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와 호야

by 우선열

탄천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갈 때 우리 집에는 호야 꽃이 피었다

호야 키운 지 5년 만의 일이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 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탄천 산책길에서 보리밭을 만났다.

도심에서 보리밭을 마주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보리가 여름에 수확하는 작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도심에서 발견한 황금 물결은 느닷없고 생경했다.

얼마 전까지 푸르고 싱싱했던 청보리였다

수확의 기쁨보다는 잃어버린 푸르름이 아쉬운 건 나만의 소회일까?

동전에도 양면이 있듯이 세상사에는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풍요로운 수확에는 소멸의 아쉬움이 있고 씨앗 하나가 썩어야 새싹이 움틀 수 있다.

황금빛의 풍요로움 보다 날로 푸르러지는 청보리의 생명력을 탐하는 마음은 단순히 옛 추억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겨울 한 철 인고의 삶을 버텨온 청보리도 가야 할 때가 있다

풍요를 누리는 시간이 그 마지막이다.

슬프지만은 않다

마지막인 줄 알면서 단 한 번 예쁘게 피는 꽃들,도 있고 500년 만에 한 번 피고 죽는 선인장도 있다

우리 집 호야가 처음 핀 건 작년 8월, 우리 집에서 자라기 시작한 후 5년 만이다

내 가난한 베란다 화분에서 5년 동안 잘 커주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는데

호야는 이따금 잎이 노랗게 혹은 핑크빛으로 물들어 키우는 즐거움이 더했다

지난해에는 산세비에리아 싹이 유난히 예뻤다

그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건만 열악한 환경을 마다않는 새싹이 기특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했다

산세비에리아 큰 화분을 앞에 놓고 작은 호야 화분을 뒤에 놓았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잘 자라기만 해다오' 그런 심정이었다

무럭무럭 자라는 산세 베리아의 싹이 대견했다

여름의 막바지 휴가를 끝내고 귀가한 날이다 집을 지켜 준 화분들을 돌아보다가 뒤편에 수줍게 핀 호야 꽃을 발견했다

처음엔 산세비에리아 꽃인 줄 알았다

호야 줄기가 산세비에리아 이파리 위에 걸쳐있었다.

"꽃이 피었네"

꽃 송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 꽃잎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거친 내 손길 때문일까? 자책이 밀려왔다.

그냥 두고 보았더라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만 같았다

망연자실, 한동안 제자리에 꼼작 않고 서 있었다.

시들어 버린 꽃의 아쉬움보다 자책이 앞섰다

5년 이상 산세비에리아와 호야를 키우면서 꽃이 어떻게 피는지 언제 피는지 모르고 있던 청맹과니였다

호야 꽃이 주인을 기다리느라 사력을 다하여 버티고 있었나 보다 생각하니 무심한 처사를 견디기 힘들었다

산세비에리아 그늘에 가려두고 꽃이 피는지 지는지 알지도 못했던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려 준 것이다

'이제부터는 잘 보살펴주리라, 내년 여름에 꼭 다시 호야 꽃을 보고야 말겠어' 굳은 다짐을 했건만

호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화분의 흙이 마르면 물을 흠뻑 주는 것 밖에는 따로 할 일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꼴이었다.

그럼에도 꽃이 보고 싶다는 염치없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4월이 되자 여기저기서 호야 꽃 개화 소식이 들려왔다.

염치는 없으면서도 노심초사 꽃 피기만을 기다렸다

꽃이 피더라도 작년처럼 8월 일 거야' 스스로를 위로했다

5월 초 호야 늘어진 가지에 드디어 꽃망울이 맺혔다

'심 봤다','할렐루야' 머릿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 한 송이, 뒤이어 두 송이가 더 꽃봉오리가 맺혔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주인을 잘 만났다면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았을 텐데

무심하게 팽개쳐 두었으니 민망할 따름이었다

호야 꽃봉오리는 오래갔다

주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앙다문 꽃잎을 좀체 열지 않았다

하루 이틀을 넘어 일주일 남짓 시간이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염없이 바라봐 주는 일뿐이었다.

베란다 문을 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문을 닫는 것으로 일과를 마쳤다

자고 알아나니 챔피언이 되었다더니 자고 일어난 어느 날 호야 꽃 한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내 꽃이었다

시샘하듯 맺혔던 두 송이도 연달아 피기 시작했다

오월 한 달, 호야 꽃으로 인해 행복했다

어렵게 핀 호야 꽃은 오래 버텨 주었다

거의 한 달을 활짝 핀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던 호야 꽃 한 송이가 지고 말았다

화무 십일 홍이라는데 한 달 남짓 내 곁을 지켜 주었으니 아쉽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만큼 정이 든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

아직 두 송이가 남았으니' 애절함은 덜하다 '피고 지는 꽃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황금 보리의 풍요함도 거친 겨울을 이겨 냈기에 누릴 수 있다.

호야 꽃은 척박한 내 베란다 화분에서 5년 만에 꽃을 피웠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고 저마다의 길이 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에 젖어 있기보다는 나만의 길을 가꾸어야 한다

도심에 핀 보리도 부족한 내 베란다에 핀 호야도 그 자리에 있어서 아름답다

아무것도 대신할 수는 없다

조금 늦어도 괜찮고 척박한 환경도 견뎌야 한다.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