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risee Mar 22. 2024

[자기만의 방]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방이 있나요?

버지니아의 글은 여성을 향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온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한 사람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할 것임에 대해서도 버지니아는 이야기한다.


저자가 직접 겪은 시대적 상황, 그리고 동시대를 향유한 문학가들의 일화를 통해 풀어내는 '자기만의 방'을 향한 이야기는 그 깊이를 더한다.


역사의 그늘 뒤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죽였던 여성들을 향해 '자기만의 방'은 이야기한다.


'여성이기 전에 한 인간임을 잊지 말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고.


비단 여성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표류하는 많은 이들에게.


늘 세상의 변두리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위로와 용기를 선사할 것이다. 





1. 옥스브리지와 펜엄 : 그들이 거쳐야 했던 투쟁의 역사


작품에서 버지니아는 두 대학의 모습을 그려낸다.


톡 쏘는 맛과 부드러운 맛이 가미된 온갖 종류의 소스와 샐러드를 곁들인 갖가지 다양한 새고기들이 푸짐하게 순서대로 나오고, 노란색, 진홍색으로 빛나던 포도주 잔들이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지곤 했던 '옥스브리지'.


그곳에서 버지니아는 이른바 '영혼에 불이 켜지는' 경험을 한다.  


미루어 짐작컨데 그 경험은 지적 상상력, 세상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의 불이 켜진 것이었으리라.


반면 평범한, 접시 바닥의 무늬를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멀건 수프가 나온 '팬엄'


팬엄에서의 시간은 '상상력을 자극할 그 어떤것도 없었다' 고 작품은 묘사한다.


오랜 역사와 자금을 통해 탄탄하게 발전해온 남성 교육 기관인 옥스브리지.


어렵게 이루어낸 설립, 그리고 이후에도 힘겹게 유지되고 있는 여성 교육 기관 팬엄. 


두 학교의 모습을 묘사하며 버지니아는 여성 교육의 위태로운 기반, 그리고 그 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만일 시턴 부인과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할머니가 그들의 아버지와 그 이전의 할아버지들처럼 돈을 버는 위대한 기술을 배워 자신들의 성만 사용하도록 전유된 연구원 기금, 강사 기금, 상금, 장학 기금을 설립할 돈을 남겼더라면, 우리는 여기 위층에서 단둘이 새고기와 포도주 한 병으로 꽤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대우가 좋은 전문직의 은신처에서 보내는 유쾌하고 영예로운 생애를 지나친 소망이라 생각하지 않고 기대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탐험하거나 글을 쓸 수도 있고, 지상의 유서 깊은 곳들을 목적 없이 돌아다닐 수도 있고, 또 아침 10시에 사무실에 나갔다가 4시 30분이면 편안히 집에 돌아와 시를 쓸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여성 교육 기관이 생겨난 것은 지난하고 힘겨운 투쟁의 결과였다.


그러나 겨우 주어진 기회는 그들에게 또 하나의 막막함과 좌절을 선사하고 있다.


극심한 어려움 끝에 '교육'이라는 기회를 쟁취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은 여성들이 또 한 번의 용기를 보여주어야 하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야할 길이 더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지나온 길에 대해. 그리고 지나가야 할 길에 대해 버지니아는 이렇게 덧붙인다.


'헐벗은 땅에 헐벗은 벽을 세워 올리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버지니아가 살아가던 시대의 여성들은 헐벗은 땅에 헐벗은 벽을 세워 올리며,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한걸음씩 나아갔다.


그리고 그 길이 끝이 아님을 버지니아는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때로는 투쟁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은 빈번히 좌절과 막막함을 동반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풀어낸다.


버지니아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생각해본다.


지금의 세상을 버지니아가 살아간다면, 그 투쟁의 시간은 끝났다고 생각할까?


우리들은 이제 진정한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2.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면?


