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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risee Apr 26. 2024

[난.쏘.공] '행복동 낙원구'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어디에나 있다'


난쟁이와 가족들의 삶은 어디에나 있다.


난쟁이 가족들에게는 없는 텔레비전을 틀고, 그들이 먹지 못하는 고기를 구워 먹는 옆집 이웃도 어디에나 있다.


야간 근무에 졸음 가득한 얼굴로 종종걸음을 하는 이들도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공기처럼 우리와 함께 해왔다.


그렇기에 그 명과 암 또한 우리의 곁에, 늘 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제와 오늘을 거쳐 내일도 이어질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갈 우리.


지금 우리의 삶은 작품 속 등장인물 중 누구의 모습과 가까운가?


우리가 겪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습은 난쟁이 가족들이 겪어온 자본주의의 모습과 같을까?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는 '행복동'에서 살아가지만 행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의 중심에 자본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을 이 이야기는 통렬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행복동 주민들이 자본주의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지.


우리의 자본주의는 어떠한 모습 이어야 할지.


작품을 통해 작가는 다소 차갑고 두려울지언정 이제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마주하고, 자본주의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 함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1. 그들이 살아가는 곳 '행복'동 '낙원'구


보리밥에 까만 된장, 시든 고추 두어 개와 졸인 감자로 끼니를 해결하는 곳.

철거 계고장을 손에 쥐고 가슴을 쳐야 하는 곳.

넣어줄 물건이 없어 아이들에게 주머니 없는 옷을 입혀야 하는 곳.


난쟁이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행복'동 '낙원' 구의 모습이다.


"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낙원구에 사는 그들의 하루는 지옥이고, 행복동에 사는 그들의 생활은 전쟁이다.


누군가가 진정한 행복과 낙원의 삶을 누리는 동안, 누군가는 전쟁과도 같은 시간을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전쟁에서 날마다 패배한다.


그 패배의 누적은 그들의 생활을 행복과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천국을 꿈꾸었던 그들은 어째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까?


난쟁이의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로 이어진 그 오랜 세대동안의 고생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혀가 말리도록 일한 난쟁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일한 난쟁이의 자녀들의 노력이 부족했다고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느냐'라고, '혹 범죄를 저질렀느냐'라고, '기도나 간절함이 부족했던 건 아니냐'라고 묻는 작품 속 누군가의 물음은 가난과 가난의 고통을 오롯이 개인의 탓으로 전가하는 자본주의의 냉정한 면모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에는 등장인물인 내가 숙제를 하며 '먹이 피라미드'를 그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먹이 피라미드를 보며 동생 영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래도 전 알아요.

우리는 이 맨 밑야요.

우리에겐 잡아먹을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위에는 우리를 잡으려는 무엇이 세 층이나 있어요."


동물들의 먹이 피라미드가 육체적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면, 우리 사회의 먹이 피라미드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자본' 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피라미드 꼭대기의 누가에게는 낙원이고 아래의 누군가에게는 지옥이다.


어쩌면 우리의 매일은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 진짜 '행복동'에서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2. 자본주의 생존법 : 평등하지 않은 곳에서 살아남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모두에게 공평한 세상일까?'


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이러한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 또한 자본주의의 공평함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출생부터 달랐다.

나의 첫울음은 비명으로 들렸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의 출생은 따뜻한 것이었다.

나의 첫 호흡은 상처 난 곳에 산을 흘려 넣는 아픔이었지만, 그의 첫 호흡은 편안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성장 기반도 달랐다.

그에게는 선택할 것이 많았다.

나나 두 오빠는 주어지는 것 이외의 것을 가져본 경험이 없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강해졌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반대로 약해졌다."


출생부터, 그러니까 삶의 시작부터 달랐던 그들의 모습은 산을 흘려 넣는 아픔과 편안하고 달콤한 첫 호흡의 차이만큼이나 다를 두 사람의 삶을 예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누군가의 시작은 나와 다르다.


나의 시작 또한 어느 누군가와는 다를 것이다.


