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은 장항선 완행열차를 탄다

by 우선열

눈이 내렸다. 성긴 눈발이다. 모처럼 내리는 눈이 반가우면서도 내심 걱정이 앞선다. 나이 드는 게 슬픈 이유는 몸은 늙는데 마음이 늙지 않는 데 있다더니 꼭 지금의 내 심정 같다. 마음은 눈 밭에서 뛰어노는데 현실은 질척하고 미끄러운 길이 마뜩지 않다. '혹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이럴 때 다치기라도 하면 정말 최악이야' 혼잣말이 나왔다. 얼마 전부터 속 썩이고 있는 일 때문일 수도 있다. 시간이 가면 해결될 일이건만 조급증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사흘 굶은 시어미 얼굴처럼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눈발이 조금씩 흩날릴 뿐이었지만 좀체 그칠 것 같지도 않았다.

'오려면 펑펑 쏟아지기라도 하지, 쪼그려 앉은 거지처럼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잖아"

심술이 잔뜩 들어간 내 말이 거스릴만도 하건만 친구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했다.

"모처럼 오는 눈인데 왜 짜증이야, 학창 시절엔 강아지처럼 눈밭을 뛰어다녔잖아, 너 여고 입시 보던 날 생각나니?, 눈이 엄청 왔었지, 시험 끝나고 공원에서 "눈 쌓이듯 시험 성적도 높았으면 좋겠다"라고 네가 말했었잖아. 넌 늘 앞서갔지, 그땐 네가 몹시 부러웠어"

"뭔 얘기가 하고 싶은데, 지금 내 꼴이 우습다는 거니?"

나도 모르게 눈이 세모꼴이 되고 언성이 높아졌다.

"그럴 리가, 늘 앞서가던 네가 부러웠다는 말이야, "하더니 내 손목을 잡아끌며

" 너 완행열차 타봤니? 우리 오늘 완행열차 타 볼까?, 눈이 와서 걸어 다닐 수는 없고 눈 오는 모습은 보고 싶고, 이럴 때 완행열차를 타는 거야, 느리게 가는 기차 안에서 눈 내리는 모습 실컷 보자, KTX 타고 씽씽 달리는 것 하고는 다른 운치가 있어, 느린 건 내 전문이야 나만 믿고 따라와"

뾰족한 내 말에 개의치 않는 친구의 마음씀이 고마워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우리 장항선 타 볼까? 한 때 항구도시로 북적이던 장항이 지금은 조용한 작은 도시야, 그때 물류의 중심을 이루던 장항선도 이젠 무궁화호가 느리게 달리며 명맥만 유지하고 있어, 젊은 시절을 바쁘게 보내고 별 할 일 없이 노년을 맞은 우리들 모습 같지 않니?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장항이지만 동병상련이랄까? 어쩐지 친근감이 들어서 말이야, 꼭 장항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차창 밖으로 눈 오는 모습을 보다가 작은 간이역에서 내려 가락국수 한 그릇 먹고 돌아오자 "친구의 말이었다.

지금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단 한 명의 친구이다. 차마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고 있는 나를 말없이 옆에서 지켜봐 주는 친구. 시간이 가면 해결될 일이라지만 속수무책 기다려야 하는 일이 내게는 고통스러웠다. 여러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일이라 잠시 명의를 빌려 준 것이 화근이었다. 일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걸 두려워하여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법적인 일은 절차가 있어 잘잘못을 밝히는 일은 까다로웠다. 모든 일에는 증거가 필요했다. 다행히 관련 서류가 있고 친구가 증인이 되어 사건은 잘 해결되어 가고 있지만 기다리는 동안이 내게는 하루가 여삼추이다.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고 나만 낙오된 것 같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하루하루 가슴을 조이는 시간들이 느리게 지나간다.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초조한 시간이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우리 남편 11남매 막내아들인 거 알지? 그것도 시골 과수원집이잖아, 겨울철에도 양말 한 켤레 제대로 신어 보지 못했대, 어린 시절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 그 사람 지독한 짠돌이야, 요즘 세상에 아이들 양말도 못 신기게 하는 거야 , 내가 맞벌이해야 하는 처지인데도 분유값을 아까워해, 너무 힘들었지만 평생 같이 살 사람인데 어쩌겠니, 천천히 하나씩 고쳐가기로 다부지게 마음먹었어. 열개를 양보하고 한 개를 얻었지, 그렇게 20년 걸렸어. 지금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지만 힘들게 남편과 하나씩 맞춰가는 동안 친구들은 앞서 가는데 나만 뒤처지는 것 같더라, 나만 완행열차를 탄 것 같아 싫었어, 항상 앞서가고 매사에 자신만만한 네가 부러웠어" 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잠시 쓸쓸함이 지나갔다.

"벌써 광천이다 , 광천 새우젓 알지? 김장철엔 너도나도 장항선을 타고 새우젓 사러 몰려들곤 했지, 서해의 싱싱한 새우를 토굴 속에서 숙성시키면 맛있는 새우젓이 되잖아, 인생도 그런 것 같아, 싱싱한 젊음도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 지혜와 여유가 생긴 지금도 괜찮지 않니? 요즘 나는 느리게 살아서 내 삶이 더 단단해진 건 아닌가 생각해, 막상 나이를 먹고 보니 늙어 가는 모습은 누구나 비슷하지 않니? 나는 느리게 살아왔지만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본 것 같아. 급행을 타면 빨리 지나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과 풍광들. 살아보니 조금 천천히 가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 힘든 일도 기쁜 일도 다 지나가고 말거든,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 일들이 모여 지금 내 모습으로 남는 거지, 나는 천천히 살아온 지금 내 모습이 좋아, 완행열차가 느려서 답답해 보이지만 빨리 지나는 것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어 " 독백하듯 말을 마친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커 보였다. 친구는 20년 세월을 느리게 살며 삶을 숙성시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온 것이다. 친구는 아직도 조바심을 내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나 보다

그날 장항선은 느리고 또 느렸다. 차창 밖은 뿌옇게 흐렸지만 눈발사이로 스쳐 지나는 나목이 보였고 멀리 산등성이가 가물가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나도 젊은 시절 빨리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그녀처럼 묵묵히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제야 내 발목을 잡았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남보다 빨리 앞서 가고 싶었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먼저였다.

장항선 차창 밖으로 느리게 지나던 눈 오는 풍광들이 떠올랐다. 혹독한 추위를 빈 가지로 견디고 있는 나무들과 멀리 보이던 산등성이의 아련함,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이 궁금해졌다. 차츰 젊은 시절, 서두르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과 만나지 못했던 마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나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불안감과 조급함을 잠재우며 느리지만 단단한 발걸음을 내디뎌 보려 한다. 천천히 차곡차곡 눈 쌓이듯 글을 써보겠다. 잘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달리느라 보지 못한 주변을 살펴보며 내 인생을 천천히 써 내려가보겠다. 몸은 늙되 늙지 않는 마음을 가졌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눈 오는 날, 장항선 완행열차에서 나는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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