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도 전통주를 섹시하게 마시고 싶은 세 여자의 술 투어, 여섯 번째
나의 두 여자와 연남동에 다녀왔다. 얼마 전부터 줄기차게 연남동을 어필하는 박 언니 때문. 술 마시기 좋은 바를 새롭게 개척했다나? 정확한 이름은 ‘탐닉 커피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동네라 사람 많고, 북적거릴 줄 알았는데… 이 바, 조용하니 어딘가 무드가 있다. 사장님께 물어보니 오픈한 지 두 달이 채 안됐단다. 도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는지, 참 신기할 따름.
박 언니는 이곳에서 요즘 대세라는 혼자 술 마시기, 일명 '혼술'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번 편의 ‘혼술의 정석’이란 제목도 박 언니의 아이디어다. 사실 트렌드라고는 하는데, 나한테 혼술은 어딘가 불쌍하고, 측은하다. 한마디로 짠내 난달까? 나는 혼자 방구석에 앉아 처량하게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거라고 떠올렸는데, 신쏘도 박 언니도 단번에 '놉'. 절대 아니란다. 그 무엇보다 당당함이 생명이라고.
바에 들어서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가장 좋은 자리에 앉는 두 사람. 샹들리에와 푸른빛의 미러볼이 은은하게 비추는 자리다. 종류가 하도 많아서 무엇을 마셔야 하나 메뉴판을 곰곰이 보는데, 박 언니는 더 볼 것도 없단다. 혼술에는 시크함이 생명이라며, 깔끔한 문배주를 외친다. 어떻게? 아주 당당하게. 여기에 토닉워터와 레몬은 옵션. 신쏘는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면서 에스프레소와 무화과 주스도 주문했다.
아, 맞다. 내가 말을 했던가? 이곳 탐닉 커피바에서는 커피를 비롯해 주스와 차, 술 등 여러 종류의 음료를 판매한다. 술도 전통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와인과 위스키 등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사장님한테 여쭤보니, 앞으로 더 많은 주종을 들여올 계획이라고 한다. 또, 오지랖 넓은 우리는 전통주 몇 종을 추천하고 왔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문배주 얘기를 해보자. 전통주 중에서는 워낙에 이름 난 유명인사다. 무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전통주로, 내게는 배우 최수종이 더 익숙한 고려 태조 왕건에게 진상됐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문배주는 특히 그 향기로 유명한데, 배꽃과 과실향이 난다고 한다. 정작 배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데 말이다. 역사나 가치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내 수준이 야트막하니 이쯤 해두자. 한마디로 ‘아주 죽여주는 술’이다.
일단 예쁘다. 길쭉하고, 투명한 병에 티 없이 맑은 문배주가 담겨있다. 거 참. 영롱하다, 영롱해. 내가 또 예쁘고, 잘생긴 것에 한없이 약하다. 한참 동안 요리조리 병을 살피며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신쏘가 말없이 잔을 쓱 내민다. 마셔보란다.
그래. 도전! 자신 있게 마셔봤지만, 자타공인 초딩 입맛은 아무것도 타지 않은 문배주 한 모금에 굴복하고 만다. 이것이 40도짜리 전통 소주의 위엄. 입술을 스치고 들어올 때의 그 짜릿함! 이내 서서히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향은 좀 더 인상 깊다. 개인적으로는 곧장 배향을 떠올리진 못했는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마셔보면 딱 배향이 느껴진다. 직접 마셔보니 이 두 여자가 왜 문배주를 선택했는지 알겠다. 이거, 웬만한 남자보다 더 멋있다. 그것도 꽤.
본격적으로 혼술을 보여주겠다더니, 매의 눈으로 문배주에 토닉워터를 따르는 박 언니. 여기에 레몬 한 조각을 넣어 정점을 찍어준다. 그래. 이거지! 이제 나도 양껏, 맘껏 들이킬 수 있게 됐다. 드디어 마셔도 되냐고 물으니, 가방에서 이어폰과 스마트폰을 꺼내 준다. 맞다. 얘네가 있으면 혼술도, 혼밥도 두렵지 않다. 그저 나만의 길, 마이웨이를 갈 뿐. 한 손에는 상큼한 문배주 칵테일 한잔 들고 마시면서 밀린 메시지를 읽거나, SNS로 이것저것 게시 글만 봐도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이번엔 신쏘다. 아까 주문한 무화과 주스에 문배주를 탔다며, 마셔보라고 건넨다. 누가 소믈리에 아니랄까 봐, 마시는 이를 고려했단다. 비율까지 세 가지 버전이다. 나는 당연 주스가 더 많은 세 번째다. 나는 무화과를 이날 처음 먹어본 촌년. 원래 무화과에서는 수박 맛이 나나? 어디 하나 튀지 않고 밸런스가 딱 맞는다. 시원한 수박 맛이 나는데, 끝에서는 숨어있던 문배주가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특유의 향은 확실히 숨겨지지가 않는다. 이건 에스프레소에서도 마찬가지. 어디에 섞어도 자아가 뚜렷하다. 역시 멋있어.
혼술, 정말이지 신경 쓸 게 아무것도 없다. 문배주만 벌컥벌컥 들이켜도, 우리처럼 무화과 주스에, 커피에 취향대로 마셔도 된다. 그저 온전히 이 순간을 즐기면 그만. 이래서 다들 '혼술, 혼술' 하는 거구나.
장기자: 양조장 취재 몇 번 다녀온 거로 '나 술 좀 알아.' 폼 좀 잡다가 큰코다친 애송이 기자이다. 목표는 프로 애주가! 전통주 공부를 핑계로, 두 여자를 살살 꼬셔 신나게 술 투어를 다니고 있다.
신쏘: 듣기에도 생소한 전통주 소믈리에이다. 맨날 전통주만 마실 것 같지만, 주량에 대해 물어보니 '맥주 다섯 잔'이라고 얘기하는 우리의 드링킹 요정. 단순히 술이 좋아 시작한 게 눈 떠보니 업으로 삼고 있다.
박언니: 자타공인 애주가. 술 좋아하는 고주망태 집안에서 태어나 '난 절대 술은 안 마실 거야'라며 주문처럼 다짐했다지만, 막상 성인이 되어서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이 술이었단다. 느지막하게 열공모드에 돌입, 얼마 전에는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도 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