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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슴 Oct 27. 2024

[스누트] 황경신의 글짓기 여행 1

너는 나를 잃었다.

제내용


“너는 나를 잃었다”

-단순하게 시작해보지요. 한때 가까웠던 사람, 언제부턴가 멀어진 사람의 이야기. 그 사람과 당신이 만나고 함께하고 멀어진 이야기. 그로 인해 무언가가 달라진 이야기. 당신이 잃어버린 것과 얻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잃어버린 것과 얻어버린 것에 초점을 맞춰보세요.

-여러 가지 장르로 풀어낼 수 있지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도 있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잃었다” ‘모차르트는 나를 잃었다” “릴케는 나를 잃었다” 타임머신, 평행우주 등장 가능. 책이나 영화 속으로 진입 가능. 동화도 가능해요. “내가 키우던 애플민트, 너는 나를 잃었다” 나와 애플민트의 만남과 이별을 대화로 풀어갈 수도 있어요.

-하나 더 가볼까요? 당신의 무지막지한 가능성이 제대로 된 운을 만났을 때 펼쳐질 일들. “노벨상(어느 분야이든)은 나를 잃었다” “아카데미(혹은 봉준호 감독)는 나를 잃었다” “대한민국은 나를 잃었다”

-방향을 틀어보지요. 이제부터는 마구잡이로. “코끼리는 나를 잃었다”(오, 재밌겠다!) “화성은 나를 잃었다”(당신이 화성을 탈출한 그날)  “죽음은 나를 잃었다”(영원히 살게 된 당신)


당신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사람(글 속에서). 자존감을 쭉 끌어올리세요.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쓰세요.



과제제출


너는 나를 잃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한 달째 연락이 없는 여자 친구. 이유도 모른 채 기다린 시간의 앙심을 종이에 새겼다. 작업복을 벗고, 세탁소에서 찾은 수트의 비닐을 벗겼다. 회색 프라이드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세차까지 마쳤다. 데이, 이브, 나이트. 무작정 병원으로 가는 길. 헤어지는 길은 변두리 도로같이 비좁고 구불거린다.


1999년 청주 변두리 왕복 2차로, 버스 종점에 고등학교 정문이 있다. 토요일 오후 12시. 자율학습을 마친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흩뿌려진다.

‘구릉구릉’ 잠자코 있던 버스 하나가 꾸물거린다. 파블로프의 실험용 개가 된 양 아이들은 순식간에 뛰기 시작한다. 선발대가 뛰니 뒤따르던 아이들도 연달아 뛴다. 버스 행선지 간판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타야 할 버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4분의 1 확률에 팔다리 근육과 좌심실의 수고를 건다. 토요일이라 배차간격이 더 늘어져, 앞선 버스를 놓치면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 버스가 가까워지자 더욱 빨리 뛰는 아이와 멈추는 아이들로 나뉜다. 행선지를 본 것이다. 25%의 행운과 75%의 헛수고. 82년 개띠의 일진이 좋다던 오늘의 운세는 누구에게는 맞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틀렸다.

버스를 보낸 아이들은 주인 없이 문이 열려 있는 버스에 골고루 올라탄다. 그리고 라이방 쓴 기사님이 금박 어금니와 누런 송곳니 사이로 이쑤시개를 집어 넣으며, 묵직하게 채워진 동전통을 전완근이 선명하도록 움켜쥐고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늘 그렇듯 기다림은 하염없다.


한쪽에는 버스를 타지 않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왕복 2차로, 길어깨로 나와 이따금 지나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히치하이크. 오늘의 운세를 다시 한번 시험하고 싶었을까? 스포츠조선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테니. 드문드문 차가 서고 손을 들었던 아이들을 두셋씩 태우고 출발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남았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계속 기다릴지, 길 건너 정류장에서 텅텅 빈 버스를 탈지.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며 걷기로 했다. 차가 나타나면 운전석을 유심히 쳐다보고 손을 흔들었다. 사실 운전석 유리는 햇빛이 반사해서 뚫어져라 들여다본들 사람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을 보고 있어요.’하는 애절한 눈빛이 중요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맞닥뜨린 여러 운전자 중 하나였다. 아이는 내 차가 모퉁이를 돌아 밤톨만 하게 보이자, 손을 치켜들었다. 아무도 없는 길가에 교복을 입은 아이. 400m 전에는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고, 200m가 되자 그가 손을 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와 거리가 100m로 가까워지자, 히치하이크를 알아차렸다.


