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이나 질병,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
안정과 동일성 속에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
<멋진 신세계> 속 세계국의 모습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세계국은 상당히 선진적이고, 살만한 곳으로 느껴진다.
굶주림이나 질병과 같은 것들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가히 진정한 '멋진 신세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배고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그곳이 신세계이자 유토피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신세계>가 디스토피아 소설로 일컬어지는 것은 작중 세계국의 모습이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일 터.
<멋진 신세계> 속 세계국은 왜 유토피아가 아닌지, 그곳에 결여된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찾아나갈 수 있을지 지금부터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A.F 632년, 대 안정의 시대이다.
여기서 A.F 632년이란 산업화의 상징이자 세계국의 모든 것인 '포드'가 등장한 지 632년이 되는 시기임을 뜻한다.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달을 등에 업은 국가인 '세계국'은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을 표어로 하고 있으며, '보카노프스키'라 불리는 인공수정 기술을 통해 필요한 정도의 인간을, 필요한 만큼 '생산'해 낸다.
'생산품'인 그들에게 아버지나 어머니, 가족과 같은 존재가 금기시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마치 공장에서 상품이 생산되듯 컨베이어벨트에서 생산되는 인간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계급으로 나뉜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생산'되는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으며, 누구도 계급이나 운명에 의구심을 품거나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끊임없이 제공되는 쾌락과 오락거리의 홍수 속에서 불만을 가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락거리로 잠재워지지 않는 불안과 고통은?
'소마'라는 알약 하나면 해결되는 그곳은 '멋진 신세계'이다.
이러한 그들의 안정적인 삶에 의문을 던진 이가 있었으니.
바로 최상위 계급인 알파계급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로 무시당하던 '버나드'가 그 주인공이다.
버나드는 세계국의 동질성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소위 야만구역이라고 불리는 뉴 멕시코로 떠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인간들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지혜를 통해 사회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버나드는 말 그대로 야만적인 모습 그 자체를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야만인 존은 버나드와 함께 신세계로 오게 되고, 세계국에 발걸음을 한 존은 이 한마디로 그 감상을 전한다.
'오, 멋진 신세계여. 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멋진 신세계여.'
그리고 야만인 존으로 인해 세계국에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하루치의 쾌락을 얻을 소마를 배급받기 위해 줄 서있는 인파를 헤치고 존은 소마를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소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당신들은 제대로 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노라고.
이후 외딴섬의 등대에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존은 끊임없이 몰려드는 세계국 시민들의 관심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작품의 줄거리를 통해 작가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성찰하고, 앞으로의 시대를 우려한다.
그리고 물음을 던진다.
우리의 시대는 과연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 세계국에 대해 버나드는 의문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에 대해 고민한다.
그의 계급이 가장 높은 알파 계급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아한 행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보편적으로 체제에 대한 의문이나 불만은 상위 계층보다는 삶이 녹록지 않은 하위 계층에서 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 답은 버나드가 가진 신체적 결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간에 버나드의 체격은 평균치 감마보다 별로 나을 바가 없었다.
하급 신분의 사람들과 접촉할 때면 그는 항상 이런 신체적인 결함을 의식하며 괴로워했다."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며 괴로워하던 버나드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곳에 내재한 모순을 인지하게 된다.
"내가 훨씬 더 나다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토록 철저히 어떤 다른 존재의 한 부분이 되기보다는 진정으로 나 자신다워진다는 거죠.
사회적인 집단의 세포 하나가 아니고요."
사회 집단의 구성품이 아닌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
그 고통스럽고도 의미 있는 욕망을 선물해 준 것은 어쩌면 버나드의 결핍이 아니었을까?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크고 작은 결핍을 경험하고, 때로는 이로 인한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나에게 결핍 따위 없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결핍은 분명한 고통이고, 삶에 등장한 가시덤불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바꾸어보면 결핍은 때로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시간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버나드가 자신을 가리고 있던 그 무언가를 결핍으로서 걷어내고 진정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걸음을 떼었듯이 말이다.
해결할 수 없는 결핍이라면 그 결핍을 탓하고 괴로워하기보다는 결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을 가져보자.
당신에게 결핍은 기꺼이 삶의 무기가 되어 줄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너한테는 이런 일이 더 맞지 않아?'
