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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바라기와 히아신스

작은 사치

by 우선열


책 한 권을 샀다. 고동주 에세이 집 '사랑 바라기',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고 들고 다니기에 딱 좋다. 바다와 산등성이, 나무와 동백꽃이 그려진 표지가 책을 펼치기 전부터 마음을 설레게 한다. 스토리가 궁금하여 빨리 읽어치우고 싶은 소설과는 달리 에세이집은 오래 곁에 두고 읽고 싶고 읽을 때마다 글에 대한 느낌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좋게 보면 난이나 나쁘게 보면 잡초'라는 책 속의 글귀를 생각나게 한다. 마음이 넉넉할 때는 고운 난이지만 번잡한 일에 시달리고 있으면 난조차도 귀찮아지니 나이만 들었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이 철 덜 든 할머니 같다가도 조금은 모자란 듯한 이런 내 모습이 좋기도 하다. 무거운 것 절대 들지 말라는 의사의 분부가 있어 가방 안을 철저히 비우고 다녔건만 작은 에세이집 하나가 들어 있는 가방이 나를 흐뭇하게 한다. 이러다 허리 통증을 느끼게 되면 다시 가방 속을 비우는 유난을 떨게 될지도 모른다. 여우의 신 포도처럼

"가지고 다녀도 책 펼쳐 볼 틈도 없잖아, 눈도 나쁜데 책 읽느라 애쓸 필요도 없고, 세상이 얼마나 좋아 이어폰만 귀에 꽂으면 들을 수 있는 책도 얼마든지 있어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 없어"

혼잣말을 해대면서 말이다. 이런 변덕이 없다면 에세이집 한 권을 손에 넣는 일이 이리 즐거울 리는 없을 것이다.

길동무가 되어 외출할 때마다 가방 속에 들어가는 책과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힌 책을 보는 소회와는 아주 다르다. 책꽂이의 책이 온실 속의 화초 같다면 가방 속의 화초는 길가에 핀 야생화 같다. 언제 어디서든 뜻하지 않은 기쁨을 준다. 혹시 약속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무례한 친구가 있어도 가방 속에 책 한 권이 들어 있으면 기다리는 조급증이 사라지고 마음이 넉넉해진다. 늦는 친구의 초조한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책 한 권의 행복이다. 이런 작은 사치가 좋다


사치가 필요 이상이 돈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한다는 네이버 사전의 정의이니 사치라기는 말이 조금 사치스러운 것 같기는 하다. 행위에 비해 넉넉하고 즐거운 마음이니 나름 감정의 사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맘때 이른 봄이면 이런 작은 사치를 또 하나 앓는다. 5년 전쯤 우연히 만난 꽃 파는 아가씨 때문이다. 학비를 벌기 위해 사무실마다 꽃을 팔러 다니는 아가씨한테서 히아신스 한 송이를 샀다. 친구가 눈짓으로 강렬하게 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젊은 아가씨의 학구열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얘, 이런 꽃, 시장에 가면 세 송이에 만 원이야, 내가 그렇게 사지 말라고 눈짓을 했건만 "

친구의 타박에 조금 마음이 상하기는 했다. 한송이 만원에 샀으니 말이다. 수선화나 튤립같이 청초하고 예쁜 봄꽃도 많건만 두리뭉실한 히아신스 꽃송이가 못마땅해 보여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 놓았는데 이튿날부터 히아신스 꽃 덩이 속에서 작은 꽃들이 하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신비한 파란색이었다. 히아신스는 여러 송이가 피어 마치 한 송이처럼 보이는 그런 꽃이다. 밀물 퍼져 오듯 꽃송이는 조금씩 피어 커다란 한 송이를 만들어 간다. 아침마다 조금씩 번져가는 파란색의 기적을 보는 듯했다. 꽃송이가 커지면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이면서도 끝까지 꽃송이를 피워낸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를 닮은 겸손이다. 송이송이 꽃송이가 열릴 때마다 고운 향기도 같이 번졌다. 음전하고 부지런한 여인네의 발자국처럼 소리 없이 주변에 스며들었다. 한동안 피는 꽃을 보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는데 '화무십일홍'이라 하지 않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꽃이 지는 서러움을 감당해야 했다.


미련이 많은 성정이다. 있을 때는 소중함을 알지 못하거니 외면 데면 하다가도 떠나고 나면 상실의 아픔을 이기지 못한다. 몽당연필이나 목 늘어진 셔츠들을 쌓아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정든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무생물도 이러할진대 물 주며 애지중지 보살피던 히아신스가 지는 모습은 감당하기 힘든 애처로움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히아신스를 앓는다. 지는 아픔을 감내하고라도 히아신스 한 송이 들이고 싶은 마음과 차마 지는 모습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한다.


활짝 핀 꽃 앞에

남은 운명이

시드는 것 밖에 없다 한들

그렇다고 피어나길 주저하겠는가?


시 한 구절에 힘을 얻었다. 올해는 파란색 히아신스 한 송이 들이려 한다. 지는 것이 서러워 피지 않는 꽃은 없다. 지는 꽃이 서러워 꽃 한 송이 기르는 것을 마다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미 나는 히아신스를 알아버렸다

지고 말더라고 주변을 물들이는 고운 향기와 푸른색의 신비를 기억하고 있다.



좋은 책을 읽고 싶으면 무거운 가방을 감당해야 하고 히아신스의 봄을 누리고 싶으면 시드는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좋은 책 한 권과 아름다운 한 송이 히아신스가 사치스럽다는 말이 조금 사치스럽기는 하나 이번 봄에는 이런 마음의 사치를 한껏 누려 보고 싶다. 철 덜든 노파의 변덕이 가져오는 마음의 사치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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