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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씨, 이 씨"로 시작하는 컴퓨터 자판 익히기

by 우선열


나이 70이 되어서 뒤늦게 컴퓨터 배우기를 시작했다. 다섯 손가락을 자판 위에 얹고 자판 익히기부터 시작한다.

"우 씨. 이 씨"

때 아니게 시시 때때 성씨들을 불러 모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성씨들을 불러 모으는 건 아니다.

'우 씨', '이 씨"'만 계속 찾고 있다. 아버지가 우 씨, 엄마가 이 씨라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독수리 타법을 다섯 손가락 사용으로 바꾸는 중이다


70 평생을 컴맹으로 살았으니 겁나게 두꺼운 컴퓨터의 벽이 쉽게 깨질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미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니 그 영역이 넓고 깊을 수 있다고 지레 짐작하여 기초부터 탄탄히 하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었다. 신문물을 외면한 대가로 받는 피해 의식을 조금만 없애면 충분할 것 같았다. 컴맹이 겪는 서러움 말이다. 신문물로 인해 불편해진 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깔고 깔고 또 깔아야 하는 앱과 모스부호처럼 모호하기만 한 키오스크 정도만 해결하여 신문물을 외면한 대가로 받는 피해 의식을 조금은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자판은 안 하고 싶어요, 독수리 타법으로도 별 불편함 없거든요. 특별한 업무를 맡을 계획도 없으니 실생활에 써먹을 꼭 필요한 기능만 배우고 싶어요"

컴퓨터 강사 앞에서 당당히 의견을 말했고 같이 컴퓨터를 배우려는 나이 든 수강생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우리가 지금 실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능만 몇 가지 골라서 배우고 싶어요"

'그러시지요, 자격증 딸 거 아니시면 굳이 자판 익히느라 애쓰실 거 없을 거 같네요,

자판 건너뛰고 한글 문서 들어갑시다"

이렇게 해서 얼렁뚱땅 컴퓨터 배우기에 돌입했다. 아이스크림도 입맛에 맞게 골라 먹는 세상인데 할 수 있다면 배우고 싶은 것만 골라 배워도 좋을 듯했다


한글 사무자동화 과정을 거쳐 파워포인트와 액셀 과정까지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 내려갔다. 기계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숨어있는 컴퓨터 기능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처음엔 두렵기만 했던 기계 괴물이 기본만 잘 지켜주면 충실한 심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정확한 인풋이 있으면 기막히게 일을 잘 하지만 알아서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융통성 없는 기계에 울분이 터지기도 했지만 구석구석 숨어 있는 기능들을 이용하는 재미가 있었다. 잘 만하면 강사가 가르쳐 준 기능 외에 응용도 가능해지는 신기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아직 조작이 서툴기는 하지만 컴맹 수준에서 보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문서작성 요령을 조금 파악하니 문서 작성할 때 일단 글자를 입력해야만 알맞은 서류를 작성할 수 있다는 현실에 직면했다. 타자 익히기를 건너뛰었으니 더듬더듬 독수리 타법으로 하는 문장 입력은 한계가 있었다. 새 기능을 배우기 위해 문장을 입력할 때마다 독수리 타법이 짜증스러웠다.

"선생님, 서류 작성하려면 어차피 글자 입력을 해야 하네,

타자가 느리면 문서작성이 힘들겠어요 "

"아무래도 그렇긴 하지요, 서류 작성하려면 기본이 글자 입력이니까요"

"그런데 왜 타자 연습 안 시켰어요?" 하려다 입을 꼭 깨물었다

나서서 타자 포기 선언을 선동한 건 나였다. 꼬리를 탁 내리고

"선생님, 지금부터 타자 다시 시작할까요?"

"그러세요, 아무래도 문서 작성에는 타자가 기본입니다, 기본이 튼튼하면 좋지요 "



컴퓨터 배우기 2개월 만에 다시 타자 배우기에 돌입해야 했다, 백지에 처음 그리기는 그림 그리기는 그래도 쉽지만 이미 얼룩진 곳에 그리는 그림은 얼룩을 지우는 과정이 더 필요해진다. 2개월 만에 다시 배우는 타자가 특히 그렇다. 2개월 동안 알게 모르게 엉터리 타자 치기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일단 제자리에 손을 놓기가 영 힘들다, 타자는 빨리 치고 싶고 손가락은 말을 안 듣는다. 약지 손가락을 써야 하는 ㄴ에 엄지손가락이 먼저 닿는다. "우 씨" 나도 모르게 소리친다, 검지를 길게 늘여야 하는 ㅎ을 쓰려니 ㄴ에 닿고 마는 손가락이다. "이 씨" 하려다 입을 다문다.

다른 건 몰라도 살면서 고운 말을 쓰려는 노력은 하는 편이다. 고운 말도 자신이 없으니 적어도 '욕은 하지 말자'로 고치기는 했다. '욕을 하지 말자' 정도는 제법 지키는 편이다.

성인군자도 운전대를 잡으면 욕이 나오는 법이라 하는데 처음 운전을 배우면서도 갑자기 끼어드는 커다란 트럭이 있으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으면서

"트럭은 무서워, "였고

깜빡이도 안 켜고 머리부터 들여 미는 대형 버스에게도

"11번 버스는 안 탈래"

하는 정도가 내 수준이었다. 운전 연수를 도와주던 강사가 안타까워하며

"이 XX 야, 눙깔에 보이는 게 엄니?'"

하며 욕하는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 어렵다는 운전대 잡고 욕하기도 버텨낸 내가 컴퓨터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연신 ' 이 씨, 우 씨'를 찾으며 급한 성격과 느린 손재주를 탓하고 있다


굳어진 손가락과 약해진 근육으로 타자를 익히는 일이 쉽지는 않다. 마음껏 연습하고 싶은 욕심과는 달리 20분만 지나면 손가락에서 팔로 퍼지는 통증이 느껴진다. 고통스럽다고 까지는 말 할 수 없지만 불편하기는 하다

"이제 배워서 뭐 하려고, 그냥 마음 비우고 살아 "

컴퓨터 배우느라 동동 거리는 내 모습을 본 친구들의 반응이 생각나

"무슨 영화를 보려고..."

하는 혼잣말이 나오기도 한다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우 씨, 이 씨"에 민망하기도 하지만 배워가는 과정이 나쁘지만은 않다

컴퓨터 말만 나오면 주눅이 들었는데 두려움이 없어지고 웬만한 컴퓨터 이야기는 알아들을 수 있으니 자존감이 회복되는 듯도 하다.


태어날 때 접하지 않은 문명에 익숙해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한다. 내가 컴퓨터를 못하는 건 시대 탓이지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려는 내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은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우 씨 이 씨'에서 급한 성격을 알아차렸으니 너그러워지려는 노력도 해보려 한다. 노년은 품위 있고 온화하게 보내려 했던 젊은 날의 다짐도 상기해 본다.

지금도 자판을 안 보고 타자를 칠 수 있는 수준은 물론 아니다. 원고를 힐끔거리며 자판에 눈을 고정해야 다섯 손가락 사용이 원활해진다.

나이 들며 조급한 성격이 조금 누그러졌건만 컴퓨터 지판 앞에 앉으면 A 씨가 자주 튀어나온다. 우 씨 이 씨를 찾는 것 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컴퓨터와 조금은 친해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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