주목하는 것이 세상에 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빛나는 것을 받았으면 빛나게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제는 우리가 여성 개그인들을 웃게 할 때다.



▲ 장도연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출처: SBS ‘집사부일체’]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생각;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