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기록

by 우선열

김장을 100포기씩 하고 토굴을 파서 배추며 무 같은 채소를 보관하고 연탄을 벽면 가득 쌓아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만석꾼, 천석꾼이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월동 대비책이긴 했지만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뭐든 미리 준비해 놓아야 했다. 그 시절, 광 열쇠를 누가 가졌느냐는 집안의 중요한 문제였다. 열쇠를 물려받는 것은 며느리가 집안에서 인정받는 징표였으니, 그것을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며 때로는 첨예했다. 광 열쇠는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가정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열쇠를 손에 쥔다는 건 집안을 다스리는 권력을 쥐는 것과 같았으니,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미묘한 암투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시어머니의 ‘시’자도 싫다는 며느리들이 있는 건, 아직도 그들 사이에 해결해야 할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부부끼리도 각자의 재정 관리를 하는 독립 채산제가 늘었지만, 한 남자가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겪는 관계의 문제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처럼 남아있다.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쌓아 놓는 것이 생존의 한 방편이었겠지만, 경제 사정이 나아진 산업화 시대에는 생존과는 다른 결의 수집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 우표 수집, 딱지 수집, 연필, 지우개, 일기장과 가계부, 사진 앨범 등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무언가를 모으던 시절이었다. 여자들은 집집마다 예쁜 그릇 수집에 열을 올렸다.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이 일상이었던 여자들도 찬장 안에는 보기만 해도 흐뭇한 예쁜 그릇들을 가득 채워 놓곤 했다. 어쩌면 부족했던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였을까. 그 시절의 취미 활동은 온통 수집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백과사전이며 시리즈 문학 전집이 거실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순수한 독서의 목적보다는 집안의 지적 수준을 은연중에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있어야 비로소 남들에게 인정받는 집안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헌책방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잊힐 뻔한 귀한 고서적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책이 있는 거실에는 오래된 미술품이나 도자기들이 멋스럽게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먹고살기가 윤택해지자, 이번에는 미니멀리즘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커다란 금고에 가득 보관하던 재산은 이제 카드 한 장으로 간편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굳이 쌓아 둘 필요가 없어졌다. 집집마다 몇 권씩 놓여있던 가족사진 앨범과 벽면을 가득 채웠던 액자들은 이제 스마트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가의 예술품조차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시대가 되었다. 소유권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니, 굳이 개인이 실물을 보관할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제 장소의 제약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초월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과거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가상현실을 통해 미리 체험해 볼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들의 가치는 이전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세상, 바로 미니멀리즘의 시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넓고 수천만 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나만이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추억과 생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경험과 생각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자신만의 발자취를 묵묵히 수집해 가는 과정과 닮아있다. 텅 빈 냉장고와 최소한의 조리 도구 외에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소유가 거의 없다 해도 나는 불안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글쓰기를 통해 나의 생각과 지나온 소중한 추억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수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록들은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