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빨간 날'의 루틴

by woorisee

직장인에게 빨간 날은 무엇보다 반갑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리하여 한 해의 시작에 달력을 넘기며 올해의 빨간 날은 얼마나 되는지, 휴가는 언제 붙여서 써야 최대한 잘 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은 직장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즐거운 연초의 루틴 중 하나이다.

나 또한 대한민국 직장인으로서 빨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때때로 샌드위치 연휴와 이어진 휴가를 슬쩍 올려두기도 한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공휴일.

매년 달력에서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빨간 날.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들뜨고 기다려지는 빨간 날이 있다.

어린 시절의 꼬마를 설레게 했던,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도 왠지 모르게 들뜨는 크리스마스 즈음은 조금 더 특별한 빨간 날이 된다.

'산타할아버지가 무슨 선물을 주실까?' 하는 두근거림을 선사했던 크리스마스부터 시작되는 연말의 반짝거림은 어린 나에게 어느 때보다도 설레고 즐거운 시기로 기억에 남아있다.

크리스마스 아침 머리맡에서 기다리는 선물과 거리에 울려 퍼지는 흥겨운 캐럴, 연말 내내 빛나는 거리의 풍경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지 않을까.


지금도 연말 즈음 맞이하는 빨간 날은 다른 연휴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이다.

한 해를 잘 버텨낸 나에 대한 선물 같은 시간이자 다가올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간이니 말이다.

그리고 2년 전부터 연말의 빨간 날이 기다려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추가되었다.

이른바 '빨간 날의 루틴' 때문인데, 연말을 맞이하는 이 루틴은 어쩐지 빨간 날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집의 연말 루틴은 약 3년 전, 코로나 자가격리가 끝나가던 엄마의 결심으로 시작되었다.

12월의 막바지, 코로나를 앓았던 엄마가 자가격리 후 맞이한 연휴에 '만두 빚기'를 선언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매해 명절이면 친가에서 지겹게 만들었던 '고생'의 상징 만두.

엄마도 명절마다 열두 시간씩 만두를 빚었던 것이 너무나 고생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늘 해왔던 터라 다소 의아한 선택이었다.

빠른 추진력과 빠른 배송 시스템의 합작으로 이미 집에는 만두피가 도착해 있었고, 그렇게 연말의 첫 만두 빚기가 시작되었다.

엄마, 동생과 함께 도란도란 빚어나가다 보니 만두 빚기는 생각보다 즐거웠고, 김치가 들어간 빨간 속의 만두는 그렇게 정갈하고 동그란 모양으로 냉장고에 쌓여나갔다.

만두피에 소담스럽게 만두 속을 채워 빚어나가다 보니 신기하게도 마음을 답답하게 하던 잡생각들이 조금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은근히 만두 빚기에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손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생각보다 만두를 잘 빚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자, 하나 둘 쌓여가는 만두에 성취감마저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만두 빚기로 보낸 그 해의 연말은 무려 자아성찰과 성취감까지 느낀 의미 있는 순간이 되었다.

덤으로 만두를 모두 빚고 난 저녁 끓여 먹었던 만둣국은 얼마나 맛있었는지.

만둣국 한 숟갈을 뜨고 난 우리는 그렇게 매 연말 만두를 빚기로 마음을 모으게 된다.

심지어 작년 연말에 만두를 빚은 후에는 심상치 않은 만두 소진 속도에 이번 설 연휴 추가로 만두를 빚기도 했으니 이쯤이면 우리 가족의 겨울철 빨간 날 루틴은 확실한 '빨간 맛'이다.


연말이면 우리를 식탁 앞에 모여 앉게 하는 만두.

김치가 들어가 더 아삭하고 매력 있는 감칠맛의 만두를 빚는 것은 '빨간 날'의 '빨간 맛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루틴은 나의 연말을 조금 더 따뜻하고 충만하게 채워주고, 겨울의 빨간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해가 짧아지는 겨울,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아프곤 하는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 시기만큼은 겨울도 내 마음을 든든히 채워주는 따뜻한 계절이 된다는 사실.

더불어 그 만두가 자취를 하는 동생의 냉장고에서, 우리 집 냉장고에서 하루치의 지친 몸과 마음을 녹여줄 것을 생각하면 그 뿌듯함은 배가 된다.

엄마에게는 오랜 고생의 상징이었던 만두 빚기도 이제는 연말의 따뜻한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매일의 루틴은 하루를 단단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힘을 준다.

아침마다 개는 이부자리는 하루를 성취로 시작하게 하고, 자기 전 읽은 책의 한 문장이 하루 끝을 아름답게 해주곤 하니 말이다.

하루를 잘 보내는 데에 루틴이 주는 힘이 있듯, 햇수를 거듭하며 쌓여가는 연말의 '빨간 날 루틴'은 남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도 단단하고 씩씩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살아갈 토대를 마련하는 시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빨간 맛'의 만두를 빚으며 보낸 2024년의 연말과 2025년의 설 연휴의 시간은 당분간 내게 든든한 마음속 추억이 되고, 뜨끈한 한 그릇의 식사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빨간 날'의 '빨간 맛'은 슴슴하면서도 깊고 든든한 맛으로 남은 시간을 버텨낼 원동력이 되어 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더불어 다시 돌아올 연말, 추운 겨울의 빨간 날도 빨간 맛으로 따뜻하게 감싸 안을 수 있기를.

지나온 연초와 다가올 연말 사이를 만두처럼 둥글고, 국물처럼 깊은 시간으로 우려 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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