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그대는 귀국의 맛이라네

by woorisee

여행을 하다 보면 귀국해서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 둘 떠오른다.

일주일 이상 길게 떠나온 여행일 때에는 물론이고 음식 적응이 크게 필요 없는 나라로의 여행, 또는 길지 않은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이 끝나면 가서 이걸 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 생각은 이른바 '귀국의 맛'에 대한 기대감으로 여행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도 한다.

심지어 2박 3일짜리 국내 여행을 떠나도 여행을 마친 뒤 피로를 풀어주는 음식을 먹어야 진정한 여행의 마무리가 되는 것이 나만의 여행 공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귀국의 맛'을 그려본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한국에 가면 얼큰한 김치찌개나 부대찌개와 같은 것들을 먹겠노라' 다짐하며 여행을 마쳐 본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그 강렬한 '빨간 맛'에 여독을 씻어내며 여행을 마무리했던 기억 또한 수많은 여행자들의 공통분모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귀국해서 먹고 싶은 음식, 또는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음식은 대체로 빨간 맛을 지닌 음식들일 것이다.

빨간 맛이 주는 시원함과 칼칼함은 생각만으로도 입맛을 돌게 하고,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K-DNA가 꿈틀대게 하니 단연코 한국인의 '소울푸드'이자 '귀국의 맛'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빨간 맛에 대한 열정적인 묘사와 별개로 내 '귀국의 맛'은 조금 다른 색을 지니고 있다.

여행기간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마음까지 녹여준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내 귀국의 맛은 조금 더 순할 뿐 아니라 부드러운 감칠맛까지 지니고 있다.

아삭한 콩나물에 뜨끈한 국물, 그리고 그 국물에 말아져 적당히 불은 밥까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노란색 콩나물 국밥이 바로 나에게는 언제나 옳은 '귀국의 맛'을 선사하는 음식이다.


어쩌면 조금 심심한 맛일 수 있는 콩나물 국밥이 어찌하여 내게는 귀국하면 생각나는 맛이 되었을까?


8년 전 이맘때쯤 동생과의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

여행은 너무 즐거웠으나 공항과 비행은 늘 심신을 지치게 하는 법.

늘어난 짐을 이고 지며 도착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여행을 행복하게 마무리짓게 해 줄 저녁식사와 포근한 잠자리였다.

그리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부모님과 함께 마주 앉아 먹었던 콩나물 국밥 한 그릇은 그날 내게 귀국의 맛이 무엇인지 제대로 각인시켜 주었다.


추위를 뚫고 들어간 식당의 훈훈함.

더불어 내 앞에 놓인 국밥에서 뿜어져 나오던 온기, 그리고 그 따뜻함과 함께 여행을 돌아보는 시간은 여행지에서의 추억만큼이나 풍요롭고 충만한 행복이었던 것이다.

온몸을 데워주는 국밥 한 그릇과 더불어 여행에서 마주한 각종 에피소드를 가족들과 도란도란 나눌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의 마무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게 완벽한 여행의 마무리는 복잡한 일본 지하철을 마주했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나 예기치 못하게 길을 잃고 헤맸던 하루, 드럭스토어에서 급히 소화제를 사 먹어야 했던 나의 안타까운 소화능력도 모두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일로 만들어주었다.

원래도 좋아하던 콩나물 국밥에 '여행의 추억'이라는 최고의 양념을 추가하게 된 순간이었다.


일본에서의 귀국날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던 식사 이후 나에게 콩나물 국밥은 여행의 매듭을 지어주는 음식이 되었고, 심지어는 올 가을 3박 4일의 제주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콩나물 국밥을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제주에서의 일정 내내 미역국이며 생선구이와 같은 지극히 토속적인 음식들을 먹었음에도 그렇게 나는 습관처럼 뜨끈한 한 그릇의 마무리를 떠올린 것이다.


내게 콩나물 국밥이 여행 후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음식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주말의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책임지는 음식일 수도, 쓰린 속을 달래주는 음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 겨울, 그곳에 모였던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맛과 시간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국밥집의 문을 열었던 나와 같은 누군가가 있다면 참으로 반갑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언제일까.

여행지에서의 순간도 좋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설렘은 그 여행의 행복을 배가시켜 준다.

아마 여행 전날 짐을 싸고,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상상하는 그 순간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에 가깝지 않을까.


여행의 준비가 하이라이트라면, 여행지에서의 시간 자체는 '새로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 풍경, 생활 습관과 음식까지 모든 것이 새로움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독'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여행지에 적응하며 새로움에 익숙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겐 알게 모르게 피로감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행 전의 설렘,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행복과 새로움을 만나는 기쁨만큼이나 여행 후를 정성스럽고 기쁘게 마무리 짓는 것.

새로움을 받아들이며 긴장되었을 나를 안온함으로 감싸주는 마무리 또한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여행 철학이 되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어쩌면 우리는 모두 매일이라는 시간에 익숙하고도 새롭게 적응하고 있는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일상이라는 시간을 여행하는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반복되는 업무에 지루하면서도 새로운 폭탄의 등장에 마음 졸였던 오늘을 보냈을 이들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보냈지도 모를 이들에게.

가끔씩 꺼내먹을 수 있는 나만의 '귀국의 맛'을 찾아보라 말하고 싶다.


꼭 음식이 아니어도 된다.

'귀국의 맛'은 강아지와의 짧은 힐링 시간이거나,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는 시간일 수도. 또는 OTT에서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을 보며 한숨 돌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친 뒤 콩나물 국밥으로 마무리를 하는 나처럼.

또는 반신욕으로 여독을 푸는 누군가처럼.

24시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친 스스로에게 가끔은 '수고했다' 말하며 피로를 풀어주는 '귀국의 맛'을 찾아나가자.

소소한 귀국의 맛이 내게 주는 안온함과 따뜻함이 다가오는 내일의 여행을 더욱 설레게 만들어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기억하며 우리는 더 많은 여행의 순간을 하이라이트로 만드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매일이 설렘과 새로움일 수 있기를.

그리고 지칠 때엔 가끔씩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따스한 '귀국의 맛'이 더 많은 이들의 일상 여행을 빛내주길 바라본다.

더불어 노란색의 따스한 귀국의 맛은 내 곁에 영원히 안도와 힐링의 맛으로 남아주기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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