'이래서 이건 못해.'
'이 정도면 괜찮지.'
주변, 또는 나의 내면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주어진 환경, 나이, 성향으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일을 지레 포기하기도 하고, 지금의 삶을 '숙명'으로 여길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지속된 습성 훈련으로 자신의 계급,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세계국 구성원들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사랑한다는 것-." 국장이 단호하게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과 미덕의 비결이다.
불가피한 사회적인 숙명을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만드는 훈련, 모든 습성 훈련이 목표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불가피한 숙명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습성 훈련이라면,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가까운 누군가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습성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받는 길들이기 훈련은 지정된 궤도 안에서만 달리게끔 목책을 둘러놓는 셈입니다.
...
숙성기가 끝난 다음이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병 속에 머무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죠.
유아기와 태아기의 고정관념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병 속에 갇혀 살아갑니다."
진정한 인간다움을 찾고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과감하게 벗어나야 할 것들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때로는 스스로에게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습성 훈련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중한 누군가를, 그리고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고정관념과 숙명이라는 병 속에 가두어두지 말자.
그리고 잊지 말자.
'고정관념이라는 보이지 않는 병을 깰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세계국에서는 최하위 계급인 엡실론의 경우 태아를 의도적 미성숙 상태로 만든다.
태아를 정상 이하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대한 누군가의 물음에 세계국 국장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엡실론 태아는 엡실론 유전 요소뿐 아니라 엡실론 환경까지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네 머리에는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말이냐?"라고 말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다만 현재의 포커스는 '알파 환경 갖추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을지언정 내 자식에게만큼은 알파 환경을 갖춰주기 위해 여러 번의 이사도 감수하고, 이른바 '좋은 학군'을 찾아다니는 오늘날의 모습은 세계국과 닮은 듯 다른 풍경이리라.
어쩌면 작가는 다른 계급으로의 변화조차 꿈꾸지 못하는 세계국의 풍경을 통해 더욱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을 그려냈던 것이 아닐까.
바야흐로 '알파 환경 갖추기 프로젝트'의 시절이다.
지금의 알파 환경 갖추기 프로젝트는 또 다른 계급 생성의 과정일까, 혹은 세계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계급 이동의 기회일까?
또 하나의 물음을 가져본다.
'오늘이 최저가.'
'마지막 세일 찬스.'
'특별히 드리는 쿠폰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TV와 SNS를 통해 접하는 문구일 것이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을, 때로는 마지막이라는 위기감까지 들게 만드는 이 문구들은 쉬지 않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당장 이것을 사야 한다고, 새 물건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마치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세계국의 길들이기 훈련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헌 옷은 누추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속삭임이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항상 낡은 옷은 버립니다.
꿰매어 입기보다 버리는 편이 좋습니다.
꿰매어 입기보다 버리는 편이 좋습니다. 꿰매어 입기보다..."
헌 옷은 누추하다며, 낡은 것은 버리고 새것을 취하라는 길들이기 훈련의 속삭임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속삭임들과 너무도 닮아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무엇인가의 속삼임에 길들여져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우리는 끊임없는 속삭임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무수한 속삭임의 파도 속에서 기준과 신념을 가지고, 주변의 소음을 때로는 과감하게 차단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시작점이 아닐까.
"어쩌다가 불운한 우발적 상황으로 오락으로 꽉 짜인 그들의 생활에 그런 시간의 공백이 생겨난다고 해도, 그럴 때는 항상 진미의 소마가 마련되어 있어서, 반공일을 위해서는 2분의 1그램, 주말을 위해서는 1그램, 화려한 동양으로의 여행을 위해서는 2그램, 그리고 달나라에서 어둠의 영원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3그램만 복용하면 그만이지."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 잠길 짬을 낼 틈도 없고, 쾌락 이외의 시간이나 여유를 짜낼 수가 없으며..."
현실을 잊는 약인 소마와 쾌락에 젖어있는 세계국의 모습을 보며 혹자는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다.
혀를 차고 비난의 생각을 꺼내기에 앞서 우리의 일상을 잠시만 돌아보자.
퇴근 후 힘들었던 회사생활을 잊기 위해 봤던 웹툰들.
