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석 Oct 23. 2022

삶의 끝, 모순의 시작

이찬혁, <장례희망(Funeral Hope)>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한할 것 같던 나날이 마침표로 끝나게 되는 날,

그날의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이며 날씨는 과연 어떨까?


우리는 장래희망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미래의 끝인 장례의 희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장래희망이 아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장례희망.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의 끝을 희망하고 있을까?

이찬혁의 신곡 <장례희망>을 들으며

삶의 끝에 대한 미약하지만 생생한 신호를 포착했다.




삶의 끝에는 수많은 모순이 존재한다.


영혼을 육체와 분리하여 타자화시킨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장례식은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아는 얼굴 다 모였네 여기에
한 공간에 다 있는 게 신기해
모르는 사람이 계속 우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 미안해
- 이찬혁, <장례희망> 가사 中


각자의 삶이 있어 연락만 주고받던 친구,

서로 사는 곳이 달라 모이지 못한 동창.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등 돌려 버린 전 연인,

흐르는 강물처럼 스쳐 지나가버린 수많은 인연

피라는 진한 연결을 지니는 친인척까지.


살아있을 때에는 각자의 이유로 보지 못했지만

죽음은 모든 이유를 말끔히 지워버린 듯하다.

그러고 와서는 멈춰있는 초상화를 바라보며

돌아오지 않을 줄 알며 질문을 던진다.


존재의 끝을 의미하는 죽음이

어째 존재를 상기시키는 동기가 되어주며,

왜 그것이 어떤 모든 이유에 선행하게 하고,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 존재를 찾아오게 할까?




또 다른 모순은 삶의 회상에서 나타난다.


수많은 일로 가득 찬 삶을 그 끝에서 돌아보면,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와 그닥 뭐가 없던 여자의
슬픔이 좀 과하게 보이길래
놀랐네 돌이켜보니 그러게
우리도 미묘한 신호가 있긴 했네
머리를 쾅 한 대 맞은 듯하네
이제 머리는 없지만 알기 쉽게
- 이찬혁, <장례희망> 가사 中


삶의 종점에서 걸어온 자취를 바라보면

매 순간에 정답이라 생각되는 선택이 보인다.

그 정답에 비추어 매 순간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선택에 대한 씁쓸한 평가가 내려진다.


그러면 그 선택은 씁쓸한 선택이 맞는 걸까?

그 순간에서의 선택은 그 자체가 정답이었고,

당시를 둘러싼 변수를 고려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벌어질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미래에서의 관점과

주변의 환경만 인지하는 순간에서의 관점의 차이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




이러한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까?


그전에,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삶의 끝에서야 마주할 수 있는 모순을

현재로 끌어 들어와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그 시공간의 존재가 현재의 존재와 연관이 있을까?

그러나 삶의 끝은 한 번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서서히 잠식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중 삶의 끝에 도달할수록

이러한 모순을 점차 크게 체감하게 될 것이다.

결국 현재의 존재와 연관이 없지가 않다.


모순의 해결은 후회를 남기지 않음에서 시작한다.

각자의 삶이 있다는 이유를 핑계 삼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이들과의 시간을 내는 것.

어떠한 선택을 내리든 나 자신이 믿는 선택을 하고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는 것.

모순의 여지를 주지 않음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한편으로 비인간적이다.

아무리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고 하더라도,

후회를 완전히 없앨 정도로 완벽하지는 못하다.

필연적으로 부스러기처럼 후회는 남기 마련이다.


불가피한 후회는 다른 감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모든 걸 알지 못했기 때문에
뭣 같고 즐거웠어 삶이란 게
- 이찬혁, <장례희망> 가사 中

삶의 끝에서만 볼 수 있는 정답을 지금은 모르니

후회를 웃어넘기며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태도.

이를 비롯해 나만의 감정이나 생각 박스를 통해

후회라는 입력을 원하는 출력으로 가공해야 한다.

결국 감정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는 방법이지만,

결점의 존재인 우리에게 불가결의 방식이다.




삶의 끝은 우울하고 답답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삶의 끝을 배척해야 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불로장생의 삶에는 의미가 없으며 고통스럽지만,

죽음은 삶에 의미와 목표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삶의 끝에 대해 고민해보고 상상하다 보면,

이를 지탱하고 있는 삶이라는 사건에 대해

우리가 배우고 실천할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 뒤에 있을게요, 항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