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 아닌 것

by 계속계속


직장에서 나의 업무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자료와 결과물을 요구해야 하는 일이다. 수십 명에게 각자의 결과를 요구하면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여준다. A 후배는 그중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면 지체 없이 내가 요구한 자료를 보내준다. 그날은 동료들이 보내주는 개인 업무 자료를 통일된 양식의 완성본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A는 내가 요구한 정보만 보낸 것이 아니라 이전 양식에 내용까지 입력 후 완성본을 만들어 보냈다. 이전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중간에 부장님의 첨언에 따라 디자인이 변경되었고 이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정된 디자인에 개인 업무 자료가 담긴 내가 만든 완성본을 받게 되었다. 이미 A는 자신이 만든 완성본을 전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양식이 공유될 수 없는 포맷이라, 미리 A에게 다른 사람의 결과물을 보고 자신의 결과물과 내가 만든 결과물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그랬더니 A가 나에게 한 말은


-선배님이 안 보내주셔서 몰랐어요. 저만 못 보냈네요.

설명을 해도 웃으면서 끝까지 반복했다.

-네~ 바쁘셨죠? 저한테는 안 보내주셔서 몰랐어요.


묘한 화법이었다. 더욱 난감한 것은 나만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대가 의도한 태도였다면 오히려 덜 당황했을 것 같은 그런 말. 무엇이라 규정짓기 어려운 기운이 은연중에 묻어나는 태도.


그런가 보다 하고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부장님께 A가 찾아와 드릴 말씀이 있다며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시간이 길어지더니, 결국 두 사람 사이에는 격양된 목소리가 오고 갔다. 회사에서 개별적으로 맡는 보다 독립적인 업무가 한 가지씩 있는데 결국은 전체 직장의 방향과 같이 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부장님은 전체 회의 시간에 A의 부서 부장님께 독립적인 업무와 관련한 사항을 말씀드리고 개인적으로 A에게 한 번 더 말하겠다고 전달된 사항이었다. 그런데 A는 부서 부장님께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찾아와 자신과 의논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말을 했다. 부장님은 회사 내부 업무 추진 과정상 겉으로는 불리해 보여도 A의 업무에 전혀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라 재차 설명했지만 A는 반복해서 말했다.


-저에게 이렇게 하겠다 말씀도 안 해주시나요? 왜 저에게 설명해 주지 않으세요?


그 자리가 괴로웠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삽시간에 침묵이 흘러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귀만 열려 있는 상황이 불편했다. 그 자리에 A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을 상기했고. 더욱 놀란 것은 내가 '나이'를 따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내가 A에게 느끼는 이 부유하는 감정을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이름처럼 오랜 시간 날 괴롭혔다. A의 일화는 꽤 시끄럽게 사람들 사이를 오고 갔는데, 학번으로 A와의 나이 차이를 짐작하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의문으로 점철되었던 A에 대한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원하는 대학을 진학만 하면 인생이 완성될 거라는 철없는 생각은 몇 마디 호구 조사 후 ‘oo지역 쪽 애’로 불리면서 쪼그라들었다. 마음에 한기가 들어 어찌나 춥던지, 수족냉증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라 지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모교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그곳은 교정이 참 예뻤다. 오래된 학교여서 나무들도 우거졌는데 낮에 벚꽃이 비처럼 내린다고 까르르거리던 농구장에서 밤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이곳이 낮에 거닐던 그곳이 아니라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옆으로는 나와 다를 바 없는 뽀얀 볼에 핑크색이 질서 없이 칠해진, 늦은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얇은 옷차림의 그들. 같은 학번이라는 이유로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 대각선 앞 동기의 이름을 몰랐다. 그녀도 날 몰랐다. 그래서 움직여야 했다. 앉고 서고 앞으로 뒤로. 너무 추워서 그 대열 속에서 걸어 나왔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딸이라 외치는 아버지가 대학 합격 축하로 주신 용돈으로 산 가방이 나무 아래 다른 치들의 가방 아래 삐죽 구겨져 있었다. 바람이 불어 쏟아지는 하얀색인지 붉은색인지 모를 꽃잎 사이로 터져 나오는 붙잡는 소리들을 밟았다. 정말 추웠었는데, 나만 추웠었는지 혼자 이탈자였다.


그때의 꽃 추위가 20대를 잡아먹었다. 여러 번 표류하던 감정들이 흩어지고 모이면서 감춰두는 정서가 만들어졌다. 청춘이라 불리던 그 시절이 뻥 뚫려 있어서일까. 젊음이 주는 잘못할 리 없다는 치기 어린 A의 당당함이 못내 부러웠다. 수십의 눈이 쏠릴 걸 알면서도 자신의 말을, 생각을 내뱉을 수 있는 그 방자함이 부러웠다.


쪼그라들어 남은 인내마저 닦고 닦아 마음을 저 깊은 서랍 속에 감춰두길 주저하지 않는 내가,

내가 가져보지 못한, 내 것이 아닌 것을 마주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은교' 중


이 말을 여전히 곱씹는 이유를 A를 통해 알았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나를 오늘은 인정한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 자신의 것을 뿜어낼 수 있는 스스로를 향한 의심 없는 태도.


그 젊음이 사무치게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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