이 글에서 이야기한 질문 하나가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만일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면?' 이라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오빠와 똑같은 재능 즉 단어의 음조에 대한 예리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연극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대 출입구에 서서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요. 


남자들은 그녀의 면전에서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연기를 하는 것은 푸들이 춤추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내뱉고는 어떤 여자도 배우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지요.


만일 셰익스피어 시대에 한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야기는 아마 이렇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천재는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에서 태어난 적이 없었으며 오늘날 노동자 계층에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재가 어떻게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감히 상상해보았는가.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셰익스피어와 같은 재능을 가진 여성 대 문호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여류 시인', 여류 소설가' 와 같은 단어만 보더라도 문학이나 지성의 영역이 기본적으로 여성의 영역이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지성의 영역에서 여성이 소외되어온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이었으리라.


우리 모두의 본성에 자리잡을만큼 말이다.


돌아보니 그 금단의 영역을 넘어선 여성에 대해 경외감과 더불어 일종의 어색함과 낯섦 또한 느껴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어쩌면 나 또한 셰익스피어의 누이를 업신여겼던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비단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에서 뿐만이 아니다.


수 없이 오랜 시간, 수 많은 곳에서 누군가는 남자 형제를 지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여자는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이유로 빛나는 재능을 잃고 바래갔으리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인해 평등의 문은 조금 더 크게 열린 듯 하다.


다만 그 문을 완전히 열기 위해, 모두에게 열려있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조금 더 남아있음을 느낀다.


버지니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강연의 중간에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고 여러분에게 말했지요.

...

이제 나의 신념은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지금의 세상에도 아쉬움을 마음 한 켠에 담고 일상에 묻혀 살아가는 수 많은 셰익스피어의 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의 누이를 상상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그늘 속에 스러져가는 빛이 아닌 스스로의 빛을 내며 빛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누이' 라는 이름이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희망을 함께 가져본다.


더불어 내 안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안에 자리하고 있을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스스로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의문보다는 희망이 더욱 크게 자리하는 삶이기를 바라본다.






3. 우리가 '자본주의' 에 눈을 떠야하는 이유


버지니아는 말한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이 달려있다.' 라고 말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공고히 자리잡은 지금의 사회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진리가 아닐까.


기본적인 삶도, 자아를 위한 공부나 지적 활동도 모두 '자본' 의 기반이 단단할 때에 가능한 일이다.


당장의 생게가 위협받을 때에, 스스로의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에 지적 탐구나 자아 실현은 사치의 영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스스로의 삶 또한 그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녀가 글을 쓰고, 강연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 또한 외숙모가 남긴 500파운드의 유산 덕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버지니아는 자기 스스로의 삶을 위해 '연간 500파운드' 와 '자기만의 방'을 가질 것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떻게 됐는지 아시잖아요.

그녀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기 지루해하면서 말했지요.

...

그것은 지난한 노력과 막대한 시간을 요했지요. 

그리하여 오랫동안 투쟁하고 극심한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그들은 3만 파운드를 모을 수 있었어요.

...

그 모든 여성들이 일 년 내내 일하면서도 2,000파운드를 모으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고 3만 파운드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일들을 다 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우리는 비난받아 마땅할 여성의 가난에  경멸을 터뜨렸습니다.."


작품은 여성들의 가난을 '비난받아 마땅한 것' 이라고 묘사한다.


가난은 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종속되게 만들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금기시하고, 여성들의 재산 축적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인식하게 만든 사회적 인식.


그로 인하여 여성에게서 자기만의 방을 앗아간 그들의 가난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며, 사람으로 살기 위해 마땅히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자아 실현의 발판이 될 수 있는 '나만의 500파운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외면하지 말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에 기꺼이 눈을 떠 스스로를 찾을 발판을 늘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단단한 발판을 딛고 서 있는가.


그 발판은 우리가 자신만의 방을 보다 크고 넓고, 풍요롭게 꾸며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단단한가? 






4. 자기만의 방 : 가지지 못한 이들은 어떠했는가?