아이와 50m 거리, 그의 앞에 노랗고 검은 사선의 과속방지턱이 보여 브레이크를 지르밟았다. 줄어든 속력만큼 그의 눈이 반짝인다. 친구들은 모두 사라지고 혼자 남아 팔을 아래위로 열심히 흔들고 있는 아이. ‘불쌍한데, 태워줄까?’

‘아니다. 버스도 있는데, 얻어 타려는 거 아니야? 태워주지 말아야 버릇을 고치지.‘

‘돈이 없을 수도 있지. 나도 학생 때 회수권 10장을 11장으로 잘라서 탔잖아. 오병이어의 예수님이 바로 나였지.’

‘아휴.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모르는 애랑 말 섞기 싫다. 그냥 가야겠다.’

왔다 갔다, 고민하는 사이 프라이드는 과속방지턱 위를 덜컹 넘어 그를 지나쳤다. 동시에 사이드미러로 그를 흘겨보았다. ‘속도를 줄이다가 안 태워주다니,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나를 원망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아니면 주먹 감자를 날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거울 속 그는 내 차를 흘긋 보고는 뒤에 차가 오는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차가 보이지 않자, 그는 다시 걸었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좀 기분이 착잡해.’ 나는 그에게 나의 사정을 텔레파시로 보냈다. 그리고 여자 친구를 마주쳤을 때의 인사말을 연습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안녕! 잘 있었어?”


오후 2시. 그녀가 일하는 대전의 종합병원. 14층 병실 프런트에는 그녀가 없다. 데이와 이브는 아니다. 그렇다고 나이트 근무조가 출근하는 밤 9시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인수인계를 마치고 차트를 보고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A 간호사 오늘 근무하나요?” “아니요. 오늘 안 나오세요.” “그럼, 이거 전해주시겠어요.” “네...”

나는 헤어짐의 결심이 적힌 편지를 꺼내어 그에게 쥐여주고 뒤돌아섰다.


주차장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유리를 쓸어 올릴 때마다 끼익하는 마찰음이 났다. 시동을 켠 차 안은 라디오도,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고, 와이퍼가 켜는 느릿한 울음소리만이 달팽이관을 맴돌았다.

그녀는 왜 갑자기 연락을 끊었을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 대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집에 데려다 줄 때만 해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야근하는 중에도 계속 연락을 해보고, 밤에 집에 찾아가 봤지만 만날 수 없었다. ‘다른 남자가 생겼을까? 내가 뭘 잘못했지?’ 상상 속 이유는 가지각색이었지만, 꼭 들어맞는 답은 없었다. 연락이 끊긴 지 한 달이 지나자, 결심했다. 헤어지기로. 사귄 것은 몇 개월이지만 이렇게 흐지부지 이별할 수는 없었다. 편지를 썼다.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리고 왜 헤어지기로 결심했는지. 꾹꾹 눌러쓴 편지지를 예쁜 편지봉투에 담았다.

이별이 예쁠 리 없다. 기분 같아서는 갱지에 쓱쓱 적고, 쪽지로 접어 줘야 했다. 쪽지를 펴면 회색 갱지에 이렇게 적혀 있겠지. ‘뒤를 보시오.’ 그리고 뒷면에는 ‘바보’.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은 쏟아지는 비처럼 시원할 줄 알았는데, 비에 젖은 속옷을 입은 것처럼 꿉꿉했다. 섣불리 단념한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는 봐야 하지 않을까?

한번은 돌려세워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녀를 정말 좋아했을까? 나는 정말 속이 좁구나. 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그녀가 보내는 작은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지 않았을까? 오늘 길에서 아이가 뻗은 손을 잡아주지 못한 것처럼 나는 몹시 무관심한 사람인 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 나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친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스치지도 못한 의미 없는 사람. 나를 토닥이며 함께 울어주던 와이퍼만도 못한, 무심한 사람이었다. 나는 오늘 그를 잃었고, 사랑을 떠나보냈고, 누구에게도 의미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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