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생 이윤진
전기세를 못 내더라도 딸아이 레슨비는 마련해야 했다
콩쿠르를 앞두고 맹연습을 하고 있고 유력한 입상대상이라고 학교에서도 기대를 잔뜩 하고 있으니
딸아이의 장래가 걸린 일이기도 했지만 남편이 정신 차리기를 바랐다
나를 믿고 가장의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캄캄한 방에서 컴퓨터도 켤 수 없는 아이들이 불쌍했지만 독하게 마음먹었다
기본적인 생활비는 남편 몫이라는 걸 분명히 했다
이를 갈며 분해하던 남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존심 때문에 가지 않던 꽃 시장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다
집안일도 나누어하기로 하고 아이에게도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집안에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니 마음은 놓였지만 부담감이 엄습했다
제대로 내 몫을 해내야 했다
각 부서마다 부장이 있었고 부서별 특색이 있었다
우리 부장은 자동차 영업의 베테랑이었으며 연고 영업에 일가견이 있었다
부장은 단정한 용모를 우선시했다
주부에서 영업사원으로 변신한 모습을 확실하게 주변에 알려야 주변의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꼬불꼬불한 내 파마머리가 신경 쓰인다
파마 값도 만만치 않으니 오래 가게 하려면 서너 달을 버틸 수 있는 꼬불꼬불한 인디언 파마가 제일이다
우아한 세팅 파마도 있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고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꽃 시장에 있을 때 사 입은 초록색 옷이 제일 예쁜 옷인데 영업장에서는 작업복이란다
유능한 커리어 우먼다운 모습에는 감색 정장이 제일이라며 은근히 옷 장만을 부추겼지만
아이들 준비물조차 제대로 챙길 수 없는 지금 내 감색 정장을 마련할 수는 없다
부장의 교육내용대로 변한 내 모습을 주변에 각인시키려면
커리어 우먼 다운 말투로 바꿀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앞에다 놓고 상품 설명을 하기도 하고 작업 중이라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품 설명 연습을 해서
녹음하고 다시 듣기를 되풀이했다
거칠던 말투가 좀 세련되는 듯도 했다
제법 상품성멍이 입에 붙을 즈음 연습 삼아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 얘, 그렇지 않아도 관심이 있었어,
그렇게 좋은 거니? 너 믿고 해도 되지?, 너는 어떻게 그렇게 말도 잘하니?"
친구의 반응이다
일사천리로 첫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른바 아이스브레이크이다
영업사원의 첫 계약은 얼음 깨듯 힘들어서 지어진 말이라고 한다
급여 외에 두둑한 수당이 지급되어
어느 정도의 생활자금이 확보되니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회사 내에서의 시선이 달라졌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는 영업일이지만
끝까지 자리 잡고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였다
일단 아이스브레이크가 이루어지면 첫발을 뗀 셈이니 그때부터가 출발이라는 것이다
비로소 직원으로 인정된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