버지니아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이 없었던 여성들의 문학이 산문과 픽션에 집중된 이유를 이야기한다.


"만일 여성이 글을 썼다면 그녀는 공동의 방에서 써야만 했을 겁니다.

...

여성은 언제나 방해를 받았지요.


그곳에서 시나 희곡을 쓰는 것보다는 산문과 픽션을 쓰는 것이 더 쉬웠을 겁니다.


집중력이 덜 요구되니까요."


인정받지 못하는. 그러나 자신의 손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수 많은 일들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없었던 여성들이 선택한 것은 상대적으로 집중도가 낮아도 써내려 갈 수 있는 산문과 픽션이었던 것이다.


이름 없는 산문과 픽션을 남긴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 그리고 500파운드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어떠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을지. 


스쳐간 수 많은 재능 있는 이들의 시간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마음을 담아본다.


버지니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 작가를 통해 그 결핍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녀의 조카는 회상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숙모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하면 숙모님에게는 종종 찾아갈 만한 독립된 서재가 없었고, 또 숙모님이 쓴 작품의 대부분은 공동의 거실에서 온갖 종류의 일상적인 방해를 받으며 쓰여야 했기 때문이다.


숙모님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인들이나 방문객, 또는 가족의 범위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오만과 편견> 이라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제인 오스틴은 일상의 방해 속에서, 그것에 순응하며 작품 활동을 해 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삶을 바라보며 버지니아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제인 오스틴이 방문객들로부터 원고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오만과 편견은 더 좋은 소설이 되었을까요?" 라고 말이다.


오롯이 글에 집중한 제인 오스틴의 손 끝에서 더 훌륭한 오만과 편견, 혹은 오만과 편견에 견줄만한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지만,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경제적 여유와 함께 한 제인 오스틴은 분명 더 먼 세상과 더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이렇게 누군가는 자기만의 방을 가져보지 못한 채, '집' 이라는 공간과 '일상' 의 지난함 속에서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 진정한 자유를 누렸던 문학가들의 이야기를 함께 접하게 될 때에는 결핍 속에서 분투해야 했던 이들의 모습에 더욱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동시대에 유럽의 다른 쪽에서는 한 젊은이가 때로는 귀부인과 자유분방하게 살았지요.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방해받지 않고 비난받지 않으면서 다양한 인간 생활을 경험했지요.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후에 책을 쓰게 되었을 때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경험으로 인생을 꾸려나가고, 이를 자양분으로 작품을 썼을 이 사람.


누구의 이야기일까?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이야기이다.


자기만의 방을 꿈꾸지 못한 채 현실을 살아가던 수 많은 여성 문학가들, 또는 문학가를 꿈꾸었을 여성들의 삶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펼쳐지지 않는가.


버지니아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때로는 괴롭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꿈꿔보고,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성취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만의 방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겐 각자만의 방이 필요하다.


그것이 물리적인 형태의 공간이든, 내적인 형태의 여유와 자아실현의 시간이든 말이다.


그 방에서 우리는 꿈을 꾸고, 나를 찾고,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방을 오롯이 간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지킬 '500파운드' 가 필요한 것이다.


제인 에어는,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간 수 많은 여성 작가들은 끊임없는 방해 속에서, 그리고 종이 조차 아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글을 써내려갔다.


어쩌면 그들이 써내려간 것은 한 줄의 글이자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던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 어쩌면 자기만의 방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방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 또한 내 마음 속의 방을 찾고, 한계 앞에 포기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절박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수 많은 이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누군가는 누렸고, 누군가는 누리지 못했던 '자신만의 방' 을 우리는 부단하게 삶에 부딪히고, 용기내어 나아가며 찾아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버지니아가 남긴 아래의 말과 같이 '누군가' 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그저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 No need to Hurry.

No need to Sparkle.

No need to be anybody.

but oneself."


이전 12화 나를 찾아가다 : 버지니아 울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