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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보름달

칠순을 맞은 후배에게

by 우선열

2025년 첫 보름달은 경주에서 보았다. 경주는 늘 가고 싶은 도시 중 하나이지만 자주 갈 수는 없다. 경주라 천리 길이니 말이다. 교통이 편리해졌으니 가고자 하면 못 갈 것도 아니건만 아름다운 곳은 많고 갈 곳도 많다.

신라 천년의 고도로 우리 민족의 뿌리이니 언제든 가고 싶은 곳이지만 '언제든'이 아니라 '이번만'이라는 유혹에 밀리고 만다. 가까운 곳과 새로운 곳들이 발목을 잡는다. 경주는 가깝고도 먼 곳이 되었다.


80년대 초반 울산에 거주하던 때는 경주 나들이를 자의 반 타의 반 자주 할 수 있었다. 모처럼 울산까지 나 찾아온 지인들과 경주 동반 여행이 필수 코스 중 하나였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니 경주도 이젠 옛날 경주는 아니었다. 경주도 변하고 내 환경도 변했다. 이젠 경주를 자주 드나들 처지가 못된다. 다시 가 보고 싶은 도시이긴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는 없다. 경주 보름달이 마음에 남는 이유 중 하나이다.


제주에서 올라온 후배와의 동행이니 경주에 도착한 시간이 여섯 시 가까운 시간이었다. 칠순을 맞은 후배로부터 경주여행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부랴부랴 떠나온 여행길이다. 동지가 지났건만 아직은 해 지는 시간이 이르다. 경주에 밤이 내리고 있었다.

"새해 첫 보름달이야"

동궁과 월지에 도착한 순간, 지나던 행인이 하던 말이다. 새해 첫 보름달, 섣달 보름이긴 하지만 2025년 첫 보름달이 분명하다. 휘영청 밝은 달이었다. 달도 후배의 칠순을 축복하는 듯하다.


보름달을 올려다본 첫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이사 온 집에서였다. 둘째 큰어머니께서 지신을 밟아야 한다며 정월 대보름날 밤에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눈빛이 하얗던 보름날 밤이었다. 눈빛인지 달빛인지 세상이 온통 하얗게 빛이 났다. 둘째 큰어머니는 정 많고 온화하시던 평소의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달빛 아래 서서 우리를 둥글게 둘러 세우고 붉은 팥알을 흰 눈에 뿌리시며

"그저 그저 일 년 내내 편안하고 그저 그저 건강하고 ㅇㅇㅇ"

중언부언 무슨 말인지 불분명한 그러나 우리를 향한 축원이 분명한 말들을 간절한 어조로 읊조리셨다. 아주 경건하고 범접지 못할 위엄이 보였다. 어렸지만 우리 오 남매는 감히 곁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야 했다. 대낮처럼 환하던 기억이다. 60년 전 이건만 지금도 눈앞이 환해지는 듯하다.


기억의 힘이다. 기억은 사실보다 느낌이나 감정에 좌우되는 듯하다. 아직 그때 그 달보다 크고 환하게 빛나던 달은 보지 못했다. 첫 경험이 주는 경이로움이 아닌가 한다. 그때 이후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편이다. 무궁무진한 하늘의 변화를 좋아한다. 하늘이 땅 위에 있다는 사실 외에는 시시 때때 변하는 게 하늘이다. 맑고 푸른 하늘이 검고 어둡게 변하기도 하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이었다, 수줍은 새 아가씨의 볼 빛처럼 아슴해지기도 한다. 태양과 별과 달이 노는 곳이다


그중 변화무쌍한 것이 달이다. 주기적으로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는 시간도 다르다. 태양은 하늘을 변화시키고 별은 늘 같은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달은 스스로 모양의 변화시킨다. 보름달이거나 초승달 그믐달 때로는 반달로 뜬다. 일정 기간에 따라 정해진 대로 변하는 것이지만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기는 충분하다. 이성과 감성은 길이 다르다


경주에서 본 새해 첫 보름달에서 유년의 보름달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둘째 큰엄마의 축원을 이젠 누군가에게 돌려줄 때인가 보다. 칠순을 맞은 후배에게 행복한 노후를 축원해 본다. 유년의 보름달과 칠순의 보름달은 같지만 다르기도 하다.


유년의 보름달은 차오르는 보름달을 연상하지만 칠순의 보름달은 기우는 보름달로 비유되는 것이 인지상정,

노후는 삶을 마감하는 쓸쓸한 기간이니 비우고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우면 다시 채워지는 게 세상의 이치이다.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것과 같다. 다시 차오를 것을 믿는다.


노후는 노후의 삶이 있다. 젊은 시절과는 다르지만 다르다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싫건 좋건 100세 시대를 맞이했고 노후의 삶이 길어졌다.


섣달 보름달이기도 하고 새해 첫 달이기도 한 보름달, 칠순을 맞은 후배가 70대의 노후 생활을 시작하는 달이다. 그녀의 노후를 축복한다

"칠순을 축하합니다. 겪어보니 70은 그리 나쁜 나이가 아닙니다. 나이 듦을 인정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여요. 꽤 괜찮은 70대입니다. 노년의 황금기라고 할까요? 70대의 행복한 길을 아름답게 보내기 바랍니다.'


그녀에게 보낸 70 축하 메시지이다. 내 70대의 고백이기도 하다. 나이 듦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노후의 새로운 길을 볼 수 있었다. 나이 들어 새로 시작하는 글쓰기 공부이다. 어렵고 지난한 길이 될지도 모르지만 글쓰기를 통해 삶을 통찰해 보는 시간이 좋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는 시간이다. 젊어서 시작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나이가 들었기에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다고 위로하고 있다. 젊은 시절과는 다른 여유와 평화가 있다.


이제 70대의 길을 들어서는 그녀에게도 보름달 같은 밝은 빛이 비치기를 기원해 본다. 팔 순이 되면 그녀와 경주에 다시 가 보고 싶다. 80대에는 또 어떤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날도 보름 딸이 뜨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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