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생 명희 씨 4
콧대 높고 꿈 많던 스무 살 아가씨가 마지막 엄마의 유언을 받들어야 했다
"느이 아버지는 평생 돈 한 푼 벌지 않은 사람이야
어린 너에게 미안하지만 니가 동생들을 거둬야 한다
니가 나를 제일 많이 닮았다 미안하지만 부탁한다 "
동생들의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어깨가 무거워졌지만 아버지를 믿었다
평생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자상하고 정이 깊었다
돈 버느라 바쁜 엄마 대신 딸들을 알뜰하게 챙겨준 것도 아버지였다
엄마 몫까지 더 깊어질 아버지의 사랑을 믿었으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떠난 엄마에 대한 사랑이 더 컸다
몇 날 며칠을 장례 절차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슬픔이 컸고 술에 의지했다
아버지의 술시중을 들면서도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믿었다
엄마 잃은 설움이 가장 큰 첫딸인데 명희 씨는 동생들을 보살피랴
아버지 시중을 들랴 자신의 슬픔은 안으로만 고여갔다
얼마 안 가 시간이 해결책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술을 마시는 일 뿐이라는 걸 알아 버렸다
명희 씨는 여자에서 엄마가, 가장이 되어야 했다
다섯 동생들과 아버지를 보살펴야 했다
눈썰미 있고 손재주 있는 명희 씨는 미용사를 선택했다
가끔 동생들의 머리를 손질해주면서 듣던 칭찬들이 있었고
명희 씨도 머리모양을 만들며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기도 했다
6개월 속성과정을 마치고 미용사가 되었다
처음부터 명희 씨는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예쁘고 상냥하고 부지런하니 남의 미용실에서 경력을 쌓을 때에도
원장님과 손님들의 사랑을 받곤 했다
어머니가 비축해 놓은 돈들은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자취가 없었다
다섯 동생들의 학비를 감당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니었지만
동생들이 언니를 믿고 잘 따라주었고
엄마 없는 아이들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도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그녀는 집 가까이 미용실을 열기로 결심했다
어느 정도 솜씨에도 자신이 붙었고 무엇보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잊지 못하셨고 현실을 도피하여 술에 의존했다
잠시라도 손에서 술병을 놓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본성이 순하고 약한 편이어서 따로 주사가 심한 건 아니었지만
점차 술에 취하면 어머니를 찾아 길거리로 나서곤 했다
하루하루 집을 찾아 들어오는 날보다 파출소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의 술시중을 동생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파출소에서 연락이 오면 원장의 눈치를 보며 달려나가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집 근처에서라면 아버지를 돌보는 일도 용이하리라 생각했다
하루 종일 미용 일에 시달려 다리가 붓고 입술이 터질 정도로 피곤할 때도
그녀는 파출소로 달려 나가야 했다
몸이 힘든 건 그래도 견딜 수 있지만
아버지를 보는 모멸 어린 시선들을 감당해내기 쉽지 않았다
"쯧쯧 " 등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취한 아버지에게 포악을 떨었다
"차라리 나가 죽어"
동생들 앞에서도 거친 말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오곤 했다
말뿐 아니라 그녀의 심신도 지쳐
차라리 아버지가 안 계시면 일상이 훨씬 행복해질 것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보라고 아버지를 설득하기도 했다
그날은 그녀의 설움이 폭발한 날이기도 했다
어머니 기일에도 아버지는 만취 상태가 되어 있었다
엄마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자식들의 수치로 살고 싶냐고 자식들의 앞길을 막지 말라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온갖 폭언을 퍼부어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