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름 으로 91

54년생 경자씨 2

by 우선열

힐끗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경자 씨의 입이 앙 다물어져 있다

눈도 안 마주치고 경자 씨는 슈퍼에 새로 들어오는 물건 때문에 어질러져 있는 박스들을

빈 점포 한편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마치 고용주 말을 듣고 움직이는 사용인 같았다

"화난 거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신경 쓰지 마, 좀 있으면 풀어지겠지"

긴 손톱에 매니큐어 칠을 하며 셋째는 무심히 말했지만 편치 않았다

얼굴을 치켜드는듯한 셋째의 자세가 오늘따라 더 오만하게 보였다


서너 번쯤 경자 씨의 풀죽은 모습을 더 보았을까?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상가 정기회의를 마치고 우리는 오갈 데 없이 상가에 갇히고 말았다

사교적인 셋째는 슈퍼 사장단과 주거니 받거니 가벼운 술자리를 벌리고 있어

자연스레 경자 씨와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빗소리가 요란하네 어릴 적 살던 동네 앞에 큰 개울물이 있었어

그 개울물 흐르는 소리 같아, 아버지가 날 등에 업고 건너주시곤 했었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야, 동네 귀염둥이였지,

아버지가 사고만 안 당했어도 그렇게 귀하게 컸을 거야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활고를 겪던 엄마가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재가를 했어

어려울 때마다 엄마 원망 많이 했지, 강원도 산골까지 엄마 찾아 간 적도 있어

술주정뱅이 새아버지와 살고 있더라고,

날 버리고 갔으면 잘 살기라도 하지 이게 무슨 꼴이냐고 퍼부었던 기억도 있어.

그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천애 고아로 살았어,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도 없고, 제일 쉬운 게 식모였지 부잣집으로 가면 배곯을 염려는 없었으니까,

그때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나 봐, 궂은 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하게 돼"

"워낙 부지런하고 깔끔하잖아, 경자 씨가 나타나면 상가가 환해져, 그래서 사람들이 경자씨 좋아하잖아"

" 그래, 선우 너는 정말 나한테 잘해줘, 어떨 땐 언니라고 불러야 되는데 건방진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해

근데 셋째 말이야, 우리 셋이 친구긴 하지만 선우는 두 살이나 많고 나도 한 살 위인데 싹수없지 않아

언제부턴가 나를 아랫사람 대하듯 해, 슈퍼가 들어오고 난 뒤부터 같아,

슈퍼 사장하고만 어울리려 하고 은근히 날 깔본다니까, 메리 야쓰 집 쓰레기통도 내가 비워

셋째 엄마 아버지 두 분이 나와 계실 때 엄마 생각이 나서 일 좀 도와드렸더니 저도 날 아랫사람 대하듯 하네

내게 고아 근성이 남아 있는 걸까?'

"문방구 사장님,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옵니다

셋째야, 엄밀히 말하면 메리 야쓰 종업원이고 경자 씨는 사장님이잖아"

농담을 건넨 내게

"그래, 그런데 셋째는 나한테 꼭 아줌마하고 부르잖아. 너 한테대하는 모습과는 태도가 달라

다른 사람들은 다 점포 사장님인데 나는 꼭 문방구 아줌마야, 사람들이 나를 깔보는 것 같아"

나도 뜨끔했다

나도 문방구 아줌마를 사장님이라고 불러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경자 씨의 부지런함에 감사를 표했었지만

어느새 익숙해져 문방구 아줌마의 친절을 당연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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