그 시작의 차이를,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아픔과 편안함의 차이를 보통과 편안함의 차이 정도로 줄여볼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난쟁이는, 그의 가족들은 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난쟁이는 계속해서 자식들에게 '공부해야 한다'라고,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공부하를 하지 않고는 우리 구역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그 답은 유효하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부가 '자본주의'를 향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공원들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 밖에는 사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참으로 슬프면서도 무서워지는 문장이 아닌가.


우리가 세상을 알아가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을 외면한다면 결국 우리는 '아는 만큼만 이해하는' 삶을, 자본주의의 먹이 피라미드에서 인간성의 결핍을 느끼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잔인하지만 너무도 선명한 현실이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해 공부하고 늘 세상을 향해 깨어있을 때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최소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지키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자본주의는 '최상의 낙원'은 아니더라도 '최선의 낙원'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테니 말이다.




3. 회사가 원하는 것? = 생각 없음

  

난쟁이의 자녀들이 입사한 회사는 마치 '모던 타임스' 속 찰리 채플이 일하던 공장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작업물과 철저히 일만 하도록 강요받는 공원들의 모습은 찰리 채플린이 그려낸 바로 그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생각 없이 일할 것'


'변화를 원하지 말 것'


'그럼으로써 어떠한 추가적인 요구도, 시간의 낭비도 없이 효율적으로 일하는 부품이 될 것'


공원들을 생각 없는 부품만들기 위해 회사는 그들로 하여금 30분의 점심시간 동안 10분은 밥을 먹고, 남은 20분은 공을 차며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조금 더 일하면 회사에 돌아오는 이익을 모두 함께 나눌 수 있다는 말로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며, 어려워지면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두려움으로 공원들의 논을 가린다.


생각의 차단,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 속에 먹이사슬의 맨 밑단의 공원들은 '일깨워 줄 사람도 없이', '모르는 것이 많은 채로' 그렇게 '사장에게는 다행'인 삶을 살아간다.


지금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생각 없음'에 대한 은밀한 강요가 소비자에게까지 전가되었다는 점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퇴근 후에, 주말에 생각 없이 SNS를 보며 생각 없이 구매하는 물건들은 과연 누구를 웃게 할까?


생각 없이 일하고, 생각 없이 물건을 사고, 생각 없이 시간을 소비했던 우리의 매일은 어쩌면 먹이 피라미드 꼭대기의 철저한 계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생각 없음은 결코 우리에게 오래도록 달콤함을 선사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말이다.


작품 자본주의로 인한 고통과 무정함을 드러내지만 그 고통과 무정함에 무력해지지 않는 방법 또한 그 어느 작품보다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은 어떤 곳인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행동할 때 난쟁이의 자녀들도, 우리들도 '생각 없음에 대한 은밀한 강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생각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의 막연한 이야기로 인한 공포,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기력과 실패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움은 우리를 자본주의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닌 자본주의와 공생하며, 때로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이용할 있는 그런 존재로 성장시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라는 제도 하에서 크고 작은 상처와 좌절을 겪었을 것이다.


자본주의로 인한 상처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찌 보면 작품 속 난장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상처를 그대로 내어 보인 이 작품이 자본주의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묵직하고 아프게 다가온다.


작품을 읽는 내내 작가가 바란 세상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결국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 난쟁이 가족들이 꿈꾼 세상은 최소한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다만 행복을 꿈꾸기에 난쟁이 가족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세상은 너무도 가혹했음을 우리는 이 작품의 모든 글귀에서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자본주의 세상임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 제도가 앞으로 아주 오랜 기간 우리가 살아가야 할 토대라는 것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오래도록 함께해야 할 자본주의에서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는 방법.


그 방법을 찾아나가고 행복한 자본주의의 삶을 만들어가야 할 일종의 책임과도 같은 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불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우리가 그려나갈 자본주의의 날들은 부디 생각하고 깨어있음을 통해 펼쳐질 진정한 '낙원'에서의 날들이 기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더 이상 무지와 무기력으로 자본주의에 상처받는 '낙원구 행복동'의 난쟁이 가족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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