유튜브 쇼츠 영상들로 흘려보냈던 수많은 주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일상의 고통을 잊기 위해 우리는 도파민이라는 현대판 소마를 정기적으로 복용하고, 그로 인해 차분하게 삶을 돌아볼 시간과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 한 장을 넘기기 무섭게 무의식적으로 sns를 넘기고, 심지어는 tv를 틀고도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가히 소마에 중독된 세계국 구성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창 밖의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본 것이 언제인가.
핸드폰 없이 온전히 걸음에 집중하며 산책을 한 경험은 또 얼마나 오래인가.
오늘날의 소마는 우리에게서 사유와 성찰의 시간을, 인간다움을 향한 소중한 '공백'을 앗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은 외쳤다.
소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그 외침은 바로 지금, 우리들을 향한 외침이 아닐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쾌락의 알약을 삼키시겠습니까?"
생각하지 못했던 불행이 닥쳐왔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할 때 우리는 때로 쉽게 고통을 잊고, 쉬운 길을 택할 수 있는 세계국 구성원들에 대한 부러운 마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두 눈 감고, 귀 막고 쾌락에 젖어 살다 보면 고통도 아픔도 없이 삶은 흘러갈 테니 말이다.
고통과 두려움을 없애버린 세계국의 모습을 마주한 존은 이렇게 말한다.
"제거를 하셨겠죠. 예, 당연히 그러셨을 겁니다.
못마땅한 모든 장애물을 인내하는 대신에 없애버리죠.
...
당신은 그냥 돌팔매질과 화살들을 없애버릴 따름이죠.
그건 지극히 간단한 일이니까요."
내 앞에 닥쳐온 어려움을 외면하고, 장애물을 없애버리면 당장은 편안할 것이다.
소마 한 알에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나로서 살고자 하는 존재이기에 이 삶을 그저 외면하며 흘려보낼 수 없다.
때로는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질과 화살들에 시달리기도, 바다처럼 밀려오는 고난을 맞이하기도 하며 맞서 싸우고 인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움' 이기 때문이다.
편한 길을 두고 고통받으며 인고하는 삶은 어찌 보면 고달프고, 어리 석어보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어리석게 느껴지는 일련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더욱 단단해지고, 언젠가 다가올 더 큰 고난을 담대하게 맞이하고 이겨낼 수 있는 마음과 나다움을 찾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그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성취하는 가장 값진 선물이리라.
"하지만 난 불편한 편이 더 좋아요.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기꺼이 불행해질 자유를 요구한 존은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멋진 신세계'에 결여된 가장 중요한 것.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나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아닐까.
어려움을 피하고 싶은 것은 모두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살짝 고개를 돌리고 핑크빛으로 점철된 쾌락만을 바라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답게 용기를 내고, 인간답게 고개를 바로하여 '불행해질 권리'를 찾아나가자.
그 권리야말로 진짜 유토피아에서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임에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올더스 헉슬리가 그렸던 디스토피아의 세상일까, 혹은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일까?
헉슬리가 살아있다면 2024년의 오늘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다소 주관적인 시선으로 지금의 우리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로 가는 갈림길 그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듯하다.
어느덧 차는 스스로 도로를 달리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것과 구분할 수 없는 예술작품까지도 창조해내고 있다.
또한 통장 잔고로, 살고 있는 아파트로 우리만의 '알파'와 '베타', '감마'를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아직 '인간성의 유지'. 즉 '불행해질 권리'를 잃지 않을 기회 또한 사라지지 않았음을 믿고 싶다.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의 제목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소설 속 세계국에서 나타나는 '인간다움', 그리고 '자유'의 결핍 때문임을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의 사랑은 훈련된 것이 아닌 미음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행복은 화학약품이 아닌 진실된 것으로부터의 행복이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무언가를 극복한 뒤의 성취, 실패의 좌절마저도 마땅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나다움을 찾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자유를 찾고, 나 다움을 찾고.
그 안에서 때로는 행복을, 때로는 고통을, 아름다움과 불행을 느낄 권리를 잃지 않기를.
그리하여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의 갈림길에서 결국 유토피아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 또한 기꺼이 '불행해질 권리'를 웃으며 찾아나가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